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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39)화 (139/139)

9화

그런 순간들이 있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의식도 없이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이라든가.

문서윤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단순히 눈을 깜박이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아…….”

가장 먼저 망막에 맺힌 건 잠든 우연재의 얼굴이었다. 그에게 껴안기다시피 한 자세라 얼굴이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였다.

아침이구나. 언뜻 비치는 햇빛이 시간을 일러 주었다.

지나간 어제는 짧게만 느껴졌다. 몇 시간이나 섹스를 해 댔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어도 문서윤은 그 몇 없는 경험이 전부 평균보다 긴 시간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어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둘 다 무섭게 흥분해서인지 섹스는 지독할 정도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우연, 재, 흐윽, 윽…….’

‘왜.’

‘모, 못 하겠……. 아!’

나른한 오후에 시작된 섹스는 저녁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그마저도 더 이상은 도저히 못 하겠다고 엉엉 울자 우연재가 마지못해 물러난 것에 가까웠다.

그때를 떠올리자 별것 아닌 일로 운 것 같아 뒤늦게야 약간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별일 아니었던 건 아니지…….’

더 했으면 기절했을 것이다. 중간중간 잠깐 정신을 잃은 것과 달리 완전히.

과한 쾌락이 몇 시간이나 지속되자 몸이 달달 떨렸다. 이러다 잘못되면 어떡하지, 덜컥 무서운 마음이 들어 서럽게 울자 우연재가 몸을 물렸다.

‘알았어. 그만할게.’

눈물에 흠뻑 젖은 눈꼬리 위로 입술을 내리는 얼굴이 퍽 아쉬워 보였다.

그 후 문서윤은 그대로 달랑 들려 욕실로 향했다. 전신이 따뜻한 물에 잠기는 순간까지도 밭은 호흡과 함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누군가가 그 꼴을 봤다면 추워 덜덜 떤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눈가는 물론 뺨부터 손가락까지 온몸이 울긋불긋하게 물든 채라 아픈 사람처럼 보이긴 했다.

그가 간신히 호흡을 고른 건 욕조에 들어가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우연재가 깨끗하게 씻긴 몸을 끌어안고 있을 즈음이었다.

여태 섹스가 끝나면 우연재가 씻겨 줬던 터라 상황 자체는 익숙했지만, 사귀고 난 이후에 그에게 몸을 맡긴 건 처음이라 조금 멋쩍지 않을까 생각한 게 무색하게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몸을 추스르느라 그런 감정을 느낄 만한 틈이 없었다고 하는 게 옳을 테다.

문서윤은 반쯤 졸며 제 머리카락과 몸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을 느끼다 또다시 달랑 들려 욕실 밖으로 나왔다. 우연재가 머리를 말려 줄 때쯤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집에 아무도 안 계신 거 맞지?’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야 묻자 우연재가 픽 웃으며 부은 눈가를 쓸어내렸다.

‘우리밖에 없다니까.’

‘다행이다.’

‘난 있어도 상관없는데.’

‘미쳤어?’

때릴 힘도 없어 노려보기만 하자 우연재가 키득거렸다.

다행히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문서윤은 우연재가 시트와 이불을 세탁하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배고파.’

배가 고프다는 감각을 느껴 본 것도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뭐 해 줘?’

‘아니. 시켜 먹자. 나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렇게 문서윤은 우연재와 나란히 앉아 피자를 먹었다. 우연재가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다. 저 역시 굳이 찾아 먹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먹고 싶어 치즈가 잔뜩 들어간 피자를 주문해 먹었다.

‘옛날 생각난다.’

문서윤은 페퍼로니가 가득 올라간 피자 끄트머리를 베어 먹으며 중얼거렸다.

‘언제?’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시험 끝나고 너네 집 와서 피자 먹었잖아.’

‘영화 봤나.’

‘응.’

같은 순간을 떠올렸는지 우연재가 가볍게 웃었다.

그때처럼 영화를 틀어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양치질을 하고 그대로 보송보송한 침대에 누웠던 것 같다. 그 이후의 기억은 암전이었다. 꿈 한 조각조차 꾸지 않은 깊고 안온한 밤이었다.

얘는 잘 자고 있나. 문서윤은 물끄러미 우연재를 응시했다. 온몸이 근육통에라도 걸린 것처럼 아프고 아래쪽에서는 말 못 할 아릿함이 몰려왔지만, 누군가를 바라보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우연재는 곤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 웃지 않으면 싸늘해 보이는 인상은 잔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문서윤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느덧 스물셋이었으니 기억 속 얼굴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우연재는 여전히 우연재였다.

‘기분 이상하다.’

