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월
1화
“문서윤.”
차에서 내려서려던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쑥 앞까지 다가온 기척에 놀랄 틈도 없이 뺨이 붙잡히더니 입술과 입술이 짧게 맞붙었다. 깜짝 놀라 밀어내자 우연재가 순순히 물러서며 키득거렸다. 어린애도 아니고, 걸핏하면 뽀뽀를 하는 통에 곤란했다.
“네가 애야?”
간질간질한 스킨십이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다 큰 성인들이 어린아이들이나 할 법한 말랑말랑한 스킨십을 하는데 마음이 간지러우면 간지러웠지, 싫을 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문서윤은 이런 자잘한 스킨십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괜히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처럼 옅게 웃고 마는 대신 우연재를 밀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뭐가.”
“왜 자꾸 뽀뽀해?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여기 너희 본가잖아. 미쳤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하겠다는데 왜.”
우연재가 특유의 뻔뻔한 표정으로 샐쭉 웃으며 운전석을 열더니 먼저 내려섰다. 문서윤은 저 고집을 누가 꺾겠냐는 듯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그를 따라 발을 내디뎠다. 혹시라도 그새 뺨이 달아올랐을까 봐 걱정이 몰려왔다. 곧 어른들을 봬야 하는데 어디 아프냐는 말을 들으면 표정 관리를 제대로 못 할 것 같았다.
우연재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집에서는 헛짓거리하지 말라는 의미로 눈썹을 찌푸리자 우연재가 어깨를 으쓱였다. 비스듬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아하니 말을 제대로 들어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부모님 앞에서까지 조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습관만큼 무서운 것도 없으니 미리 주의를 주는 게 나았다. 걸핏하면 치대 오는 우연재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익숙해질까 봐 무서울 정돈데 행위의 주체자는 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테다.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조심해야지.’
어쩌면 남들 눈에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도 자잘한 스킨십은 서슴없이 해 오는 편이었으니까. 게다가 우연재의 부모님은 저를 여섯 살부터 봐 왔으니 우연재의 치댐에도 별다른 이상은 감지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문서윤 제가 그 차이점을 안다는 게 문제였다. 당장 허리를 끌어당기는 손길부터가 예전과는 명백히 다른 의도를 띠고 있었다.
계속 생각하다간 뺨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아 문서윤은 우연재가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빼앗았다.
“집 온 김에 결혼 인사할래?”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우연재의 본가에 온 건 피아노 때문이었다. 피아노를 가져온 건 우연재였어도 공간을 내준 건 그의 부모님이니 감사 인사를 하는 게 맞았다. 진작 전화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는 게 예의가 아닌가 싶었다.
지난 몇 년을 제외하고는 매일같이 드나들던 친구-엄밀히 말해 이제 애인이지만-의 집을 방문하며 새삼스레 과일 바구니를 들고 온 것도 그래서였다. 성의 표시로 좋을 것 같아 골랐는데, 우연재의 말을 듣고 보니 너무 그런 쪽 선물인가 싶어 멋쩍어졌다.
나 혼자 괜히 찔리는 거겠지. 문서윤은 바구니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뭘 이런 걸 사 왔느냐고 하실 것 같았지만, 그래도 성의를 표시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생각보다 감사 인사 드리는 거 늦어지기도 했고.’
워낙 바쁘신 분들이라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 중간고사가 끝난 데다 두 분 다 집에 계신다고 해 찾아온 참이었다. 그래 봤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몇 시간이 전부일 테다.
과연 뻔뻔한 얼굴로 두 분을 뵐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왔다.
“또 허튼 생각 하고 있지.”
문 앞에 멈춰 선 우연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물었다.
“허튼 생각 안 했어. 들어가, 빨리.”
들켰다 싶어 순간적으로 마음이 뜨끔거렸으나 문서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우연재의 등을 떠밀었다. 그 행동이 오히려 더 수상했는지 우연재가 삐딱하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미묘한 표정을 짓던 그는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인지 말을 더 얹는 대신 문을 열었다.
“저 왔어요.”
“왔니? 서윤이는?”
“오랜만에 뵙네요, 이모.”
문서윤은 우연재의 어머니인 서연희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죄송해서 어떻게 얼굴 뵙지, 생각한 게 무색하게도 다정한 반김에 웃음이 나왔다.
식사 자리는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번보다 마음이 편한 것 같기도 했다. 그때처럼 우연재 눈치 안 봐도 돼서 그런가. 짝사랑을 들킬까 봐 노심초사할 일도, 우연재가 농담으로 내뱉은 말에 지레 찔려 과민 반응할 일도 없어져서 그런 모양이었다.
가족처럼 대해 주시는 두 분께 죄송한 것과는 별개로, 어색한 자리는 아니었다.
“참, 서윤아. 이모가 뭐 좀 물어봐도 될까?”
“네, 말씀하세요.”
과일을 먹던 문서윤은 포크를 내려 두며 서연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아노 관리 때문에. 괜찮으면 위에 가서 얘기해도 되니? 아들. 방에 들어가도 되지?”
“그러세요.”
우연재는 선선히 대답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제 어머니와 사라지는 문서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2층으로 올라가면 한참 뒤에야 내려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어머니와 문서윤의 어머니 사이에 제법 많은 추억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대화 주제가 피아노에서 문서윤의 어머니로 흘러갈 게 빤히 보였다. 어련히 좋은 기억만 되뇌어 주시겠지, 싶어 우연재는 굳이 그 뒤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듣자 하니 학교 수업 빠졌다면서.”
