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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25)화 (125/139)

125화

제 감정을 온전히 내비친 게 언제였냐는 듯 문서윤은 부드러운 가죽을 뒤집어쓴 채였다. 선을 넘는 걸 허용하지 않겠단 뜻이 담긴 조용한 얼굴에는 기어코 숨이 막혔다.

우연재는 낙관하고 있었다. 색채는 달라도 문서윤과 닮은 감정이라는 걸 알았으니 쉽게 해결될 문제라고 여겼건만, 문서윤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그나마 찬물을 맞고 있자니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우연재는 느릿하게 돌아가는 머리로 과거를 되새김질했다.

좋아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던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한계까지 몰아붙인 후 연애 운운한 게 문제였을까.

‘처음부터 들키지 말았어야 하는데.’

문서윤이 제 마음을 들켰다는 사실을 언제 눈치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마 어머니의 기일이었을 것이다.

그때 듣고 있었나. 김현승은 농담이라 치부하며 넘겼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문서윤이 제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던 진심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우리 서윤이 나 존나 좋아하는데.’

감출 새도 없이 튀어나온 자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감출 마음조차 없었다.

문서윤의 마음까지 가졌다는 사실이 못내 만족스러워 저와 문서윤을 보통의 친구 관계로 정의 내리는 이에게 욕심껏 과시하고 싶었다. 홀로 향유하기에는 지나치게 커다란 환희였다.

그 말을 문서윤이 들었다면, 섹스를 청한 것도 그래서였다면, 어린아이가 울듯이 펑펑 눈물을 흘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면 제게 종말을 고한 이유도 얼핏 알 것 같았다.

‘진짜 최악이다.’

저를 향해 최악이라 말하던, 우는 얼굴이 떠올랐다.

문서윤의 말처럼 최악이었다.

우연재에게 유일하게 견디기 힘든 순간이 있다면 그건 하나뿐인 소꿉친구가 눈물을 보일 때였다. 섹스가 아니라면 문서윤이 우는 모습을 본 것도 장례식이 마지막이었다. 제 손으로 울리기 전까지는.

평소였다면 원인을 제거해 해결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저 때문에 울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그것도 문서윤이 가장 우울해하는 날에.

“씨발…….”

평소와 달리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는 문서윤의 인생에서 제거당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물기에 젖은 손이 샤워기를 잠갔다. 공허할 정도로 텅 빈 눈동자를 덮고 있던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박거렸다.

머리 위로 쏟아지던 물은 그쳤으나 속눈썹에 고여 있던 물방울은 천천히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근래에는 미쳐 가는 기분이었다.

* * *

문서윤은 차를 몰았다. 정신을 차리자고 연신 되새김질한 덕분인지 울렁거리는 속과 달리 머리는 금세 차분해졌다. 이미 손쓸 수 없게 된 일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메시지는 바로 어제, 아주머니께서 보낸 것이었다.

[서윤 학생. 전화 안 받길래. 피아노 가져갔는데 알고 있어?]

아무래도 마음이 쓰여 연락을 주신 듯했다.

“그걸 어떻게 잊고 있었지.”

아버지께서 피아노를 치우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우연재와의 관계가 엉망이 된 바람에 그쪽으로는 신경을 쏟을 새가 없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물건보다는 당장 제게 맞닥뜨린 감정에 영향을 받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설마하니 이렇게 빨리 처분하시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언질을 주고 상의하는 척이라도 하실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짝사랑을 끊어 내고 싶은 마음에 급급해져 그렇게 낙관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쯤은 아버지를 믿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테고.

‘내가 멍청했지.’

1년의 대학 생활 이후 곧바로 입대했고 제대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집 밖에서 시간을 보냈으니 아버지와는 소원한 관계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단둘이 보낸 시간 자체가 적으니 엄밀히 말하면 어색한 부자지간이 된 건 더 오래전의 일일 것이다.

결혼도 통보하듯 말씀하신 분인데, 피아노에 대해 언질을 주리라 기대한 제가 멍청했다.

‘그래도…….’

얘기는 해 주실 수 있었잖아요. 문서윤은 핸들을 쥔 손에 너무 힘을 싣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다행히 차는 본가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집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나 우선 피아노의 부재부터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문서윤은 차를 세우자마자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 서윤 학생!”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메시지 이제야 확인해서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아냐. 그런데, 그…….”

“저 올라갈게요.”

그는 곧장 피아노 방을 향해 걸었다. 뒤에서 아휴, 이걸 어째, 하는 아주머니의 혼잣말이 들려왔으나 못 들은 척 발걸음만 옮겼다.