문득 이 얼굴을 보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여섯의 풋사랑이 열일곱의 열 띤 마음으로 발전한 이후부터는 우연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지금처럼 잠든 얼굴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연재가 갑자기 눈을 뜰까 봐, 그래서 곧장 눈이 마주칠까 봐, 불시에 제 감정을 들킬까 봐 늘 마음을 졸였던 것 같다.

지금처럼 아무런 걱정 없이 잠든 얼굴을 보기까지 자그마치 7년이나 걸렸다.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문서윤은 새삼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우연재를 좋아하게 된 이후에도 이런 미래를 상상한 적은 없었다. 가끔 우연재가 툭 내뱉곤 하는 말에 시답잖은 상상을 한 적은 있지만, 그조차도 금방 치워 버린 생각들이었다.

2년 만에 마주 보는 얼굴에 멋쩍어하던 순간에도, 우연재에게 짝사랑 상대가 있다는 걸 들킨 순간에도, 그가 제 감정을 눈치챈 후 설전을 벌이던 순간에도 이런 미래를 그려 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어쩌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미래이기에 더 좋은지도 모르겠다.

‘연애하면 다 이런 기분인가.’

사귀자마자 밀린 일부터 해치우느라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적도 없는데, 우연재와 함께 있는 순간 자체가 그저 간질간질했다.

괜히 체온이 오르는 기분이 들어 문서윤은 몸을 살짝 움츠렸다. 우연재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멀거니 잠든 얼굴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남자 친구 얼굴 구경해?”

긴 속눈썹이 천천히 올라가며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연재는 눈을 다 뜨기도 전에 눈웃음을 쳐 댔다.

“언제 일어났어?”

문서윤은 그제야 제 목소리 역시 잠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신음을 흘려 대고 그렇게 울어 댔으니 멀쩡한 게 더 이상할 테다.

“방금.”

우연재가 끌어안은 팔에 힘을 실으며 낯간지러운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누구 때문에 거의 기절한 것 같은데.”

“나 덕분에 잘 잤네?”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꾸에 문서윤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서윤아.”

“왜?”

우연재가 슬쩍 눈가를 찡그리더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좋아해.”

“갑자기?”

예상치 못한 말에 문서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툭하면 해 오는 말이었지만, 뜬금없는 타이밍이 아닌가 싶었다.

“갑자기 같아?”

우연재가 오히려 반문했다. 설핏 찌푸려지는 눈매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갑자기는 아닌가? 보통 사귀면 아침부터 이런 말을 하나. 간지러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알았어.”

이래서 다들 좋아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걸까. 아무래도 연애는 처음이라 잘 몰랐던 모양이다.

문서윤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넓은 등을 토닥이며 대답했다. 뭔가가 부족했던지 우연재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보내왔다. 원하는 말이 따로 있는 얼굴이었다.

“나도 좋아해.”

그제야 뚱하게 닫혀 있던 입술이 올라가며 만족스럽게 웃는 낯을 만들어 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지극히 우연재다운 반응이라 문서윤은 잘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새끼들 앞에서는 그렇게 웃지 마.”

“뭐라는 거야.”

“진짠데.”

우연재는 본심을 숨기려 부러 키득거리듯 웃었다. 진심으로 한 말을 문서윤은 진심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앞으로 질투할 일 많을 것 같은데.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몰려왔다.

문서윤의 세계를 차지한 건 좋았지만, 벌써부터 성가셔질 미래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친구였을 때는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던 사소한 부분들을 앞으로는 평온하게 넘기기 어려울 테다.

그렇다는 건 스스로를 더 억눌러야 한다는 의미였다.

‘티 안 나게 굴어야 하는데.’

저절로 팔에 힘이 실렸다. 단순히 껴안는 행동이라 생각했는지 문서윤이 또다시 희게 웃었다.

“알았어. 안 웃을게.”

눈매가 폭 솟아오를 정도로 웃는 걸 보니 장난스러운 대답이었다. 역시나, 제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게 분명했다.

“응. 웃지 마.”

우연재는 굳이 제 본심을 드러내는 대신 능숙하게 감췄다.

말간 얼굴을 집요하게 훑어 내리던 그는 몸을 살짝 움직여 문서윤을 바로 눕힌 뒤 그대로 입을 맞췄다.

그림자가 사라지자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는지 문서윤은 눈가를 찡그리면서도 흠뻑 웃었다.

“예쁘다.”

우연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문서윤을 따라 하듯이.

“갑자기?”

“애인한테 예쁘다고 하지 누구한테 예쁘다고 해.”

“……너도 예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문서윤이 입술을 달싹였다. 뺨이 발갛게 물들더니 긴 속눈썹이 하늘거리듯 내려앉았다. 우연재는 픽 웃음을 터뜨리며 재차 문서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을의 햇빛이 비처럼 온몸을 적실 듯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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