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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30)화 (130/139)

130화

모든 사람이 저 같지는 않을 테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한데 묶여 있어도 동일한 색채를 갖기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감정이었다. 감히 한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있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러니 저도 모르는 사이 제 마음을 투명하게 내보였다 해서 우연재에게 같은 색채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서윤은 늘 관계의 퇴색이 두려웠다. 우정 역시 사랑처럼 변색될 수 있는 관계지만, 그래도 연인보다는 친구라는 관계가 회생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고 나서야 생각이 다른 갈래로 뻗어 나갔다.

제 마음이 우연재에게 투명하게 비쳤다면, 우연재가 어떤 감정의 색채를 띠고 있건 그 감정들이 뒤섞인 후에도 그 색깔이 퇴색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빗방울이 어디로 떨어지든 그 고유한 빛을 해치지 않는 것처럼 결국은 우연재가 가진 빛에 융화되고 동화되지 않을까.

우연재는 제게 있어서 늘 햇빛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다른 색을 퇴색시킬지언정 그 스스로가 퇴색되는 일은 없을 테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저도 모르게 웃는 소리가 흩어졌다. 그냥, 우연재의 낯선 표정을 보는 게 즐거웠다.

문서윤은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더욱더 가느다랗게 접히는 눈동자를 마주 보며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길게 움직인 팔이 상대의 목에 걸쳐지기도 전에 입술과 입술이 맞붙었다. 닫힌 잇새를 밀고 들어온 혀가 긴장으로 딱딱하게 경직된 살덩어리를 꾹 누르더니 어설프게 빨아들였다. 원래 키스는 이런 건가? 혀를 섞는 행위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져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멋쩍음이 싫지는 않았다. 어정쩡하게 목으로 향하던 손이 마침내 우연재의 뒷머리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우연재가 고개를 비틀더니 입천장을 핥고는 재차 혀를 움직여 움찔거리는 살덩어리를 쪽쪽 빨아들였다.

언제 어색함을 느꼈냐는 듯 섹스와는 전혀 다른 섞임에 온몸으로 열이 올랐다.

문서윤은 그제야 제 뺨으로 오르는 열이 짝사랑의 종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읏.”

입술과 입술이 뭉개지며 간혹 서로의 이가 부딪쳤지만, 그래도 좋았다.

서툰 첫 키스도, 달뜬 호흡도, 눈가를 간지럽히는 햇빛도 전부.

“흐읏.”

언제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할지 몰라 호흡이 점차 가빠지기 시작했다. 작게 헐떡이자 우연재가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뺨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여 입술에 묻은 타액을 닦아 냈다.

“나 서툴러?”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어?”

“굳어 있길래. 서툴러서 그런가 해서.”

문서윤은 눈만 깜박였다.

“……너 키스 처음 해?”

우연재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비죽이 웃었다.

“침 섞이는 거 딱 질색인데 내가 너 아니면 누구랑 이 짓을 해.”

“아…….”

서투니 뭐니 하는 소리에 설마 싶었으나 정말로 키스까지 처음일 줄은 몰랐다.

“빨리 배우니까 서툴러도 봐줘.”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연재가 샐쭉 웃으며 눈꼬리를 접었다. 이 기회에 그의 오해를 바로잡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저 역시 처음이라 고백하려는 순간이었다.

“이번엔 잘할게.”

또다시 고개를 숙인 우연재가 입술을 약하게 깨물며 속살거렸다. 문서윤은 저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눈동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벌렸다. 곧 서로의 서툰 호흡이 뒤섞였다.

맞닿은 입술을 통해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가 전해졌다. 어쩐지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어 문서윤은 우연재를 따라 웃었다.

가을의 햇빛이 또다시 눈가 위로 쏟아졌다.

* * *

우연재는 시계를 채우며 짧게 거울을 살폈다. 주말 내내 문서윤을 붙들고 잔 덕분에 그럭저럭 피로가 가신 얼굴이었다. 아무리 매일같이 본다지만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여 나쁠 건 없었다.

예쁘게 보여야 하는 상대를 떠올리자 자연스레 기숙사로 사라지던 뒷모습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불쾌한 기억에 우연재는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오피스텔에서 지내자고 붙잡고 싶었으나 잘못한 게 있으니 당분간은 숨을 죽여야 했다.

‘일단 이번 학기만 버티고……. 내년부터 같이 살면 되니까.’

룸메이트를 섹파냐고 몰아붙인 죄가 있어 지금으로선 물러나는 게 최선이었다.

얌전히 지내야지.

문서윤의 마음이 워낙 무른 덕분에 간신히 잡아챈 기회였다. 어떻게 주어진 기회인데, 연애 초반부터 허무하게 날려 먹는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몇 달간은 얌전하게 고분고분 굴어야 문서윤 역시 마음을 놓을 것이다. 그렇게 2학기가 끝난 후 살살 구슬리면 내년부터는 같이 사는 데에 무리가 없을 테다.

‘피아노 핑계도 있고.’

본가의 제 거실에 자리 잡게 된 물건이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단순 대비책으로 손을 써 둔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피아노가 아니었다면 문서윤이 제 발로 오피스텔에 찾아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당분간 본가에 둘까.’

졸업 후 독립할 즈음에 함께 사는 공간으로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장소는 한국이 아닌 미국이 되겠지만.

함께 가겠다는 확답을 받아 내지 못한 게 문제였으나 다행히 시간이 남아 있으니 어떻게든 꼬여 내 데려갈 계획이었다.

“문 교수랑 틀어져서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

주말 동안 우연재는 문서윤과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아노 덕분에 얼굴을 마주 보게 됐으니, 대화에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문서윤은 아버지에게 불륜 운운한 게 약간 후회된다고 했지만, 우연재는 오히려 잘했다는 말과 함께 그의 뺨에 입술을 내렸다.

