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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17)화 (117/139)

117화

메시지를 확인한 건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였다.

[나 기숙사 들어왔어.]

주인 잃은 침대에 멀거니 앉아서였다.

“하.”

짧게 헛웃음을 내뱉은 우연재는 지그시 혀를 씹었다. 핸드폰을 쥔 손등 위로 시퍼런 핏줄이 돋았다.

문서윤 성격상 계속 오피스텔에 머무르리라 낙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애매하게 끝난 대화를 이어 나간 후에야 나갈 줄 알았지,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질 줄은 몰랐다.

우연재는 문서윤을 잘 알았다. 천성이 순한 편이라 해도 흐지부지한 관계에 만족할 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제가 아는 문서윤이라면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시간을 주듯 오전에 오피스텔을 비운 것도 말없이 나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도망을 간다고.

“아…….”

갑작스레 치솟은 열기가 아직도 머리를 태우는지 신경이 예민하게 날을 세웠다. 우연재는 허리를 숙이며 입을 가리듯 한 손으로 제 뺨을 쥐었다. 두통에 더해진 울렁거림 때문에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동시에 뺨을 쥐지 않은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누군가를 붙잡기라도 하듯 꽉 쥐고 있던 핸드폰이 바닥을 굴렀다.

문서윤의 시간표를 꿰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넉살 좋고 입이 다소 가벼운 후배 하나만 있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문서윤을 만나지 않은 이유는 명백했다. 그래선 안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직감이 들었으니까.

이 상태에서 문서윤과 맞닥뜨리면 저 스스로가 어떤 행동을 벌일지 알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우연재는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가 도대체 언제 오는지, 오긴 하는지가 문제였다.

카페까지 그만뒀을 줄은 몰랐는데.

우연재는 눈가를 찡그리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교수에게 붙들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던 날이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두통 때문에 차를 운전하는 대신 택시를 타고 다닌 지 며칠이나 지난 날이기도 했다.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발견했다. 어릴 때부터 습관처럼 찾아온 버릇 때문일까, 아무리 멀리 있어도 문서윤은 저절로 눈에 띄고는 했다.

익숙한 인영 옆에는 누군가가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카락 색이 달라졌으나, 남태은이라는 새끼가 확실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문서윤이 그가 건넨 물을 의심 없이 마셨다. 우연재는 문서윤이 입술을 댄 생수병이 남태은에게로 돌아가 그의 입술을 거쳐 쓰레기통으로 처박히는 장면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응시했다. 웃음을 터뜨린 남자가 문서윤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다리가 움찔거렸다. 문서윤이 질색하며 제게 달라붙은 팔을 내치지만 않았어도 곧장 달려가 어깨에 뒤엉킨 손을 떼어 냈을 것이다.

우연재는 두 사람이 편의점에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리가 꽤 있던 터라 편의점을 지나칠 때는 두 사람 모두 계산대에 서 있었다.

파란색 이온 음료 두 병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네모난 박스가 보였다.

“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가자 뺨이 경직됐다. 귓가에서는 이명이 들리는 기분이었다.

곧장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려던 우연재는 가까스로 발걸음을 붙잡았다. 사고를 쳤을 때 뒷감당은 걱정되지 않았으나 하필 옆에 문서윤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예쁘게 굴어도 모자랄 판에 사고까지 치면 정떨어지겠지.’

팽팽 돌아가는 머리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결국 우연재는 그대로 편의점을 지나쳤다. 혀끝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하…….”

우연재는 신경질적으로 뻗어 나가려는 손을 간신히 억제했다. 주먹을 쥐자 힘줄과 함께 핏줄이 새파랗게 불거졌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물건을 집어 던지는 손버릇은 없었다. 비슷한 충동이 치미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한 번이라도 버릇을 들이기 시작하면 두 번부터는 쉬울 테니 그런 종류의 욕구는 어떻게든 억누르는 편이었다.

문서윤 앞에서까지 질 나쁜 손버릇을 보여 줄 일은 없겠지만, 뭐든 조심하는 게 좋았다. 괜히 이상한 버릇을 들여 저도 모르는 사이 폭력성을 내비쳤다가 문서윤이 제 본성을 알아차리고 겁에 질리면 그게 더 곤란했다.

“씨발.”

그렇다 해도 머리를 새빨갛게 물들이는 감정까지 마음처럼 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남자와 선 문서윤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듯 도저히 희미해질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저와 달리 문서윤은 아무런 일도 없던 사람처럼 괜찮아 보였다. 연신 입술을 움직이고 말갛게 웃기까지 했다. 제가 없는데도.

이대로 멀어지면 옆에는 또 다른 새끼들이 들러붙겠지. 한번 가지를 뻗기 시작한 상상은 점차 살을 붙이며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 냈다. 저를 떠나 다른 사람에게 간 문서윤의 모습이 계속해서 뇌리를 맴돌았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웃고, 그러다 키스하고, 마침내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새끼 아래에 깔려서…….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우연재는 가까스로 욕설을 삼켰다. 새까맣게 물든 머리는 잿더미만 남긴 채 거멓게 변해 버린 지 오래였다.

