116화
“그래도 뛰는 동안 다른 생각은 안 났잖냐.”
그가 어깨에 팔을 걸쳐 왔으나 오랜만에 뛰었더니 너무 더웠다. 문서윤은 더위를 물리듯 그 팔을 밀어냈다.
확실히 몸이 힘드니 잡념이 씻은 듯이 물러났다. 지금은 어느 정도 숨을 고른 상태라 다시 우연재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비집으며 들어차고 있지만, 그래도 지난 몇 시간이나마 머리를 비울 수 있어서 좋긴 했다.
“또 힘들면 말해. 같이 뛰어 줄 테니까.”
“……그냥 혼자 뛸게요.”
남태은 페이스에 맞추다가는 제가 죽을지도 몰랐다. 대답이 웃겼는지 남태은이 또다시 낄낄거렸다.
“아, 맞다.”
문서윤은 천천히 걸으며 남태은을 쳐다봤다.
“나 다음 주에 목요일부터 기숙사에 없다.”
“형 어차피 금요일부터 나가잖아요.”
“어허, 어디서 말대꾸를.”
남태은이 잠깐 들르자는 듯 편의점을 향해 턱짓했다. 문서윤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울면서 형아 찾을까 봐 미리 말해 줬더니 말대꾸하네?”
“제가 애예요? 울면서 형 찾게?”
“왜, 너 나 처음 기숙사 들어온 날 울고 있…….”
문서윤은 황급히 그 입을 틀어막았다. 콧잔등을 찌푸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 남태은이 알았다는 듯 항복 의사를 표했다.
“우리 과 행사 있거든. 저녁에 끝나는데 끝나자마자 바로 애인 집 가려고.”
“알았어요.”
“룸메 없다고 울지 마라.”
“애 아니라니까?”
“아르바이트도 이제 안 한다며. 심심할 거 아냐.”
확실히 남태은까지 없으면 쓸데없는 생각이 끊임없이 차오를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질질 끌 수는 없으니까……. 혼자 있을 때 생각 정리 좀 하자.’
이렇게 어영부영 멀어질 수는 없으니 우연재를 만나기 전에 생각 정리부터 하는 게 우선이었다.
제게 실망한 우연재가 친구 관계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면 어쩔 수 없지만, 그와 아예 보지 않을 마음으로 그만하겠다고 한 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제 인생에서 우연재가 차지한 부분이 너무나도 거대했다. 미련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존재감을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혼자 생각 정리 좀 하면 되죠.”
남태은이 말없이 쳐다보는 시선을 보내왔다. 걱정하고 있는 게 한눈에 보여 문서윤은 푸스스 웃고 말았다.
“저 괜찮아요, 형.”
“잘 생각했어.”
딱히 살 게 있어 들어왔던 건 아니라 문서윤은 남태은을 따라 움직였다. 이온 음료 두 개를 꺼낸 그가 카운터 쪽으로 가더니 돌연 걸음을 멈췄다.
“오, 이거 오랜만에 본다.”
네모난 박스에 담긴 사탕이었다. 호기심이 동했는지 그는 사탕을 꺼내 들더니 이온 음료 두 개와 함께 결제했다.
“형이 더 애 같은 거 알아요?”
“어? 너 그거 차별적 발언이다?”
픽 웃은 남태은이 음료를 건넸다.
“마셔.”
“이거 사러 들른 거예요?”
“엉. 운동하고 마시면 더 맛있어.”
문서윤은 편의점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캔을 따 한 모금 마셨다. 단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짠맛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잠깐.”
남태은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옆에서 따라 걷던 문서윤은 덩달아 멈춰 섰다.
“왜요?”
어딘가를 빤히 주시하던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냐, 잘못 봤네. 아는 사람인 줄. 빨리 들어가자. 땀 식으면 감기 걸린다.”
워낙 발이 넓은 편이라 지인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문서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약간 식은 듯한 바람이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건드리듯 지나갔다. 남태은의 말처럼 땀이 식으려는지 찬 기운이 서렸다.
* * *
문서윤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요사이 의미 없이 반복되는 행동이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을 자각하고 나자 문득 지난겨울이 떠올라 입술 사이로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때도 우연재에게 연락이 왔을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짝사랑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지금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약간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자괴감과 행동은 별개였다.
마침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단정한 손가락이 메시지창을 눌렀다. 상단에 뜬 이름은 우연재가 아닌 김현승이였다. 문서윤은 몇 분 전 오고 간 대화를 다시금 훑어 내렸다.
[우 새끼 요즘 바쁜것 같던데]
[바쁘대?]