계단에 고정된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우연재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아, 이래서 아버지랑 아는 분 계시는 곳은 싫다니까요.”
“오죽 신기했으면 나한테 연락을 다 했을까. 무슨 일 있었냐?”
우 회장이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남자의 얼굴에서 화난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팠어요.”
우연재는 가볍게 대답했다.
“네가?”
“진짠데.”
미심쩍은 기색의 아버지를 향해 능글맞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나저나 드릴 말씀이 있는데.”
“뭐.”
우 회장은 커피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여상하게 물었다. 성인 아들의 대학 생활에 간섭할 생각도 없거니와 알아서 잘하겠거니 생각 중이라 드릴 말씀이 있다는 소리에도 조바심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갑자기 집에 피아노가 들어왔을 때도 또 무슨 희한한 짓을 하는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저 서윤이랑 사귀어요.”
“큽! 콜록, 콜록!”
별말 안 나오겠거니 생각하던 우 회장은 거칠게 기침을 내뱉었다. 순식간에 목뒤가 빳빳해지며 얼굴로 열이 올랐다. 그 장면을 심드렁하게 지켜보던 우연재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버지를 향해 휴지를 건넸다.
“채신머리없으시네요.”
가벼운 농담까지 덧붙이면서.
아버지에게 동성의 소꿉친구와 사귄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은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댔다. 휴지로 얼룩진 옷을 닦아 내던 우 회장만이 커피 잔을 내려 두며 숨을 골랐다.
“이런, 미친놈이.”
우연재는 어쩌겠냐는 듯 어깨만 으쓱였다.
“……강제는 아니지?”
“뭐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다친 걸 빌미 삼아 붙잡았으니 완전히 아니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똑바로 말 안 할래? 설마 협박했다든가……. 애한테 무슨 짓 했냐?”
“아들을 뭐로 보시는 거예요?”
우연재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픽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문서윤과 사귄다는 사실에 놀라시는 것보다 혹시라도 애를 좋지 않은 방법으로 건드렸을까 봐 걱정하시는 눈치였다.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를 향한 아들의 비정상적인 집착을 눈치챈 분이시니 저런 걱정부터 하시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합의한 관계인 거, 맞아?”
“맞다니까.”
우연재는 발끝을 까딱였다.
“좋으시겠어요, 평생 아들 목줄 잡아 줄 테니까.”
“네가 서윤이한테 잘해야 평생 가는 거지.”
우 회장은 거세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을 꾹 압박했다. 아들이 동성의 소꿉친구와 사귄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부모인지라 안심하는 마음이 훨씬 컸다.
그와 그의 아내 서연희는 하나뿐인 아들의 이상 증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들이었다. 주치의에게 소견을 받은 날 심장이 쿵 떨어지던 감각은 앞으로도 느끼지 못할 테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통보에도 무슨 헛소리를 하냐며 길길이 날뛰는 대신 나름대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경험 때문이었다.
부부는 아들을 정상적으로 키워 내기 위해 노력했다. 둘째를 낳지 않은 것 역시 둘째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미 태어난 아들에게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바쁜 와중에도 늘 관심 있게 지켜봐 왔으니 소꿉친구를 향한 기이한 집착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결국은…….’
아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부부에게는 친아들을 정상적으로 자라게 해 줄 존재가 필요했다. 피아노를 친다는 아이를 예중이 아닌 일반 중학교에 진학시키게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쨌든 제 아들이 소꿉친구 옆에서 학창 시절만 제대로 보내면 성인이 되어서도 인간 구실을 하고 살아갈 테니까.
7년 전 아들이 갑작스레 미국 유학을 미루겠다 선언했을 때 큰 잡음 없이 허락한 것도 문서윤이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어렴풋이 직감했을지도 모르겠다.
‘꾸준히 여자 친구 사귀는 것 같더라니.’
돌고 돌아 이렇게 된 모양이었다.
우 회장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가 갑자기 사라져 눈이 돈 아들이 수습 불가능한 사고를 치는 꼴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이런 관계가 낫긴 했다. 말 그대로 평생 목줄을 잡아 줄 테니까. 그는 무언가를 향한 제 자식의 집착과 인내심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서윤이한테는 내색하지 마세요.”
“뭘 말이냐.”
“사귄다고 말씀드린 거요.”
“허어. 합의도 없이 말했어?”
“어떻게 합의해요. 지금도 아버지랑 어머니한테 죄송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우연재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제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어도 부모님께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외동아들을 동성애자로 만들었다, 뭐 이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눈치였다.
하여튼, 순진하다니까. 제 부모님이 얼마나 손익 판단이 빠른 사람들인지 몰라서 하는 생각이었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면 또 모를까, 질색하며 반대하실 리가 없었다. 문서윤을 평생 제 곁에 묶어 둠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을 모르실 분들이 아니었다.
‘말씀드리자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할 게 뻔하고……. 뭐, 천천히 해야지.’
평소보다 긴장한 얼굴이 귀엽기는 했다.
아버지를 향해 폭탄 발언을 내던진 우연재는 느지막이 몸을 일으켰다. 피아노 앞에 선 문서윤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