이대로 못 견딜 것 같은데.

……만나면 안 될 이유도 없지 않나.

문서윤을 만나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은 시꺼멓게 타 버린 머리와 함께 재로 변해 스러졌다.

문서윤은 천성이 물렀다. 약해진 마음을 귀신같이 눈치채고 들러붙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터였다. 언제 얇아진 마음을 파고들어 그 안에 숨어든 문서윤을 가로챌지 몰랐다.

우연재는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불 하나 들어오지 않은 공간에서도 얄팍하게 빛났다.

이대로 제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기숙사에 들어가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으나 그 의도는 다분했다.

우연재는 누구에게 걸려 온 전화인지 빤히 알면서도 핸드폰을 확인하는 대신 강수하의 말을 경청하는 척했다.

“형, 진짜 죄송해요. 동기 새끼들 불렀는데 다들 피방이라고 두 시간 뒤에 온다는 거예요. 저 이제 알바 가야 하는데!”

강수하가 자세한 상황을 줄줄이 보고했다. 서지은이 일을 맡겼는데 급한 일이라 손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괜찮아.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간 강수하를 통해 알아낸 문서윤의 동향이 한두 개가 아니라 이 정도 친절은 베풀 수 있었다.

“진짜 감사해요. 그나저나 기숙사 와 보셨어요? 생각보다 되게 좋죠?”

“응, 좋네. 문서윤도 여기 살아서 전에 와 봤어.”

“어? 맞아요! 가끔 아침 같이 먹을 때도 있어요.”

“아, 아침 먹어?”

우연재는 가볍게 물었다.

“형이요? 아니면 저요? 저는 매일 먹고 형도 가끔 마주치는 거 보면 드시는 거 아닐까요? 근데 서윤 형 요즘 어디 안 좋으세요?”

강수하가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우연재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문서윤이 안 좋아 보이는 이유가 저와의 관계 때문인지 아니면 계절성 우울증의 여파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게 퍽 짜증스러웠다. 차라리 전자인 게 나을 것 같은데.

“왜?”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저번에 밥 먹을 때 보니까 컨디션 안 좋아 보이시더라고요. 괜찮다고 하시긴 했는데 아닌 것 같아서요.”

“여름 잘 타는 편이라 그런가.”

“하긴, 9월인데 아직도 여름 날씨긴 하죠. 형 그럼 서윤 형 만나고 가실 거예요?”

시간을 들여 가며 강수하를 도와준 건 기숙사로 들어올 핑곗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다 해도 당장 문서윤을 만나기 위해 벌인 일은 아니었다. 지금 기숙사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고.

기숙사에 들어오면 선택권을 넓힐 수 있으니 이쪽을 택한 것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우연재는 짧은 고민 끝에 느슨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 얼굴 좀 보고 갈까 싶긴 하네. 네 말대로 컨디션 안 좋은 것 같아서.”

문을 열지 않고 돌아갈지언정 제게 주어진 선택지를 걷어찰 필요는 없었다.

“어, 그럼 제가 층 눌러 드릴게요.”

문이 열리자마자 잽싸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강수하가 문서윤이 사는 층을 눌렀다.

“그런데 나 외부인이잖아.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나?”

이미 문서윤을 졸라 기숙사에 들어온 전적이 있으면서도 우연재는 뻔뻔하게 물었다.

“에이, 제가 데려온 거잖아요! 그리고 서윤 형 만나는 것도 형네 룸메한테만 허락받으면 상관없죠. 기숙사래도 안 사는 사람들 많이 들어와요. 지하에 식당도 있고.”

“그럼 다행이고.”

다른 사람들도 드나든다면 저만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 테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입을 벌렸다.

“들어가세요! 오늘 감사했어요!”

“안녕.”

우연재는 꾸벅 허리를 숙이는 강수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기숙사를 방문한 건 딱 한 번이었으나 문서윤이 사는 곳을 잊을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지는 않았다. 머지않아 발걸음이 목적지 앞에서 멎었다. 찾는 사람이 안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는 목적지였다.

우연재는 가만히 서서 물끄러미 시선을 내리깔았다. 굳게 닫힌 도어록이 눈에 들어왔다. 룸메이트와 함께 정한 비밀번호가 걸려 있을 테니, 저로서는 풀 수 없는 잠금장치였다.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져 손끝이 절로 까딱였다.

어쩔까.

문서윤을 만났을 때 이성적으로 굴 수 있을지 아직 확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감정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석되는 법이라 오랜 시간 참고 견디면 괜찮아질 줄 알았더니, 이번엔 제가 착각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꽉 억눌러 둔 감정이 범람 직전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여태 기다렸던 거지, 임계점 없는 감정들을 한데 그러모으기 위해 기다린 건 아니었다.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우연재는 움직이지 않았다. 문을 연 이가 누구인지 확신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벌어지는 문 틈 사이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던 사람이 주춤거리듯 멈춰 섰다. 우연재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제 소꿉친구를 응시했다.

“서윤아.”

이름을 부르자 잠깐 굳어 있던 문서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나한테서 도망치니까.

“나 없어도 괜찮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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