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문서윤. 내가 지금 쉽게 말하는 것 같아?”
그가 사납게 되물었다. 움찔거리는 손끝에서 저를 잡아채고 싶은 욕구가 느껴졌다.
“쉬운 게 아니면?”
문서윤은 그 움직임을 모르는 체하며 되물었다.
“네가 나 버릴 부담 지고 가겠다는 거잖아, 지금.”
“뭐?”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너 놓을 생각 없어. 그런데 넌 맨날 나한테서 벗어날 생각만 하잖아. 아니야?”
당장 군대와 기숙사가 떠올라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네가 계속 나만 좋아하면 문제 될 거 하나도 없어. 난 너 저버릴 생각 조금도 없으니까.”
그럼 네가 얻는 게 뭔데.
너도 날 좋아하냐고,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꺼낸 거냐고 묻지 않아도 충분한 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우연재가 말하는 연애란 결국 적선이었다. 그가 얻는 것이라고는 제 존재가 전부니, 적선보다 적합한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테다.
문득 가정 하나가 머릿속을 범람했다. 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정말 불현듯이 몸을 내민 가정이었다. 그런데도 순식간에 열이 오르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우연재, 너…….”
자고 싶어서 모른 척했나.
문서윤은 아직도 우연재가 제 감정을 언제 눈치챘는지 알지 못했다. 본가를 방문한 날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피아노 칠 때부터 꼴렸어.’
제 감정을 모르는 체한다면 부담과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관계가 바뀌지 않는 이상 친구 사이의 책임 역시 바뀌지 않을 테니까.
뭔가가 와르르 쏟아지는 듯 마음 한구석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나랑 자고 싶어서 그래?”
머릿속에서 흘러넘친 가정을 꺼내 들자 우연재가 하, 헛웃음을 내뱉었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온 웃음소리는 뾰족하게 올라간 입꼬리만큼이나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잘래?”
포기 뒤로는 욱한 마음만이 남았다. 문서윤은 셔츠 단추를 끄르며 물었다.
향수 하나에 눈이 돈 것도, 옷깃을 뒤적이면서까지 맨살을 확인한 것도, 연신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것도 다른 사람에게 뺏겼다는 기분 때문이었나, 의심이 들었다.
“뭐 해?”
침대에서 물러난 이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던 우연재가 기어코 손목을 낚아챘다.
“자자고. 섹스해.”
“문서윤. 네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지.”
그 말에는 기어코 꾹 눌러 둔 감정이 폭발했다.
“그럼 내가 지금 제정신일 것 같아?”
고일 새도 없이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며 뺨을 적셨다. 우연재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으나 문서윤은 도리어 뒤로 물러섰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엉켰다. 우연재와 나눈 대화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어쩌다 기숙사에 들어왔는지, 무엇 때문에 말다툼을 하게 된 건지, 제 감정은 왜 격해졌는지, 불과 몇 분 전을 되짚기가 어려웠다.
문서윤은 그제야 잠깐 물러간 허탈과 절망이 다시금 몰아닥쳤음을 깨달았다. 잠깐의 안정 뒤에 찾아온 그것들은 해일만큼 너무나도 높고 또 너무나도 거대해서 미처 대비할 수가 없었다. 몰아닥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한들 고스란히 뒤집어썼을 감정들이기는 했다.
“진짜 최악이다.”
저도, 우연재도 최악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연재를 좋아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그래서 차마 그만둘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만 좋아하고 싶었다. 이 홑마음만 없다면 전부 편해질 것 같았다.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남겠지만, 차라리 모든 감정이 그 구멍으로 빠져나가 마음 자체가 텅 비었으면 했다.
“문서윤.”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거부의 뜻을 명백하게 읽었을 텐데도 우연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왔다. 그러나 문서윤은 또 한 번 저를 달래려는 팔을 쳐 냈다. 울고 있어서인지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거부였으나 우연재는 고장 난 기계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시선이 내쳐진 손을 향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만해, 이제.”
“씹, 도대체 뭘 그만하자는 건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짓씹는 욕설과 함께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다.”
문서윤은 명료하게 답했다. 언제 쏟아졌냐는 듯 한순간에 눈물이 멎었다.
“다 그만하자고.”
“하.”
우연재가 비죽이 웃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이제 나 안 좋아하겠다고?”
“응.”
욕심처럼 될 수 있는 마음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래도, 일단은 그만두고 싶었다.
“첫사랑 같은 거 좆도 아니라고 한 건 너야.”
그러니 그만둘 수 있을 것이다.
* * *
“야, 그만해.”