[ㅁㄹ 연락하면 거의 안받음 그래도 문 니가하면 받지 않냐?]
[나도 얼굴 못 본 지 꽤 돼서.]
[엥? 그정도면 진짜 바쁜가보네 3학년이라 그런가? 근데 걔 취준 안할텐데 여친생겼나?]
다른 친구들과는 연락이 되는지 궁금해 물어본 차였다. 혹 김현승과 약속이 있으면 슬쩍 얼굴을 비칠까, 하던 계획이 보기 좋게 수포로 돌아갔다.
‘하긴. 현승이는 나랑 우연재 사이에서 있었던 일 모르는데 도중에 끼어드는 것도 조금 그렇긴 하다.’
곱씹어 보니 최악의 방법이었다. 우연재가 어떤 식으로 빈정거릴지 빤히 예상이 갔다.
결국 문서윤은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우연재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들리기도 전에 끊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구쳤으나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런 식으로 관계를 정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바짝 긴장한 게 무색하게도 통화음 대신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문서윤은 안도의 의미인지 아니면 허탈함의 의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가까스로 낸 용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당장 얼굴을 마주할 자신은 없어도 이대로 인연 자체를 끊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이기적이게도 전처럼 그럴싸한 친구 관계로 지내고 싶었다.
‘섹스한 시점에서 그르긴 했지.’
생각해 보면 스스로 자초한 상황이었다. 우연재가 마음을 모르는 척한 것도 이런 상황을 예견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관계가 이렇게 어그러지리라는 걸 그가 예상치 못했을 리가 없었다.
요즘은 분 단위로 기분이 바뀌곤 했다. 우연재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던진 후 그만하겠다는 말을 한 게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괜히 말했나, 싶은 후회가 몰려왔다. 우연재가 모르는 척한 것처럼 저 역시 모르는 척했다면, 지금쯤 그와 함께 평소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마음을 들킨 이상 전처럼 지내는 건 어려워도 아슬아슬할지언정 소꿉친구라는 관계는 남아 있을 터였다.
“구질구질하다, 문서윤.”
문서윤은 흐릿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 건 둘째 치고, 마음을 접겠다고 다짐했는데 고작 며칠 만에 그 순간을 후회하는 스스로에게 넌더리가 났다.
그래도 생각보단 견딜 만했다. 마음이 아려도 슬픈 건 아니라 그런 모양이었다. 7년이라는 시간을 실컷 좋아해서인지 생각보다 슬프진 않았다.
문서윤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
사실은 그냥 견딜 뿐이었다.
또다시 우울한 생각이 넘쳐흐를 것 같아 그는 다른 일에 집중하기 위해 괜히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그새 또 메시지가 몇 개 쌓여 있었다.
답장이라도 하는 게 잠시나마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차근차근 살피는데 이모티콘이 올라온 채팅창이 보였다. 강수하가 보낸 메시지였다. 같은 건물에서 살다 보니 지금처럼 가끔 메시지를 보내오고는 했다.
문서윤은 무슨 일이지, 생각하며 강수하라는 이름을 눌렀다.
그 짧은 사이에 혹시나 우연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덜컥 겁이 난 것 같기도 했다. 또 그때처럼 혼자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우 때문이었다.
[형]
[기숙사세요??]
[기숙사면부탁하나드려도되나요]
띄어쓰기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아 읽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부탁? 무슨 부탁이지. 문서윤은 시간부터 확인했다. 20분 전에 온 메시지였다. 전화했으면 빨리 도와줬을 텐데, 멋쩍어서 일부러 메시지로 보낸 것 같았다.
‘나한테 부탁할 정도면 급한 일 같은데.’
아무리 성격이 싹싹해도 동기가 아닌 제게 부탁을 할 정도면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문서윤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흐르는 동안 발걸음은 문가로 향했다. 급한 일이라면 빨리 도와주는 게 나았다.
연결음이 이어지더니 곧 핸드폰 너머로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숙사 문을 연 것과 동시였다.
“…….”
문서윤은 밖으로 나가는 대신 그대로 멈춰 섰다. 익숙한 향수 냄새가 발길을 붙든 것이다.
- 어, 형!
강수하의 목소리는 멀게만 느껴졌다.
- 메시지 이제 보셨어요? 그런데 연재 형이 도와주셔서요.
그 뒷말은 도저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을 여느라 반사적으로 내리깐 시선을 천천히 끌어 올리자 낯익은 얼굴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서윤아.”
우연재였다.
“이제 나 없어도 괜찮아?”
무표정한 표정 탓인지 저를 향해 내리깔린 눈동자가 시커멓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