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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26)화 (126/139)

126화

그동안 눌러 삼키고 삼킨 문제를 입 밖으로 내뱉자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동시에 정 교수의 당황한 낯빛이 시야를 침범했다.

지나치게 감정에 매몰된 상태임을 모르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쏟아 내는 말 역시 감정적인 대응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언젠가는 이 순간을 후회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당장 머릿속을 지배한 감각은 전부 털어 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유일했다. 우연재에게 제 감정을 쏟아 낸 것처럼 혼자 썩히고 썩힌 마음을 완전히 토해 내 후련해지고 싶었다.

“너, 지금…….”

문 교수는 주춤거렸다.

“나가요.”

비틀거리는 팔을 정 교수가 낚아챘다.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짓던 그녀는 남자의 팔을 끌고 밖으로 나섰다.

“아이고, 이를 어쩐다.”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던 아주머니가 가까이 다가왔다.

“저 잠깐만 혼자 있을게요.”

어린애일 때처럼 달래 주려 하시는 게 눈에 보여 문서윤은 부드럽게 그녀를 밀어냈다. 한참 어린 아들을 보듯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던 여자는 이내 문을 닫으며 사라졌다.

마침내 문서윤은 텅 빈 피아노 방에 홀로 남게 되었다.

“하…….”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듯 비틀거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습관처럼 피아노를 짚기 위해 손을 허우적거리던 그는 간신히 다리에 힘을 실어 버텼다. 이제 그를 지지해 줄 존재는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울컥하던 감정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오히려 마음이 텅 비어 시원한 것만 같았다. 아버지에게 한 방 먹였다는 통쾌함보다는, 기대에 썩어 버린 마음이 흔적조차 남지 않아서일 테다.

그렇게 한참을 숨을 고르던 문서윤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몇 주 전 들렀을 때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 시야에 담겼다. 도려낸 피아노만 제외한다면 변함없는 공간이었다.

‘그래도 찾긴 찾아야겠지.’

고가의 물건이니 쓰레기처럼 버렸을 리는 없고, 높은 확률로 업체를 통해 처분하신 게 아닐까 싶었다. 우선 아주머니께 여쭤보고 정 안 되면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생각이었다.

“아…….”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가뜩이나 컨디션이 바닥을 기는 상태에서 내 본 적도 없던 화를 냈더니 몸의 에너지란 에너지가 모조리 소모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어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기어코 제게 무너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건 피아노를 해결한 후의 일일 것이다.

“일단 아주머니께 여쭤보고…….”

잠시간 현기증을 견뎌 낸 그는 천천히 방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문을 열자 물컵을 들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괜히 저 때문에 주말 오전부터 불편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못 볼 꼴 보여 드려서.”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괜찮아. 자, 물부터 마셔.”

문서윤은 그녀가 건넨 물을 천천히 마셨다. 등을 쓰다듬는 손길은 미지근하게 맞춰진 물의 온도만큼이나 따뜻했다.

“죄송한데…… 혹시, 피아노 어떻게 처분했는지 아세요?”

문서윤은 잔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컵을 가져간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물어볼 것 같아서 어제 가지러 온 기사한테 넌지시 물어봤어. 오늘 연락 왔더라고.”

기대하지 않았으나 기대한 답이 나오자 절로 마음이 놓였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고 있었는지 그제야 긴 호흡이 흘러나왔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 서윤 학생한테 말해 주려고 알아 둔 건데.”

사람을 진정시키듯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연락처만 알려 주시면 제가 연락드릴게요.”

“서윤 학생도 잘 아는 사람이던데? 나도 깜짝 놀랐어.”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문서윤은 멍청히 눈을 깜박였다. 제 주변에는 피아노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없었다.

문서윤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얼굴을 마주 보기에는 어색한 사이가 됐다는 걸 알고 있으나, 찾아오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도어록을 해제하는 대신 가만히 기다리기를 택했다. 호출 벨을 눌렀으니 저인 걸 확인했을 테고, 만날 마음이 있다면 문을 열어 줄 것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굳건하게 닫혀 있던 문이 고요하게 열렸다.

문서윤은 문 너머에 선 사람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울컥거리듯 외쳤다.

“왜 그랬어?”

마침내 저를 향해 스르르 내리깔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왜…….”

우연재를 보자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 줘?”