언뜻 커피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걸 보니 아버지께서 집에 계신 듯했다. 평소 같았으면 인사부터 드렸겠지만, 문서윤은 그냥 지나치기를 택했다.

망설임 없는 손길이 문을 열었다.

“…….”

피아노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공간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

안으로 들어선 문서윤은 실소를 내뱉으며 뺨을 쥐었다. 완전히 도려내진 공간이 널따랗게 펼쳐졌다. 워낙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물건이라 텅 빈 방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서윤아.”

얼마나 멍하니 서 있었을까, 뒤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서윤은 입술 안쪽을 깨물며 천천히 돌아섰다.

“오랜만에 집에 왔으면 아버지한테 인사부터 해야지. 어디서 배워 온 버르장머리니.”

“지금 그 소리가 나오세요?”

주말이라 집에 있었는지 아버지 뒤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의 여자가 서 있었다.

“버릴 거면 저한테 말씀해 주셨어야죠.”

“버리다니?”

“이게 버린 게 아니라고요?”

머리가 새빨갛게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격렬한 분노를 느껴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도저히 제어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치시곤 버린 게 아니라고요?”

제 손을 많이 타긴 했어도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그녀의 손을 거친 악기였고 또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시던 물건이니 유품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을 테다.

“저한테 상의도 없이요?”

“문서윤. 너 지금…… 하.”

문 교수는 뜬금없이 뺨을 맞은 사람처럼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들의 버릇없음에 슬슬 열이 오르는지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렇게 소중했으면 내가 처분하지 못하게 만들었어야지! 계속 쳤으면 처분할 일도 없었을 것 아니냐!”

“뭐라고요?”

“치지도 않는 피아노가 뭐 그렇게 소중하다고! 모르는 척 내팽개칠 때는 언제고!”

문서윤은 짤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제야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피아노를 포기하고 싶다 말했을 때 아버지께서 순순히 허락하신 건 저를 향한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착각인 줄도 모른 채. 한심한 자식을 보며 고개를 젓고 마는, 포기에 가까운 허락의 의미를 열여섯의 저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계속 쳤어야 한다니. 아직도 제가 피아노를 포기한 날을 마음에 담아 두고 계실 줄은 몰랐다. 무려 7년이나 지난 일을.

“그만해요.”

뒤에 서 있던 정 교수가 팔을 잡아챘다.

“그래, 미리 얘기 못 한 건 사과하마. 학회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학회. 아주머니께서 학회로 바쁘다는 말씀을 전해 주시던 순간이 떠올랐다. 문서윤은 헛숨을 내뱉었다. 언질 하나 주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바쁘신 분이 과연 어머니의 기일은 챙겼을지 의문이었다.

“왜…….”

말끝이 저절로 씹혔다. 저만 이 공간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와 함께 피아노를 치던, 혼자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던, 우연재에게 피아노를 쳐 주던 공간에 외로이 고여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젠 피아노조차 없으니 이 버거움을 홀로 견뎌 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주말 아침부터 이렇게 소란 피울 일은 아니지 않니.”

뒤이어진 말에는 머리가 팽팽 돌았다. 어지러움을 견디기 위해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할아버지한테는, 얘기하셨어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문서윤은 담담한 얼굴로 문 교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 얘기를 장인어른께 왜 해야…….”

“하긴, 못 하셨겠죠.”

멈춰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무서우셨을 테니까.”

“뭐?”

“그만하라니까요. 서윤아, 내가 대신 설명할게.”

난처한 기색의 사람은 정 교수와 소란에 달려온 아주머니뿐이었다.

“할아버지가 엄마 위해서 해 준 것들, 다 가져갈까 봐 무서우셨겠죠.”

“문서윤!”

“저 자취 못 하게 하신 것도 그래서잖아요. 할아버지가 졸업 전까지 잘 키우라고 하셨을 테니까.”

열여섯이었다. 어른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를 눈치껏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그 대가로 이렇게 사시는 거 아니에요?”

“보자 보자 하니까!”

문 교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만하라니까! 다 큰 아들한테 이렇게 굴 생각이에요?”

“서윤 학생도 이제 그만해. 응?”

여자 둘이 말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서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말씀 못 드리셨겠죠. 엄마 피아노 버리겠다고.”

“그만 안 할래?”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팔이 보였다.

“또 때리시게요?”

그 한마디에 아래로 내려오려던 손이 우뚝 멈췄다.

“하…….”

“때리세요.”

문서윤은 빈정거렸다.

“아픈 엄마 두고 바람피운 사람이 자식한테 손 못 댈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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