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야, 똥강아지. 너 핸드폰 아직도 꺼져 있더라?”
막 씻고 나왔을 때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불량한 자세로 누워 있던 남태은이 게으르게 허리를 세우며 알은체를 해 왔다. 침대 구석으로 손을 뻗은 그는 편의점 로고가 인쇄된 비닐봉지를 뒤적이더니 이내 병을 하나 꺼내 던졌다.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저를 향해 던져진 병을 받아 들었다. 까딱하면 놓칠 뻔했다.
“병인데 무턱대고 던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것도 못 받으면 큰일 난다.”
태평한 대답에 픽 웃으며 시선을 내리깔고 나서야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피로 해소제였다.
“웬 피로 해소제.”
“너 요즘 피곤해 보이길래. 잠도 못 자는 것 같던데.”
“아…….”
문서윤은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저 혹시 잘 때 이상한 소리 내고 그랬어요?”
“네가? 너 잠버릇 없잖아. 나 요즘 과제 하느라 새벽에 자니까 아는 거지. 시체처럼 자는 애가 웬일로 뒤척이던데.”
이상한 소리를 내뱉은 적이 없다면 다행이었다. 이렇게까지 마음이 어지러운 적이 없어 잠꼬대라도 했나 싶어 걱정하던 차였다. 아무래도 기숙사다 보니 민폐를 끼쳤을까 조심스러웠다.
“내 눈앞에서 마셔라. 지금. 당장.”
남태은이 다시 침대에 드러누우며 피로 해소제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마실 때까지 잔소리를 퍼부을 게 뻔해 그대로 손에 힘을 실어 병뚜껑을 돌리자 까드득, 소리가 났다.
“잘 마실게요.”
문서윤은 그 안에 든 액체를 천천히 삼켰다. 특유의 맛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약으로 나아질 피로는 아니어도 챙겨다 준 성의가 고마워 괜스레 콧잔등을 찌푸리게 됐다.
다 마신 병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침대에 걸터앉자 남태은이 또다시 질문을 건넸다.
“전화 왜 꺼져 있냐니까? 아까 편의점 들렀을 때 필요한 거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꺼져 있던데.”
“안 켜지는 거 보니까 고장 났나 봐요.”
문서윤은 그럴싸한 거짓말을 둘러댔다. 정말 고장 난 게 아니라 일부러 꺼 둔 참이었다. 내일이면 어느덧 토요일이었으니 이번 주 내내 꺼 둔 셈이었다.
“급한 연락 오면 어쩌려고? 빨리 고쳐.”
“안 그래도 내일 맡기고 오려고요.”
전화를 끈 건 혹시라도 우연재에게 연락이 올까 무서워서였다. 전화번호를 차단하면 깔끔하게 해결될 걱정이었으나 차라리 전원을 끄는 쪽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핸드폰이 켜져 있으면 그의 번호를 차단하더라도 습관처럼 들여다볼 게 뻔했다.
조별 과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노트북과 태블릿에 메신저가 깔려 있으니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없을 듯했다. 무엇보다 급하게 연락이 올 만큼 중요한 일도 없었다.
* * *
문서윤은 멀거니 제 다리를 들여다봤다. 하얀 붕대에 칭칭 감긴 다리를 보호대가 꽉 옥죄고 있었다.
왜 다쳤더라. 이 정도로 다쳤다면 기억이 나야 정상일 텐데,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은 없고 모든 게 온통 흐릿하기만 했다. 눈썹과 눈썹 사이가 잔뜩 찌푸려질 정도로 머리를 굴리고 나서야 계단에서 굴렀단 사실이 떠올랐다. 제 딴에는 손목에 무리가 안 가게 하겠답시고 무작정 넘어졌다가 도리어 다리를 심하게 다쳤던 것 같다.
피아노가 뭐라고.
실소하듯 웃으며 보호대를 한 발끝에 힘을 싣자 붕대 사이로 톡 튀어나온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렸다. 보호대에는 친구들이 남겨 둔 낙서와 우연재가 키득거리며 그린 그림이 담겨 있었다. 사실상 중구난방으로 쓰인 글자와 아무렇게나 덧대어진 그림들 때문에 보이지 않는 수준이기는 했다.
이거 풀자마자 생일 선물이라고 운동화 받았던 것 같은데.
“…….”
문서윤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순식간에 풍경이 뒤바뀌었다.
