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문서윤은 며칠을 앓았다. 때마침 공강인 데다 주말이 겹쳤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뒀고, 남태은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꼴이 말이 아니네…….”
차가운 물에 세수를 했는데도 눈가가 홧홧했다. 그렇게 한참 찬물을 끼얹다 거울을 보자 퉁퉁 부은 눈꺼풀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냈다. 만약 남태은이 이 꼴을 봤다면 평소처럼 놀리는 대신 진지하게 무슨 일이냐고 물을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향수는 어떡하지.”
남태은을 떠올리자 저절로 못 쓰게 된 향수가 따라왔다.
우연재가 가고 난 이후 문서윤은 한참을 숨죽여 헐떡이다가 마음을 다잡듯 조각난 유리들을 치웠다. 곧바로 남태은에게 이실직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어엉? 괜찮아. 어차피 거의 다 썼어.
우연재 이야기가 나오면 대화가 심각해질 것 같아 실수로 깨트렸다고 둘러댄 터라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그래도요. 제가 주말에 같은 걸로 사 둘게요.’
- 됐어. 어차피 그새 취향 바뀌어서 다른 거 사 올걸. 아, 좀! 전화하는 거 안 보여?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지 핸드폰 너머로 성가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서윤은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건넨 뒤 통화를 마무리했다.
남태은의 말대로 거의 다 쓴 향수라 치우는 데 애를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얼마나 세게 던졌는지 향수병이 이렇게까지 깨질 수 있구나,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뒷정리를 한 게 전부였다.
유리 조각들은 물론 미미하게 고여 있던 액체까지 전부 치웠는데도 여태 인공적인 향이 남아 있는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문서윤은 작게 고개를 흔든 뒤 욕실을 나섰다.
“내일은 가라앉아야 하는데.”
목요일부터 내리 운 건 아니었다. 눈물은 생각보다 쉽게 그쳤다.
우연재를 내보내고 난 뒤 그는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없어 허리를 푹 수그리자 덩달아 고개가 떨어졌다. 비꽃이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듯 바지 위로 성긴 자국이 생겨났다. 그는 가만히 앉아 머릿속을 괴롭히는 온갖 생각들을 견뎌 내다가 이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가운 물에 얼굴을 파묻은 건 그다음이었다.
그만 좋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그러니 계속 우는 것보다는 정신을 또렷하게 만드는 편이 나았다.
짝사랑은 습관 같은 것이다. 제게는 손에 익은 피아노나 다름없었다.
습관은 다른 습관에 가려지고 피아노는 건반을 누르지 않으면 그만이니, 짝사랑 역시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끊어 낼 수 있을 터였다.
평생 짝사랑을 앓다 죽는 사람보다는 짝사랑을 앓다가도 새로운 이를 만나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았다. 굳이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더라도 그 감정을 좋은 추억거리로 혹은 잊힌 기억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단칼에 잘라 낼 수는 없어도 조금씩 잘라 내다 보면 언젠가는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얼음찜질 좀 하고 자면 괜찮겠지.”
문서윤은 부러 혼잣말을 내뱉으며 당장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수시로 들이닥치는 감정 때문에 마음이 괴로워질 게 분명했다.
‘일단 편의점 가서 얼음 좀 사고…….’
또다시 불쑥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문서윤은 습관처럼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얼음을 대고 있으면 잡념이 가실지도 몰랐다.
얇은 눈꺼풀 위로 차가운 얼음을 올리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문서윤은 꿋꿋하게 얼음주머니를 눈 위에 올려 두었다. 그냥 가라앉길 기다리며 내버려 둬도 괜찮을 듯했지만, 이 꼴로 강의실에 들어가면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달라붙을 게 불 보듯 훤했다. 그 시선들은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우연재에게 소식이 들어갈까 봐 겁이 났다.
‘오늘 찜질하면 내일은 그럭저럭 괜찮아질 것 같은데.’
눈이 왜 그러냐며 놀릴 만큼 친한 동기들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다들 왜 그러냐고 묻긴 하겠지만, 피곤해서 부었다고 하면 그러려니 수긍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
언제 어깨를 움츠렸냐는 듯 몸은 금세 차가움에 적응했다.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찬 기운이 가시자마자 또다시 잡념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내쳐진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우연재였다.
