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알았어. 대신 아무거나 친다.”
말은 알았다고 했으나 떠오르는 곡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뭐 쳐야 하지, 문서윤은 고민 끝에 건반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깊게 생각할 여력은 없어도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제목이 있었다.
너무 우울하고 쓸쓸한 느낌인가 싶었으나 한 번 곡을 정하고 나자 다른 곡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가볍게 치는 거니까 괜찮겠지, 문서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흰건반과 검은건반을 동시에 눌렀다.
차이콥스키의 사계 중 10월에 해당하는 가을의 노래라는 곡이었다. 가을 특유의 스러지는 느낌을 주는 만큼 그다지 빠르지 않은 데다 건반을 넓게 쓰는 곡이 아니라 치기가 편했다. 우연재가 오른쪽에 앉아 있어 팔을 마음대로 뻗을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욱 적합한 곡이었다.
선율은 천천히 이어졌다.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으며 건반을 누르던 그는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사람이 옆에 앉아 있어 피아노를 치기가 불편했다. 레슨을 받을 때처럼 따로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끌어안기듯 붙어 앉은 자세라 팔꿈치가 자연스레 우연재의 가슴팍에 닿았다.
한번 신경이 거슬리기 시작하자 맞닿은 체온이 지나치게 의식됐다. 등 뒤쪽으로 비스듬히 겹쳐진 몸은 물론이고 허리에 얽힌 팔, 그리고 숨결까지, 우연재의 존재가 거대하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빠른 곡이었으면 진작 실수했겠다.’
문서윤은 곡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엄밀히 말하면 관성이었다. 어릴 때부터 집중하도록 배워 왔고, 피아노를 그만둔 이후에는 도피처로 이용했으니 건반을 누르는 순간만큼은 곡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간신히 이어붙인 집중이 완전히 어그러진 건 마지막 건반을 누르기 직전이었다. 길게 이어져야 할 선율이 중간에 뚝 하고 끊겼다. 문서윤은 곡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방금까지 건반을 누르던 손으로 제 목덜미를 감싸며 눈을 깜박였다.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자 우연재가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뭐가 뭐야. 뽀뽀 몰라?”
“집에서 하지 말라니까?”
피아노를 쳐 달래서 쳐 줬더니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왜.”
우연재가 몸을 구기며 어깨에 턱을 걸쳤다. 자세가 불편할 텐데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집이라고 못 할 것도 없는데.”
살랑거리는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순간 기척이 느껴졌다. 문서윤은 화들짝 놀라 우연재를 밀어내다시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부러 힘을 빼 제게 안겨 있던 몸을 놓아준 우연재는 후다닥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응시했다.
내가 이렇게 구는 거 도대체 언제쯤 익숙해하려는지 모르겠네.
“과일 먹어. 생각해 보니까 후식 먹다 위로 올라왔더라고.”
“아, 감사해요, 이모. 잘 먹을게요.”
“그리고 피아노 너무 좋더라. 잘 들었어. 다음에도 놀러 오면 쳐 줄 거지?”
“그럼요.”
우연재는 제 어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문서윤을 바라보다 피아노를 향해 시선을 떨어트렸다. 긴 눈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설핏 찌푸려졌다.
문서윤은 과일을 먹다 말고 우연재를 쳐다봤다.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단정하게 뻗은 눈썹이 비뚤게 올라갔다. 왜, 하고 묻는 얼굴이었다.
“피아노. 나중에 어디 두지 싶어서. 계속 여기 둘 수는 없잖아. 왜 이제까지 생각 못 했지?”
피아노가 사라진 날부터 오늘까지 하루하루가 너무 정신없이 지나가는 바람에 미처 잊고 있던 문제였다. 우연재와의 새로운 관계에 적응하기도 전에 연이어 시험 기간이 들이닥치기도 했고.
문서윤은 그제야 새로이 떠오른 문제에 골몰했다. 염치없이 계속 우연재의 집에 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본가로 가져갈 수도 없고, 할아버지께 연락을 드리자니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어른들 싸움에 휘말리기는 싫으니까…….’
그날을 마지막으로 문서윤은 본가에 들르지도, 아버지께 연락을 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머니께 피아노를 찾았다고 감사 전화를 드렸을 뿐이다.
고작 한 달 남짓 지난 데다 평소 아버지와의 연락 주기를 생각하면 그리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지낼 거라는 점이었다.
바람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으니 아버지께서 먼저 연락하기는 쉽지 않으실 테다. 그렇다고 먼저 연락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부자지간의 연을 뚝 잘라 낼 수는 없어도 예전처럼 그럴싸한 가족 흉내를 내는 건 이제 힘들지 않을까,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뭘 어디 둬.”
우연재의 목소리가 상념을 일깨웠다. 어려울 것 없다는 말투였다.
“우리 집에 뒀다가 나중에 같이 살 집으로 옮기면 되지.”
