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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18)화 (118/139)

118화

뜻하지도 않게 마주친 상황에 바짝 침이 말랐다. 문서윤은 차분하게 통화부터 마무리했다.

“안 그래도 방금 만났어. 다음에 통화하자.”

- 네, 형!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문서윤은 우연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일단…… 들어와.”

언젠가 맞닥뜨리리라 예상해서인지 평온하게 굴기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만나는 장소가 기숙사가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사람을 복도에 세워 둘 수는 없어 문서윤은 비스듬히 비켜섰다. 마침 남태은이 자리를 비워 다행이었다.

‘이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그러나 우연재는 곧장 들어오는 대신 못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문서윤은 그제야 그의 시선이 제 어깨 너머에 고정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뭘 보고 있는지는 몰라도 기숙사 복도에서 계속 이렇게 대치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안 들어올 거면 나가서 얘기하고.”

그대로 밖으로 나서려는데 커다란 손이 반쯤 열린 문을 붙잡았다. 얼마나 힘을 실었는지 손등 위로 툭 불거진 핏줄이 보였다.

“들어가.”

문서윤은 우연재를 피하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나서야 천천히 등을 돌려 안으로 들어섰다. 마음의 동요가 생각보다 고요한 것과는 별개로 어떻게 운을 떼야 좋을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사과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짝사랑을 숨긴 것이든, 섹스에 응한 것이든, 아니면 말도 없이 기숙사로 도망친 것이든.

“우연재. 일단 내가 미안하다는 말부터…….”

“문서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싸늘한 부름과 함께 목소리가 먹혀들었다. 문서윤이 우연재를 향해 느지막이 몸을 돌린 것과 동시였다. 아무래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으나 문서윤은 우연재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상대의 시선이 제가 아닌, 창가 쪽으로 향한 탓이었다.

“향수 그 새끼 거였네?”

“뭐?”

대화 주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갑자기 향수가 왜. 도통 이해할 수 없어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새까만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왔다.

저를 향한 시선에 문서윤은 멀거니 서서 우연재를 바라보기만 했다. 여섯 살부터 봐 온 소꿉친구가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우연재는 반문에 대한 답을 돌려주는 대신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 냈다. 가까이에서 이야기하려는 건가 싶어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데 그는 멈춰 서지 않았다. 오히려 멀거니 서 있는 이의 고개가 조금 더 올라갈 정도로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마침내 침대 사이의 비좁은 틈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문서윤은 뒤늦게야 몸을 돌렸다.

“갑자기 어디…… 미쳤어?”

절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우연재가 제 물건도 아닌 남태은의 향수를 들어 올려 빤히 내려다본 까닭이었다.

“맞네.”

향수를 향했던 눈동자가 다시금 저를 향한 순간, 문서윤은 직감했다. 우연재는 저 향수를 깨트릴 것이다.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덜컥 몸이 움직였다.

“놔.”

재빨리 손목부터 붙잡자 그가 눈꺼풀을 내리깔며 명령했다. 고작 한 음절이었으나 지나치게 냉랭한 말투 때문인지 눈이 돈 짐승이 뇌까리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니라 네가 놔야지. 왜 이러냐니까?”

제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함부로 깨트리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하라는 의미로 손에 힘을 싣자 향수를 쥐고 있던 손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이게 그렇게 소중해?”

“뭐?”

하, 우연재가 실소를 내뱉었다. 손목을 붙잡고 있어서인지 팔에 힘이 실리는 순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반동과 함께 덩달아 몸이 비틀거렸다.

“우연재, 하지 말……!”

다리에 채 힘을 싣기도 전에 퍽, 하고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더니 향수의 잔향이 훅 끼쳐 왔다.

“너…… 진짜 미쳤어?”

손목을 쥔 손에서 절로 힘이 빠져나갔다. 문서윤은 멍청하게 서서 깨진 향수의 잔해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태은 형한테 어떻게 사과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맴돈 것도 잠시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뇌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흔들렸다.

“윽. 뭐 해?”

팔이 붙잡히는가 싶더니 우연재가 목덜미에 코를 묻으며 몸을 가까이 붙여 왔다. 문서윤은 손을 뻗어 그를 밀어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저절로 튀어나온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향수 냄새 때문에 도통 모르겠네…….”

“아까부터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너 진짜 왜 이래?”

그러나 우연재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리어 팔 하나가 사람을 품에 안듯이 허리를 옥죄어 왔다. 제정신인지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자꾸만 목덜미에 코를 파묻는 탓에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우연재. 윽!”

