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
"지현 학생!"
친숙한듯이 말을 걸어오는 인자한 중년 남성 목소리, 김 교수님이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자 웃으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교수님, 한 학기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우리야 알고있는 것만 떠들면 되는데, 학생이면 처음 듣는걸 달달 외워야하니 오히려 지현씨가 고생이 많았죠"
교수님이 스스럼없이 다가와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씨익 웃어보인다. 그의 표정에서 나에 대한 관심이, 호감이 묻어나온다.
"참 특이한게, 맨 처음 입학했던 학생들은 고등학생 티를 못벗어서 앳된 티가 나거든요? 근데 전공을 공부하다보면 딱 그쪽 전공 특징이 보여요. 학생도 이제 누가봐도 심리학도네요. 날 보는 그 눈부터가 딱 심리학도의 눈이에요"
눈 앞에 있는 김 교수님을 처음 강의실에서 만난 때가 떠오른다.
첫날부터 과제를 내서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는 과제 하나도 없이 학점까지 잘 챙겨주는 완벽한 교수였지.
어쩌면 그걸 노렸을 지도 모른다.
완벽한 교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냈던 그 과제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뭇잎 하나 없이 앙상해진 한겨울의 캠퍼스를 교수와 함께 걷는다. 사실 교수랑 단둘이 있는다는건 대학생들에게는 끔찍한 일이겠지만, 김 교수님이라면 다르겠지.
"그래서, 3학년때 일은 생각해 뒀습니까?"
"군대부터 가야하지 않을까요... 쓰읍"
교수의 표정이 잠시 굳는다.
"아이코, 미필이면... 고생 좀 하겠네요"
"요즘 군대 정도면 괜찮습니다. 제 친구들도 가서 게임만 해대더라구요"
"그래도 그 안에 묶여있다는건 상당히 스트레스입니다. 걱정이네요"
목을 싸맨 목도리 때문에 울려서 들리는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있다. 누군가에게 걱정을 끼치는건 취향이 아니라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다.
"걱정하지 마셔요. 제가 쉽게 주저앉을 놈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네요, 하핫"
슬슬 정문이 보인다. 저곳에 도착하면 우리는 늘 헤어지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향한다.
이쯤이면 인사를 해야 할 때지.
"지현씨"
보통 내가 먼저 말을 꺼내는데, 오늘은 특이하다.
"나중에 복학하면, 꼭 제 수업을 들어보세요"
"아..? 당연히 그래야죠"
교수님이 이런 말을 꺼내는 건 처음이다. 뭐 내생각엔 교수님이 기대를 항상 품고 계셨을 것 같지만.
"지현씨는 상담 쪽을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요? 좋은 경험이 될 거에요"
"저야 좋죠!"
교수님께 진솔한 웃음을 내비친다. 내 웃는 표정이 교수님의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힌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정문 바로 앞이다. 이제 정말 작별이다.
"실습도 섞여있거든요. 상담 실습. 아무튼, 군대 잘 다녀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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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엄마가 울음이 섞인 웃음으로 날 맞이한다.
"아이고, 우리 지현이.."
엄마가 나를 꼭 껴안는다.
엄마가 느끼는 감정이 내게도 스며든다.
드디어 돌아왔다는 안도감, 반가움, 기쁨, 후련함...
그 감정들이 화학 작용이 되어 엄마의 시냅스를 타고 퍼져나간다.
그 화학 작용이 얼굴에 미열을 야기하고, 눈물샘에 도달해 눈물을 터뜨린다.
내 등 뒤로 감겨진 엄마의 손에서 떨림이 느껴진다. 내가 아무렇지 않아야 엄마의 감정도 빠르게 누그러들겠지.
"엄마는 걱정도 많다니까, 이제 맛있는거나 좀 먹으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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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의 일도, 학교에서의 일도, 군대에서의 일도, 지나고 난 이후에 생각해보면 아련함만이 남는다.
