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123)화 (123/139)

123화

“할 얘기가 뭔데.”

“너랑 그렇게 헤어지고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우연재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문서윤을 만난 이후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몸 상태가 바닥을 쳤으나, 컨디션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눈앞에 문서윤이 있어서일 테다.

얼굴 보니까 좋네. 그는 일부러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제 소꿉친구를 홍채에 담았다. 모자 그늘 때문에 얼굴이 절반이나 가려져 눈을 제대로 들여다보기가 어려웠으나 문서윤이라는 존재가 당장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한테 느끼던 감정이 너랑 비슷한 것 같아서.”

우연재는 느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문서윤이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문서윤이 제게 품는 감정과 완전히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다. 기반한 애정은 같을지 몰라도 그 방향성은 엄연히 달랐으니까. 제가 문서윤에게 느끼는 감정은 문서윤이 제게 보여 준 것처럼 찬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저 새까말 따름이었다.

그러나 우연재는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통해 분명하게 배웠다. 단순히 소유욕이라 명명한 감정이 다른 이름을 띨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고도 확실하게.

“뭐?”

문서윤이 뺨을 찌푸렸다. 얼굴에 진 그림자 때문에 정확한 표정을 읽어 내기가 어려웠다. 모자 벗기고 싶은데, 싫어하겠지. 우연재는 문서윤을 마주 보는 방향으로 느지막이 몸을 튼 뒤 제 옆머리를 시트 헤드에 기댔다. 어깨가 부딪쳐 불편했으나 이 정도 불편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좋아한다고, 서윤아.”

그렇게 우연재는 제가 입에 담으리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단어를 혀끝으로 굴렸다.

새삼스레 그 어감이 마음에 들었다. 늘 문서윤을 소유하고 싶었던 건, 그럼에도 끝없는 욕구를 내리 억누른 건 이 단어를 느끼기 위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랑 같은 의미로.”

나긋한 목소리 뒤로 문서윤은 짧게 호흡을 멈췄다. 좋아한다는 말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애를 써야만 했다. 분명 저 스스로가 차분한 상태라 생각했는데 우연재가 내뱉는 한 음절 한 음절이 문장으로 뭉쳐지자 그 뜻을 이해하기가 버거웠다.

얼굴에 의아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우연재가 쐐기를 박았다.

“좋아해.”

예쁜 얼굴로 흐무러지듯 웃으며.

“다른 애들 좋게 보는 거랑은 다른 의미로 좋아한다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문서윤은 입술만 달싹였다.

내가 지금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은 게 맞나.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내가 잘 몰랐어.”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간 것도 아닌데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문서윤은 말없이 우연재를 응시했다. 피곤한지 살짝 풀린 듯한 눈꼬리가 살살 휘어지더니 입술이 올라갔다. 며칠 전의 다툼은 없던 일인 것처럼 지극히 우연재다운 표정이었다.

“하.”

문서윤은 한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숨을 내쉬며 고개를 바로 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금 우연재를 향한 건 몇 초 정도가 흐른 뒤였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들여다보며 어지러운 머릿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으나 헛된 짓이었던 모양이다.

갑작스레 저를 좋아한다 말하는 소꿉친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우연재, 너 지금…….”

숨을 고르듯 짧게 끊어진 호흡이 헛웃음처럼 흘러나왔다.

“무슨 소리 해?”

이렇게까지 어이가 없는 말을 들으면 머리가 어지러울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말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예상 밖의 반응에 우연재는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좋아한다는 말은 결코 어려운 단어가 아니었다. 하물며 저를 좋아한다는 문서윤에게는 더더욱.

“좋아한다고.”

그는 재차 새로 배운 감정을 혀끝으로 굴렸다.

“그러니까 연애하자.”

문서윤에게 제 감정을 분명히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연재는 어렵지 않게 제게서 도망치려는 문서윤의 내심을 읽어 냈다. 그만두겠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이제 그만하자는 말과 함께 떨어진 선고였다. 그러니, 그가 도망치기 전에 붙잡아야만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연애일 테고.

무엇보다 제 감정을 자각한 이상, 문서윤과 여태 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새로운 정의 아래에서 해 보고 싶었다. 친구와 연인은 많은 게 달라질 테다.

“하…….”

연애라는 단어에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흘려보냈다. 대화가 도돌이표를 그리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저를 좋아한다는 말도 받아들이기가 힘든데, 연애를 하자는 말은 더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지난번에 느낀 아득함과는 다른 의미로 발밑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너 지금 이러는 거 이상해 보이는 거 알아?”

잔뜩 굳은 표정만큼이나 목소리 역시 딱딱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우연재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슬쩍 눈썹 앞머리를 찌푸렸다.

“내가…… 그만두자고 했잖아.”

괜히 한 말이 아니었다. 저를 위해서도, 우연재를 위해서도 그만하는 게 나았다. 이미 어긋난 관계라 해도 이 이상 어긋나지는 말아야 했다.

문서윤은 종종 열여섯의 여름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럴 수 없으니 그만두자고 한 것이다.

“그래서. 네 말대로 전부 그만두자고?”

끝이 희미해지는 말꼬리 하나에 단번에 진심을 파악했는지 우연재가 헤드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천천히 떼어 냈다. 몸을 약간 움직인 것뿐인데도 한순간에 공기가 달라졌다.