이진혁이 손목을 잡아챘다. 힐금 쳐다보자 그가 재빨리 손을 놓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땀이 날 때 건드리면 싫어한다는 걸 모르지 않아 나온 행동이었다.
“하…….”
우연재는 호흡을 고르며 글러브를 바닥에 툭 내던졌다. 이어 헤드기어까지 벗자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수 뛸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
“열심히 하려고 오는 거 아니라는 거, 아실 때 되지 않았어요?”
“그거야 그렇지만.”
어떠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복싱장을 찾는다는 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이진혁이었다. 보통은 무언가를 우그러뜨리고 싶은 욕구였다.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 쪽으로 다가가자 그가 뒤를 쫓아왔다.
“뭔 일 있는 건 아니지? 딱 봐도 살 빠졌는데.”
선수들 체급 조절까지 담당하니 눈썰미가 무딜 리 없었다. 우연재는 순순히 대답하는 대신 제 뒷모습을 훑어 내리는 눈길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너 밥은 제대로 먹냐? 도련님 살 빠진 거 알면 회장님 마음 아파하실 텐데.”
일곱 살배기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럴 나이는 한참 지났는데 또 시답잖은 농담이었다. 흉흉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의도가 뻔해 우연재는 말없이 물만 마셨다.
“잘 먹고 다녀라. 가뜩이나 네 덩치 유지하는 연비가 있는데.”
“신경 써야 하는 사람 따로 있지 않나.”
알아서 할 테니 선수들에게나 신경 쓰라는 의미를 전하자 이진혁이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우연재가 가끔 와야 그쪽에 신경 쓸 수 있지 않겠냐.”
“어떡하지, 당분간 계속 올 것 같은데.”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제발 빨리 해결 좀 해라.”
그 역시 빨리 해결되길 바랐다. 협조해야 하는 상대가 협조할 마음이 없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갈게요.”
단번에 비운 생수병을 우그러뜨린 우연재는 빈 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놓으며 건성으로 인사했다.
“차 안 가지고 온 것 같던데?”
“요즘 택시 타고 다녀요.”
“왜? 고장 났냐?”
“운전할 정신 아니라.”
두통은 물론 종종 머릿속을 잠식하는 잡념과 상상 때문에 운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운전도 4년 차이니 큰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사고가 나면 혼자 처박는 것도 아니고 조심하는 게 나았다.
“아, 맞다. 비 오는 것 같던데 우산 가져가.”
이진혁이 손에 우산을 쥐여 주었다. 연보라색 물방울무늬가 잔뜩 찍혀 있는 편의점 우산이었다. 회원이 두고 간 물건인 듯했다.
비가 온다는 소리에 우연재는 힐긋 바깥을 응시했다. 초가을에 들어서서인지 근래에는 종종 비가 내리고는 했다.
“잘 가라. 웬만하면 바로 해결하고.”
우연재는 그만 오라는 뜻이 담뿍 담긴 인사를 무시하며 복싱장을 나섰다.
‘여우비네.’
하늘은 가을답게 맑았고 또 가을답게 햇빛이 따가웠다. 빗줄기가 굵지 않은 걸 보니 여우비인 듯했다. 그칠 때까지 그 아래에 서 있더라도 몸이 푹 젖는 일은 없을 테다.
“…….”
떨어지는 빗방울 위로 그 순간이 겹쳐졌다. 우산 아래에 서서 담담한 표정으로 그만하겠다 선언하던 문서윤이 그 뒤를 따라오며 머리를 어지럽혔다.
차분한 표정은 이내 북받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뚝뚝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우연재는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문서윤이 옷을 벗으려 할 때부터 차오른 울렁거림은 그가 눈물을 터뜨린 순간 삽시간에 전신을 타고 번져 나가 여태 저를 괴롭히고 있었다. 모든 게 잘못됐다는 직감과 함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 묵직한 무게는 여태 제자리를 찾지 못했는지 때때로 불완전함이라는 기분을 선사하고는 했다.
지금 역시 다르지 않았다. 몇 시간을 내리 이어진 스파링이 끝났는데도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어 손끝이 절로 움찔거렸다. 그 저릿함이 가슴에까지 영역을 뻗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이라면 으레 뛰어야 하는 심장이 제 존재를 알릴 때마다 온몸의 신경이 바짝바짝 곤두섰다.
‘그래서 이제 나 안 좋아하겠다고?’
‘응.’
문득 떨어진 빗방울이 뺨을 스쳤다.
“…….”
팡. 우연재는 우산을 펼쳤다. 하늘 아래로 나아가는 남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