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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19)화 (119/139)

119화

제게 섹파가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알고 있었다. 굳이 정정하지 않은 건 차라리 제 짝사랑 상대를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길 바라서였다. 오랫동안 감춰 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고, 짝사랑을 성욕이라 칭하는 친구에게 더러운 마음이 너를 향했음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 상황에서도 같은 착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흔적을 찾듯 훑어 내리던 시선도,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손길도,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순식간에 허탈함이 몰려왔다.

문서윤은 손끝이 모멸감에 물들어 덜덜 떨리는 걸 인지하고 나서야 저를 덮친 감정이 허탈함이 아닌 절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냄새 달고 오지 말랬잖아.”

우연재가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뇌까렸다. 화가 난 사람치고는 언뜻 무심하고 서늘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짓씹는 목소리는 날것의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게 그 소리였구나. 문서윤은 손가락을 말아 쥐어 덜덜 떨리는 마음을 감췄다. 이러다가 손이 아닌 온몸을 부들부들 떨 것만 같았다.

“너, 나한테…… 향수 선물한 것도, 하, 그것 때문이었어? 태은 형 향수 냄새 때문에?”

“태은 형? 존나 친하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듯 현기증이 도는 기분이었다. 문서윤은 참지 못하고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곤 연신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우연재의 손목을 또다시 낚아챘다.

“형한테 실례되는 말이라서 이것부터 정정할게.”

“뭘.”

“형이랑 나랑 그런 사이 아니야.”

“그걸 믿으라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연재가 뭐 때문에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알 수 없었다.

“못 믿으면?”

문서윤은 되물었다.

“뭐?”

“네가 못 믿으면 어떡할 건데, 연재야.”

화가 나기 시작하자 우연재와 비슷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나한테 좆질한 새끼들 찾아다니게?”

“문서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한층 싸늘해졌다.

“나는 네가 이야기하려고 온 줄 알았어.”

허탈함과 절망은 삽시간에 덮쳐 온 것처럼 삽시간에 물러났다. 그 자리를 채운 건 다름 아닌 울컥함이었다. 그와 함께 옅은 직감이 찾아왔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욱더 큰 허탈과 절망이 저를 덮쳐 올 것이다.

“너 만나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했고.”

우연재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좋을지 고민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자글자글 들끓는 감정 덕분에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우연재는 여전히 싸늘한 무표정이었다. 조금 전 향수 때문에 저를 몰아붙일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좋아해서 미안하다고 하려고 했어.”

빗방울이 땅에 부딪혀 툭 터지듯이 고백 아닌 고백이 한숨처럼 튀어 올랐다.

“네가 섹스하자고 했을 때 하겠다고 한 것도 너 좋아해서 그런 거야.”

수치심 따위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래도 평생 말할 생각 없었어. 너 잃기 싫었으니까.”

시멘트 바닥 위에서 꿈틀거리며 죽어 가던 생명체만큼이나 하찮게 보일 법한 고백이었다. 곧바로 그만하겠다고 했으니 실효성이 부재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래도 우연재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은 처음과 그대로였다. 어떻게 사과할까 고민한 것도, 그와 마주 보고 선 것도 그래서였다.

동성을, 오랜 소꿉친구를 좋아하는 제가 역겨워 저쪽에서 먼저 관계를 끊어 낸다면 모를까, 먼저 멀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낙관적인 바람도 있었다. 제 감정을 알면서도 별말 없는 걸 보면 우연재도 그냥 넘어가려는 게 아닐까, 비록 좋아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긴 했지만 그만하겠다고 했으니 한 번쯤은 봐주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너는 역겹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거 진심이었어. 성욕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좋아했다고. 그런데, 너는, 하.”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도 모르게 너무 많은 걸 바란 듯했다.

우연재와 함께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리고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한 만큼 아직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온 모양이었다.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야? 태은 형이랑 그런 사이냐고?”

우연재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가느다랗게 벼려진 시선을 보내올 뿐이었다.

“내가 그때 한 말 생각해 보긴 했어?”

제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면 저런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삼자를 대화에 끌어들일 여력이 없었을 테니까.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난 나름대로 죽을힘을 다해서 한 말이었어.”