대놓고 거부감을 표하며 그의 손을 쳐 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언뜻 충격받은 표정도 이해가 갔다. 저 역시 우연재가 비슷한 행동을 했다면 놀랐을 테니까.
‘그만 생각해야 하는데.’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그 충격받은 얼굴이 뇌리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우연재의 그런 얼굴은 처음 봐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건, 말하자면, 어딘가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걔가 왜.’
제가 아는 우연재는 인간관계로 상처받을 성격이 아니었다. 여태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그에게 기대게 된 건 그런 영향도 있을 테다. 물 흐르듯 정처 없이 휩쓸리는 저와 달리 항상 명확한 자리에 서 있었으니까.
“착각이겠지…….”
역시 착각이 아닐까. 저도 모르게 울컥 솟아오른 감정을 우연재에게 투영해 그렇게 보인 모양이었다.
문서윤은 괜스레 얼음주머니를 꾸욱 눌렀다. 한여름, 눈꺼풀을 덮던 차가운 손이 떠올랐다.
“……하.”
오랜 시간 함께한다는 건 이런 감각이구나. 자그마한 일상 하나하나에 우연재가 녹아들어 있어 무슨 일을 하든 그를 떠올리게 됐다. 문서윤은 머릿속을 새까맣게 비우기 위해 감은 눈을 더 꼬옥 감았다.
얼음주머니 아래로 녹아내리기 시작한 물기가 눈꼬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 * *
문서윤은 동기에게 인사를 건네곤 강의실을 나섰다. 눈이 많이 가라앉은 덕분에 모자로도 영 좋지 않은 컨디션을 가릴 수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괜히 핸드폰을 확인했다. 2학기 들어서서 차를 타고 다니는 덕분에 길을 걷다 누군가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지만, 습관처럼 정면만 보고 걸으면 우연재가 눈에 띌 것만 같아 의식적으로 하게 된 행동이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났으니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이었다.
‘일단 기숙사 가서…….’
남태은이 왔을지도 모르겠다. 향수를 망가트린 바람에 미안해 얼굴을 보기가 멋쩍었으나 그래도 막상 만나면 반가울 것 같았다. 아직도 다 가라앉지 않은 눈두덩이와 때때로 멍해지는 상태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들키겠지만, 그래도 그와 이야기하다 보면 종종 떠오르곤 하는 생각을 억누를 수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섣불리 캐물을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편했다.
왔냐고 연락해 볼까, 고민하며 운전석을 열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동시에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불가항력이었다.
“얘기 좀 해.”
반사적으로 돌아서자 바닥으로 내리깔린 시야에 낯익은 운동화가 들어왔다. 문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우연재가 서 있었다. 개강 이후 경영대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어 월요일부터 마주친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차 어디 주차했어?”
고작 나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잘라 내려던 문서윤은 말을 바꿨다. 우연재가 고집을 꺾을 리는 없고, 저 역시 그때와 달리 머릿속이 차분했다. 17년을 알아 왔는데 흐지부지 끝낼 관계는 아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든 이 관계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차 안 가지고 다닌 지 좀 됐어.”
학교 근처에는 보는 눈이 많아 꺼낸 이야기였는데 우연재가 예상외의 답을 내놓았다. 평온할 말투와 달리 얼굴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배로 날카로워 보였다.
택시 타고 다닌다는 소리인가? 버스나 지하철은 물론 많은 사람이 거쳐 가는 택시 역시 선호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절로 의문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웬 택시냐고 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아 묻기도 뭣했다.
문서윤은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제 이런 얘기도 나누기 힘든 사이가 됐구나. 고작 며칠 사이에, 고작 대화 한 번에.
“내 차에서 얘기해.”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차마 궁금한 것을 묻지는 못하고 운전석을 열었다.
어머니를 보러 가기 위해 가져온 차가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짐을 옮길 때도 쓸모가 많더니, 이제는 고립된 대화 장소까지 만들어 주었다.
문서윤은 시동을 끈 뒤에도 잠시간 정면을 응시했다. 조용하게 대화할 만한 장소가 많지 않다 보니, 차는 어느새 너른 공터에 주차되어 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오래전 우연재와 설전을 벌였던 그 장소였다. 그의 차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기억이 여태 선명했다.
노려보듯 정면만 응시하고 있자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문서윤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