피아노가 나타났다. 문서윤은 직감적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멀거니 피아노를 쳐다보던 그는 천천히 움직여 텅 빈 공간 한가운데에 놓인 악기 앞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레 손을 대자 피아노 특유의 차가운 온도가 손끝으로 달라붙었다. 그 상태로 고개만 들어 주변을 살폈으나 여전히 고요함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문득 어떠한 충동이 밀려와 그는 피아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덮개를 열자 익숙한 건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가락이 확인이라도 하듯 저절로 움직여 건반을 눌렀다. 청명한 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문서윤은 습관처럼 건반을 눌렀다. 익숙한 곡조가 선율을 타고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콩쿠르를 준비하며 연습했던 곡 같은데, 정확한 제목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 그런 듯했다.
그리 길지 않은 곡이 끝나고 눈을 깜박인 순간 그는 피아노 앞이 아닌 창가에 서 있었다.
한여름 특유의 잔잔한 비 냄새가 코끝에 달라붙더니 약하게 빗방울이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햇빛에 문서윤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창밖으로 잔잔하게 내리는 여우비가 보였다. 언젠가 겪어 본 듯한, 익숙한 풍경이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손을 뻗어 부슬비에 가까운 빗방울을 건드리려는데 엉망인 곡조가 신경을 잡아챘다. 문서윤은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제법 신중한 얼굴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우연재가 보였다. 커다란 손과 기다란 손가락은 건반을 누르기에 적합한 신체 구조였으나 배운 적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는지 모든 게 엉망이었다.
연주 아닌 연주를 마친 우연재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살살 눈웃음을 치듯 웃었다.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까딱였다. 평소의 우연재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인데도 미묘하게 다른 감상이 들었다.
저 표정은 마치 누군가를…….
문서윤은 눈을 떴다. 익사 직전에 뭍으로 빠져나온 사람처럼 다급한 숨이 터져 나왔다.
“허억, 헉, 헉…….”
금방 잠에서 깨서인지 숨을 헐떡이는 상황에서도 꿈에서 본 우연재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
가만히 누운 채로 그 표정을 되새김질하던 문서윤은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쓸데없는 생각을 계속 이어 나갈 바에야 몸을 움직여서라도 잡념을 털어 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오늘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잠이 들었는지 커튼 사이로 햇빛이 비쳤다.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을 걷어 내고 곧장 욕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이상하게 핸드폰이 눈에 밟혔다.
“…….”
문서윤은 머뭇거리다 핸드폰을 켰다. 갑작스레 초조함이 몰려와 심장이 거세게 뜀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우연재에게서 연락이 왔을까 봐 초조한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오지 않았을까 봐 초조한 것 같기도 했다. 혹은 불현듯 스쳐 지나간 직감 때문이거나.
화면이 켜지고 몇 초간 기다리자 메시지창에 숫자들이 뜨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시선을 잡아채는 이름이 있었다. 연락이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인물이라 곧바로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눈동자가 한군데서 멎었다.
“아…….”
호흡이 막 잠에서 깼을 때처럼 절로 헐떡여졌다.
문서윤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정신부터 차려야 했다.
* * *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구체화되었다.
불면에 시달린 지도 어느덧 몇 주째라 꿈을 꿀 만큼 오랜 시간 잠드는 일은 드문데도 신기할 정도로 자세해졌으며 신기할 정도로 현실감이 더해졌다.
꿈의 중앙에는 항상 문서윤이 있었다.
‘그게 더 사람 비참하게 만드니까.’
우연재는 마침내 문서윤을 비참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불면에 더해져 찾아오는 악몽답게 하나뿐인 소꿉친구가 행복해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감금당한 사람이, 원하지도 않는데 함부로 범해지는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죽은 얼굴은 감정을 드러내지 못할 테다.
우습고도 끔찍한 사실은 꿈속의 제가 후회했다는 점이다.
진작 이랬어야 하는데.
“아, 씨발…….”
우연재는 욕설을 지껄이며 눈을 떴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또다시 지독한 악몽이 달라붙은 채였다.
“하.”
꿈속에서 마주한 얼굴이 떠올라 또다시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또다시 욕실로 들어가 찬물 아래에 섰다. 몇 번째인지 모를 샤워였다.
문서윤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으나 그마저도 담담한 목소리가 불시에 끼어들어 이성적인 사고를 이어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우연재.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냐. 착각하지 마.’
‘짝사랑이니까 감정 정리하기 쉽겠지.’
‘감정 묻을 테니까 나 때문에 마음까지 착각하지는 말아 주라.’
‘그게 더 사람 비참하게 만드니까.’
비참함을 고하는 문서윤은 차분하고 단정한 얼굴이었다. 목소리 역시 그와 걸맞게 조금도 격정적이지 않았다. 단조롭고 잔잔했을 뿐이다.
운 흔적이 남아 있는, 그러나 단단해진 얼굴을 마주한 순간 우연재는 차라리 계속 울리는 게 나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