서서히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너는 만나자마자 나한테 하는 말이 고작 그거야? 룸메가 섹파냐고? 그게 그렇게 중요해?”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라고 해서 결코 가뿐했던 건 아니다. 가볍고 차분하게 고백했다고 해서 결코 쉽고 담담하게 끝낼 수 있는 마음은 아니었다.

“네가…….”

문서윤은 잠깐 말을 멈췄다. 갑작스레 몰아닥친 탈력감에 절로 눈꺼풀이 감겼다. 지친 기색을 읽어 냈는지 우연재가 나지막하게 욕설을 지껄이며 물러났다.

“하…….”

문서윤은 한숨을 내쉰 뒤에야 억지로 힘을 실어 허리를 세웠다. 자연스레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맨발인 저와 달리 양말에 감싸인,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연재의 발이 보였다. 그게 꼭 지금의 관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살을 고스란히 드러낸 저와 달리 우연재는 그 무엇도 드러내지 않았다.

“내 말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그런 말은 못 했겠지.”

문서윤은 맨발인 스스로를 외면하듯 시선을 끌어 올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 제게 섹파가 있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꺼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우연재와 제 관계지, 다른 사람은 이 대화 주제에서 완전히 논외였다.

“그게 왜 안 중요한데.”

우연재가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로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네가 다른 새끼랑 자다가, 하……. 언젠가 착각하면 어떡하려고?”

도대체 뭘 착각한다는 걸까.

“나 좋아한다며.”

“…….”

“이제 다른 새끼 좋아하려고?”

문서윤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제야 우연재가 하려는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남자와 자면 마음이 그쪽으로 옮겨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간 남태은을 이상할 정도로 경계한 것도, 고작 향수 하나에 눈이 돌아 남의 물건을 집어 던진 것도, 제게서 다른 사람의 흔적을 찾으려 한 것도 그래서일 테다. 어딜 봐도 경계심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다른 사람 좋아하면 안 돼?”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우연재가 다른 사람을 경계하는지, 그리고 왜 제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만약 같은 마음이었다면 굳이 제 감정을 모르는 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었고, 더 궁금했다.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서 앞으로 다른 새끼 좋아하겠다고?”

우연재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뭐가 문제야, 서윤아.”

그 사이로 실소가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신경질적인 손길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이 보였다.

“나 좋아한다며. 섹스도 하는데 뭐가 문제야.”

“뭐?”

“앞으로도 나랑 하면 되잖아. 도대체 왜 다른 새끼를 찾으려고 하지? 위험하게?”

설핏 찡그려진 눈썹이 한층 더 거세게 찌푸려졌다.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며 뺨이 씰룩였다.

“그러다 그 새끼 좋아하게 되면, 나는 안 만나고 그 새끼만 만나게?”

눈꼬리부터 서서히 접히는 눈매가 점차 형형해졌다.

“그 새끼가 나 손절하라고 하면 손절할 거고?”

우연재는 지금 비약적인 소리를 하고 있었다.

“연애하고 싶어? 그럼 나랑 하면 되잖아.”

문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너는……. 그게 쉬워?”

“어려울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네. 너랑 나랑 연애한다고 도대체 뭐가 달라지는데.”

이가 입술을 짓누르는 감각은 뭉툭하게만 느껴졌다.

“지금처럼 같이 밥 먹고, 같이 시간 보내고, 네가 내킬 때 섹스하면 되잖아.”

“하.”

“연애가 별거야?”

아득한 기분과 함께 발밑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누워 있을걸.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무중력 지대에 떨어져 혼자 허덕이는 느낌이었다.

문서윤은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 노력했다. 향수 냄새 때문인지 머리가 아팠다.

“왜 그렇게 ……쉽게 말해?”

우연재에게 마음을 고백하지 않은 건 그와의 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고백하는 순간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욕심이 없으니 연애를 기대한 적도 없지만, 설사 연애를 하더라도 언젠가 끝이 날 때를 대비해 조심스레 굴었을 것이다. 헤어져도 친구로 남을 수 있도록.

그런데 우연재는 연애라는 단어를 참 쉽게도 입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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