“얼굴도 보지 말고, 아예 없던 관계처럼 살자고?”

달싹이며 굳어 가는 눈매와 서서히 찌푸려지는 뺨, 그리고 비틀리는 입술을 따라 목소리에 헛숨이 섞이기 시작했다.

“……당분간 보지 말자는 거잖아. 나도 괜찮아지고, 너도 괜찮아지면 그때 다시 친구 관계로 돌아가자고.”

“난 괜찮아지고 말고 할 게 없는데.”

우연재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언제 눈웃음을 쳤냐는 듯 찡그려지는 눈매가 사뭇 삐딱해 보였다.

“그리고 네가 안 괜찮아지면?”

말투는 여전히 느긋했다. 헛숨이 자취를 감추자마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사나운 숨소리가 스며들었을 뿐이다.

“계속 기다릴까? 너 괜찮아질 때까지?”

문서윤은 뺨 안쪽을 깨물었다.

“그게 언젠데?”

우연재는 진심으로 궁금한 사람처럼 물었다.

“기다리는 건 문제없는데…….”

그가 무언가를 떠올리듯 눈가를 찌그러트리자 한쪽 눈이 야트막하게 찡그려졌다.

“지난번에도 몇 년이나 입 닥치고 기다렸잖아. 사고도 안 치고 얌전하게, 그치.”

어렴풋하게나마 군대 이야기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기다리라고 할 거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정도는 말해 줘야지.”

문서윤 자신조차도 언제 괜찮아지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도 툭하면 우연재가 머릿속을 범람하고는 했다. 모든 감정을 쏟아 냈다 여겼는데도 마음은 텅 비기는커녕 아직도 무언가로 가득 차 있어 저를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밀물과 썰물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바다처럼 영원한 파도에 갇혀 허덕이는 느낌이었다.

이 마음이 결국에는 비는지, 최후에 남은 공허함이 도대체 언제쯤 머리까지 침식해 모든 걸 잊게 만들지, 그래서 괜찮아지는 순간이 오긴 하는지 문서윤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야 내가…… 하, 얌전히 기다릴 거 아냐.”

얌전히. 문서윤은 그 단어를 곱씹었다.

“적어도 데드라인은 줘야지.”

끝까지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문서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연재의 착각을 정정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는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연재.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냐. 착각하지 마.”

“뭐?”

정말 저를 좋아했다면 남자를 좋아하냐며 화를 내지도, 제 감정을 모르는 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서윤은 우연재를 잘 알았다. 만약 저를 좋아했다면, 그 와중에 제 짝사랑 상대를 다른 남자라 착각했다면 그 감정을 성욕으로 매도하는 대신 저를 향하게 만들고도 남았을 놈이었다.

우연재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들이는 수고를 문서윤은 결코 모르지 않았다.

“나랑 섹스하고 나니까 착각하는 거야.”

문서윤은 덤덤하게 말했다. 짝사랑 상대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차분한 마음만큼이나 잔잔했다. 주제 파악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몸정이 마음정 된다고…… 나랑만 자서 그게 좋아하는 감정이구나, 착각하는 거야.”

“하.”

개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우연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러고 있는 게, 씹……. 너랑 섹스해서 그런 거라고?”

문서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우연재에게는 저를 좋아할 틈이랄 게 없었다. 설사 좋아하는 감정이 맞다 해도 고작 나흘 사이에 바뀔 만큼 가벼운 마음일 테다.

그러니까, 그가 제게 품은 감정은 착각이었다.

“네가 그랬잖아. 성욕인데 착각하는 거라고.”

화를 삭이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새까만 동공이 뱀처럼 스르르 기어 와 저를 향했다.

“네가 지금 그런 착각 하는 거야.”

“문서윤.”

“나 열여섯 살 때부터 너 좋아했어.”

갑작스러운 고백에 우연재가 입꼬리를 달싹였다.

“그때 너랑 그 짓 하는 상상까지 한 건 아니야. 그러니까 성욕은 아니고, 그냥 순수하게 좋아한 거 맞아. 네가 섹스하자고 했을 때 그러자고 한 건…… 욕심나서 그랬어. 미안해.”

기분이 엉망이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우연재가 성욕을 마음으로 착각해서는 아니었다. 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든 것 같아 그게 미안했을 뿐이다. 기분이 엉망인 건 죄책감에서 파생된 죄악감일 테다.

문서윤은 조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잖아.”

“다행?”

우연재가 뺨을 찡그리며 입술을 비틀었다.

“짝사랑이니까 감정 정리하기 쉽겠지. 네가 나 때문에 이런 착각하는 꼴까지 봤으니까.”

언젠가 우연재가 했던 말이었다.

‘짝사랑이라 다행이네, 그치. 감정 정리하기 쉽잖아.’

같은 순간을 떠올렸는지 그가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서윤아. 그건 내가…….”

그 뒤에 이어진 말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서윤 역시 그 뒤로 이어진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 감정 묻어.’

그래야 할 시기가 온 것뿐이다.

“감정 묻을 테니까 나 때문에 마음까지 착각하지는 말아 주라.”

그는 우연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더 사람 비참하게 만드니까.”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