그 일을 계기로 문서윤이 아버지와 더욱더 서먹해지리란 계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서윤은 마음에 감춰 둔 곪은 상처들을 터뜨릴 필요가 있었다.

‘나도 원인 제공 꽤 했을 것 같은데.’

그걸 핑계로 평생 들러붙을 계획이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거실로 나선 우연재는 창밖을 확인했다. 올가을은 비가 많이 내리려는지, 또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나기는 아니었다.

비 맞는 거 딱 질색인데. 우산을 챙기려던 그는 무언가를 고민하듯 잠시 멈춰 서더니 그대로 문밖을 나섰다.

지금쯤 문서윤이 도착했을 테니 놓고 가는 편이 나을 듯했다. 성인 남자 둘이 비좁은 우산을 나눠 쓰면 어깨가 젖을 게 뻔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비가 주는 불쾌함보다 문서윤과 붙어 있는 시간이 배는 만족스러웠다.

오피스텔을 나서자 곧은 자세로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때에 맞지 않는 여우비에 우산을 쓴 채였다.

익숙한 인영을 발견한 것과 동시에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부슬부슬한 빗방울이 머리카락 위로 달라붙었으나 우연재는 거리낌 없이 움직였다.

기척도 없이 다가간 그는 무작정 하얀 뺨을 쥐었다. 유순한 눈매가 둥그렇게 변했다. 갑작스러운 등장과 예기치 못한 스킨십에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비 맞고 왔어?”

나인 거 알았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이 전신을 덮쳐 왔다.

문서윤에게 피아노를 쳐 준 날 느낀 환희와는, 제게 피아노를 쳐 주는 문서윤을 보며 느낀 광적인 열락과는 비교조차 수 없는 완전한 만족감이었다.

왜 이제야 알았지.

우연재는 뺨을 쥔 손에 힘을 실어 문서윤의 고개를 살짝 젖히게 만든 뒤 그대로 입술을 내렸다.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듯 가벼운 뽀뽀였다.

“뭐야.”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랐는지 문서윤이 우산을 씌워 주다 말고 눈을 접어 웃었다. 눈꼬리가 야트막하게 접히며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술 위로 열꽃이 피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미미한 웃음소리와 함께 얕은 호흡이 새어 나왔다.

“왜.”

우연재는 부러 서운한 척 눈썹 끝을 떨어트렸다.

“애인인데 뽀뽀하지 마?”

뻔뻔하기 그지없는 물음에 문서윤은 당황했다. 우연재가 뻔뻔하게 구는 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애인 운운하는 말은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17년간 알아 온 소꿉친구가 불과 며칠 사이에 애인이 된 상황이라 멋쩍음을 느끼는 저와 달리 우연재는 애인이라는 호칭어가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게 아니라……. 밖이잖아.”

“우산 있잖아.”

“뭔 헛소리야. 투명한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콧잔등을 찌푸리자 우연재가 키득거렸다.

“알았어. 조심할게.”

문서윤은 우산을 쥔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우연재가 커다란 덩치를 구겨 왔다. 비가 오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왜 우산을 챙겨 오지 않았는지 도통 모르겠다.

비 맞는 거 싫어하지 않나. 그래도 여우비라 곧 그칠 듯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투명한 우산 너머에 고인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그 햇빛이 물방울 위로 천천히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맞댄 팔에서 우연재의 체온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이쪽을 볼 줄 몰랐다는 듯 우연재가 가느스름하게 눈가를 접더니 이내 눈꼬리를 포개 살살 눈웃음을 쳐 댔다. 그 모습에 문서윤은 픽 웃고 말았다.

물방울 위로 번진 햇빛이 어느새 마음으로까지 스며든 기분이었다.

그는 다시금 빗길을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은 우산을 때리는 빗방울과 달리 불투명하기만 할 테다.

문서윤은 제 인생에 일어난 변화가 우연재와의 관계뿐만이 아님을 모르지 않았다. 이제 그의 부모님을 만나면 죄송한 마음이 들 테고, 아버지와의 껄끄러운 관계는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어 때때로 그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 터였다.

그러나 불안과 걱정보다는 마음으로 스며든 햇빛이, 제 허리에 슬쩍 감겨드는 체온이 훨씬 강렬했다. 이상하게도 우연재와의 관계에는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연인이 된 이상 이전과는 많은 게 달라질 테고 또 이 새로운 관계에 적응하느라 한동안은 마음이 소란스럽겠지만, 그 역시 잠깐 지나가는 여우비일 테다.

아무리 오래 서 있어도 온몸을 푹 적시지는 못할,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짧게나마 숨통을 틔워 줄, 오래지 않아 사라져 결국은 햇빛의 존재를 흐무러지도록 빛나게 할, 그런 여우비.

그러니 다른 문제들이 마음을 술렁이게 해도 괜찮았다. 언젠가 지나갈 테니.

“우연재.”

문서윤은 우연재를 불렀다. 앞이 아닌 저를 보며 걷고 있었는지 고개를 돌리자마자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세운 그가 이내 샐쭉 웃으며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응, 자기야.”

낯간지러운 호칭어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문서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졌다는 듯 웃고 말았다.

가뜩이나 좁은 우산 안에서 우연재가 몸을 치대 오자 손잡이를 쥔 손이 살짝 흔들렸다. 햇빛이 녹아든 물방울이 뺨으로 튀어 올랐으나 그 자그마한 흔적에 신경을 쏟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뿐이었다.

문서윤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우연재가 옆에 있었으므로.

<햇빛 샤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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