밀어내기 위해 힘을 실은 순간 다리와 다리가 뒤엉키며 균형이 무너졌다. 풀썩 소리와 함께 훤히 드러난 맨피부 아래로 부드러운 감각이 뭉개졌다. 침대에 넘어진 덕분인지 몸이 급작스레 뒤로 넘어간 상황에서도 아프지는 않았다. 얼마나 가깝게 치대 왔는지 우연재가 저를 덮치는 듯한 자세로 함께 넘어진 게 문제였을 뿐이다.

“너 진짜 왜 이러냐고!”

문서윤은 팔을 휘둘러 우연재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제야 몸을 뒤덮은 커다란 그림자가 천천히 물러났다. 시커먼 시선이 무언가를 찾듯 목덜미 언저리를 배회했다.

“비켜. 일어나서 얘기하게.”

문서윤은 몸을 일으키기 위해 팔꿈치를 세웠다. 그러나 우연재는 물러서지 않았다. 팔 하나로 상체를 지탱한 채 남은 손으로 셔츠 깃을 들춰낼 뿐이었다. 제가 하는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는 눈치였다.

“서윤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얘 진짜 왜 이러지? 다시 한번 커다란 몸을 밀어내려던 손은 나지막한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기숙사에서 마주친 것만으로도 충분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아 안으로 들였는데, 제 물건도 아닌 남태은의 물건을 망가트릴 줄은 몰랐다. 황당함과 화가 뒤섞여 도대체 왜 이러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분위기가 이상해 입을 떼어 내기가 어려웠다.

문서윤은 눈을 깜박였다. 시야를 가득 채운 건 저를 덮치듯이 상체를 기울인 남자였다. 덕분에 그는 우연재의 얼굴을 샅샅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우연재는 매우 화가 난 표정이었다. 남자를 좋아하냐 묻던 때와는, 그렇다고 고백했을 때 고해성사를 바란 줄 알았느냐며 빈정거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싸늘한 얼굴이었다.

이렇게까지 눈이 돈 우연재를 마주한 건 처음이라 입술조차 달싹일 수 없었다.

“나랑 잔 이후에도 붙어먹었어?”

이어진 말은 당황스러움에 기름을 끼얹었다.

“……뭐?”

“편의점에서 뭐 샀어?”

이게 지금 무슨 소리지. 문서윤은 몸을 마저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또다시 눈만 깜박거렸다. 평소답지 않게 전혀 관련 없는 단어들을 늘어놓는 우연재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향수가 갑자기 붙어먹었느냐는 말로 튀더니 이제는 생뚱맞은 편의점이었다.

“그 꼴을 보는데, 씹…….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걸리적거린다는 듯 셔츠 깃을 들춰내던 손가락이 느릿하게 목덜미로 닿았다.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너 지금.”

이제는 혼란스러워졌다.

“내 마음 가는 대로 했다가 이 나이 먹고 사고 치면 큰일이잖아.”

“무슨 소리냐니까?”

“약속 안 지키면 네가 정떨어져 할 테니까.”

문서윤은 입술을 지르물며 우연재를 응시했다.

그를 계속 마주 보던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그 표정은 이제야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늘 장난스럽게 굴던 표정이 사라지자 분위기가 평소보다 배는 날카롭게 느껴져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잖아도 무표정하게 서 있으면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냉한 얼굴에 싸늘함까지 깔리자 한밤중에 감정 없는 조각상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오싹 소름이 돋았다. 우연재가 무서워서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잘 세공된 조형물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곤 하던 한기였다.

그나마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피곤함에 예민하게 날이 선 눈꼬리였다. 남들 눈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보일 듯했으나, 그를 오랫동안 알아 온 문서윤의 눈에는 그 위에 젖어 든 피곤이 확실히 보였다.

순간 우연재가 횡설수설하는 이유가 잠을 못 잔 탓인가 싶어졌다. 폭탄을 던진 당사자가 기숙사로 도망친 바람에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이 한층 더 복잡해진 게 아닐까.

저라도 침착하게 굴어야 할 것 같아 문서윤은 자꾸만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붙잡았다.

“나 지금 네가 하는 말 하나도 이해 안 되니까 똑바로 말해. 무슨 소리냐고, 지금.”

“네 룸메가 섹파잖아.”

“……뭐?”

“우리 서윤이 왜 이렇게 눈치가 없지.”

“너 지금 무슨 소리…….”

“내가 왜 지금까지 네가 기숙사 들어가는 거 싫어했을 것 같아?”

살면서 이렇게 어이가 없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문서윤은 처음으로 우연재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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