우연재에게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가끔은 싫어한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딱히 간섭한 적이 없지만, 그 전까지는 종종 피아노 치는 걸 방해할 때도 있었다. 학교 음악 시간에 다른 친구들에게 쳐 주고 있으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을 누르며 장난을 치거나 레슨이 있는 날 놀자고 꼬드기는 식이었다.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아쉽다고 말하지 않은 사람도 우연재가 유일했다. 왜 그만두기로 결정했는지 알고 있으니 쓸데없는 말을 얹지 않은 것일 테지만 가끔은 정말 그만두기를 바랐나, 하는 의문이 들고는 했다. 특별한 말이나 행동 때문은 아니었다. 미묘한 분위기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아버지가 처분하려 한 피아노를 도대체 왜 가져갔을까.

“서윤아.”

우연재는 대답 대신 이름을 불렀다.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문서윤은 그제야 우연재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가느스름하게 벼려진 눈동자는 저를 향해 고정된 채였다.

“너야?”

우연재는 가볍게 물었다. 며칠째 자지 않고 버텼더니 머리가 현실감 없이 몽롱했다. 문서윤이라 문을 열었으니 지금 그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거겠지만, 진짜 문서윤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왜 울지.

“왜 울어?”

뺨 바로 앞까지 다가간 손이 그 피부를 건들기 직전 멈칫했다. 또 쳐 내겠지. 우연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으나 모든 감각은 여전히 불분명하기만 했다. 눈 뜨면 없으려나.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울고 있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안 갔네.

“나 때문에?”

우연재는 확인하듯이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너 때문이 아니면?”

“아…….”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였다.

우연재는 나지막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문서윤이 제 앞에서 우는 걸 보면 역시나 현실이 아닌 꿈인 모양이었다.

“왜 그랬냐고.”

“응, 뭐가.”

“피아노. 왜 챙겼어?”

“아, 피아노…….”

이건 새로운 레퍼토린데.

문서윤의 피아노를 가져오긴 했다. 오피스텔이 아닌 본가에 있으니 가져왔다고 하기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어쨌든 처분하기 위해 나온 물건을 이쪽에서 낚아챘으니 영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언제 연락이 왔는지는 기억이 불분명했다. 어제였던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아침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지금이 오늘이긴 한가. 아침이 오긴 왔나?

“그냥.”

어쨌든 중요한 건 문서윤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실이든, 꿈이든.

우연재는 문가에 머리를 기대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너한텐 의미 있는 물건이니까.”

문 교수가 피아노를 처분하리라 예상한 건 아니었다. 다만 피아노에 새겨진 고유 번호를 알고 있었고 만약 그 피아노가 나오면 언제든지 이쪽에서 가져올 수 있도록 연락을 취해 뒀을 뿐이다. 고가의 악기를 취급하는 곳은 많지 않으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갑작스레 연락이 왔을 때 놀라긴 했지만.

“너는…… 원래 이래?”

눈물 닦아 주고 싶은데. 우연재는 뺨을 건드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팔을 떨어트렸다. 또 저 때문에 울었다고 하니, 건드리면 가 버릴지도 몰랐다. 평소 같았다면 망설임 없이 붙잡았겠지만, 이 정신머리로 쫓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내리 자지 않은 채 툭하면 찬물 아래로 가 섰으니 체력이 말이 아니었다.

뭐, 꿈이라 상관없으려나.

“모르는 척하네, 우리 서윤이가.”

대신 그는 가늘게 웃었다.

“너한테만 이런다는 거 진짜 모를 리가 없는데.”

“……들어가서 얘기해.”

문서윤이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턱짓했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곤란함이 몰려와 우연재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여기부터는 조금 달라지는 듯하던 레퍼토리가 원래대로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뭘까, 감금? 아니면 강간?

어쨌거나 문서윤을 제 공간에 들이고 싶은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악몽은 비참해진 문서윤을 보거나 혹은 숨이 빠져나간 시체를 보고서야 끝이 날 테다.

우연재는 미동조차 없이 문서윤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우는 모습을 마주하고 있어서일까, 늪에 잠기듯 점차 가슴이 옥죄이더니 이내 숨이 막혔다. 그러나 이 순간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문서윤을 조금이나마 오래 보고 싶었다. 마침내 머리끝까지 잠겨 끝끝내 익사당하더라도.

“들어오지 마.”

들어오려는 문서윤의 움직임에 우연재는 도리어 문을 막아섰다. 지금 제 공간에 들이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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