“……같이 살 집?”
무슨 같이 살 집? 단번에 이해가 가지 않아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뜨자 우연재가 눈꼬리를 찡그렸다. 눈매 아래가 야트막하게 솟아나듯 달싹거렸다.
“나랑 같이 안 살게?”
“……갑자기?”
“지금도 평일에 존나 쓸쓸한데. 문서윤 옆에 없어서.”
우연재와 사귄 후에도 문서윤은 꼬박꼬박 기숙사에 들어가고 있었다. 같이 있는 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기숙사라는 공간이 있는데 애인 집에 머무르는 것도 그림이 조금 이상했다.
어쩌면 은연중에 기숙사라는 공간을 저와 우연재 사이의 안전선이라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엔 내가 양보했잖아. 내년엔 네가 양보해.”
양보라는 단어에 문득 언젠가가 떠올랐다. 앞으로도 몇 번이나 우연재를 양보하는 날이 오겠지, 우울에 잠기던 날이었다.
괜히 의미가 없어진 과거를 더듬는데 우연재가 어깨에 머리를 기대 왔다. 무의식적으로 눈꺼풀을 내리깔자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얼굴이 보였다. 그 뒤로 뻔뻔하게 웃는 표정이 이어졌다.
“내년에 같이 살자는 말이야?”
“내가 있는데 다른 새끼랑 살게? 이제 교수님 눈치 볼 필요도 없잖아?”
본가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취를 하자니 할아버지께서 눈치채실 것 같았고, 기숙사에서 살자니 우연재가 마음에 걸렸다.
“생각해 볼게.”
그렇다고 덜컥 결정하기는 어려운 문제라 문서윤은 말을 골랐다. 결국 우연재의 바람대로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언뜻 뇌리를 엄습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고민 없이 결정을 내리는 건 섣부른 짓이었다.
“그래 봤자 1년인데 비싸네…….”
역시나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는지 우연재가 삐죽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붙여 왔다. 머리카락이 옷 위로 드러난 맨살을 간질였다.
“아, 맞아. 너 미국 가지.”
1년이라는 단어를 듣고 나서야 떠오르는 미래가 있었다. 내년이면 우연재도 4학년이고 졸업 후 곧장 미국으로 갈 테니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기는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
1년 정도는 같이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우연재야 그렇다 쳐도 저 역시 내년부터는 슬슬 취업 준비를 해야 했다. 각자 바쁜 와중에 따로 살기까지 하면 확실히 얼굴을 보기가 힘들 터였다.
‘취준……. 아직 구체적으로 정한 건 없긴 한데.’
그래도 막연하게 내년부터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 중이었다.
“1년은 떨어져서 지내야 하는데 1년도 못 봐줘?”
우연재가 눈썹꼬리를 떨어트리며 물었다. 제게 기댄 자세라 올려다보는 시선 때문인지 한층 더 처량해 보였다. 어느새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 손이 손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일부러 약한 척 내숭을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어쩔 수 없이 넘어가게 됐다.
“……알았어, 그럼.”
고민해 보겠다 말한 게 우스울 정도로 길지 않은 생각 끝에 긍정의 답이 튀어나왔다. 우연재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그나저나 1년은 떨어져서 지내는 게 아니라 못해도 1년은 떨어져야 하는 상황 아닌가. 순간적으로 의아함이 차올랐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문서윤은 우연재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갑작스레 떠오른 의문을 파묻었다.
별 의미 없이 한 말일 테다.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문서윤은 인상을 찌푸리며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일 때문에 나간다는 두 분을 배웅하고 우연재와 시답잖은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꾸벅꾸벅 존 기억이 있긴 한데, 잠까지 들었을 줄은 몰랐다.
학기 초에 정신을 놓고 산 바람에 시험공부를 뒤늦게 몰아서 하느라 며칠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 듯했다. 몇 주간 차곡차곡 쌓인 피로가 이제야 엄습한 게 분명했다.
마음을 철렁이게 했던 피아노를 봤고, 오랜만에 집밥다운 집밥을 먹은 데다 나른한 오후에 햇살이 쏟아지는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졸음이 밀려올 수밖에 없었다.
문서윤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몸을 뒤척이고 나서야 제가 우연재의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소파에서 얘기하고 있었는데. 우연재가 옮겼나. 고개만 살짝 내려 이불에 코를 파묻자 익숙한 체향이 느껴졌다.
나른한 기분에 일어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눈만 깜박이고 있는데 우연재가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일어났네.”
“우연재.”
문서윤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침대에서 네 냄새 나…….”
절로 입술이 벌어지며 키득거리듯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연재의 침대에서 자던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인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흩어졌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침대를 향해 걸어오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만 깜박이고 있을 때였다.
우연재가 대놓고 미간을 구기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침대 위로 올라섰다. 동시에 커다란 손이 뺨을 쥐어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