처음에는 강렬했던 일들도 계속 꺼내어 눈물을 흘리다 보면 결국 그 눈물에 녹아내린다.
하지만 정말 가끔, 몇몇 기억들은, 아무리 닦아내도 작아지질 않는다.
소녀와의 순간이 아직도 내게서 맴돈다.
소녀에게 아무런 말도 전하지 못했던 그때의 나의 모습이 내게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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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아, 먹고싶은거 다 시켜!"
없는 형편에 가격대가 꽤 부담되긴 하지만, 그만큼 기쁘신거겠지. 최대한 가격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그나마 값이 적당하고 괜찮아보이는 음식을 시킨다.
"어릴 땐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여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기분이 좋거나 술을 마셨을 때 옛날 일들을 꺼내곤 한다.
"어떻게 버텼대? 나였으면 쥐어박고 다리 밑에 버렸겠다"
장난 섞인 말로 엄마를 놀려본다. '얘는 말을 해도!' 같은 예상한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술을 한모금 더 들이키고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아니, 너 없었으면 진작에 아빠랑 이혼하고 끝냈을거야. 너 부모 없는 애 만들기 싫어서 버틴거지. 아빠는 너한테 죽을 때까지 고마워해야돼"
엄마가 그렇게도 애증하는 아빠 이야기가 나온다.
회사에서 짤린 이후로 갈피를 못잡던 아빠, 능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한없이 착하고 유쾌한 친구같은 우리 아빠, 엄마한테 전화만 오면 마누라 곧 호강시켜줄테니 좀만 기다리라는 아빠.
다행히도 해외에 나가서 사업을 시작한 이후로는 전보다는 잘 되어가는 모양이다.
"하여튼, 날 닮아서 망정이지, 니네 아빠 닮았어봐라"
말은 저렇게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가 아빠를 언급한 이후로 조금씩 떨린다.
해외로 나가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남편을 그리워하겠지. 아빠를 향한 원망과 답답함이, 그리움과 섞여 애증이 된다.
아빠한테 자주 전화하라고 미리 말해둬야겠다.
"아무튼, 너 아니었으면 진작에 할머니 할아버지 다 내버려두고 이혼서류에 도장 찍었지 뭘"
의외이다. 내가 본 엄마의 인생은 분명 나를 낳을 때부터 힘들어졌을텐데.
나도 가득 차있는 술잔을 집어들어 목 뒤로 밀어넣는다.
맥주의 탄산, 그 청량감이 목을 축인다. 그 후에 밀려들어오는 알코올이 조금씩 신경으로 퍼져나가겠지.
"다행이네, 낳은게 나라서"
엄마도 술 한잔을 마저 비운다.
"당연하지, 우리 예쁜 아들.."
엄마가 웃는다.
나도 엄마를 보며 웃는다.
------------------------------------------------
적당히 취한 채로 침대에 눕는다.
오랜만에 편하게 누워있는 내 침대에서, 자유로워졌다는 해방감과 함께 불안감이 피어난다. 자유란 달콤하지만, 풀린 족쇄는 오히려 죄수를 당황시킨다.
이제부터는 내 힘으로 인생을 살아야겠지. 우선 대학부터 복학하고, 다시 배우고...
주식도 슬슬 빼야되니까 다른 종목도 찾아야지. 돈도 좀 벌다가 내 사무실도 하나 차리고...
알코올이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린 신경은 점점 둔해지고, 몸은 나른해진다. 생각이 더뎌지면서 자연스럽게 잠에 들
뻔 하다가 복학 생각에 정신이 든다.
김 교수님.
약속했는데.
수강신청 기간이 언제더라?
뒤척이며 스마트폰을 찾아 켠다. 암순응이 완료된 눈이 다시 빛을 보자 약간의 불쾌함이 느껴진다.
당장 이틀 뒤네.
일단 날짜를 메모해두고, 김 교수님의 과목을 찾는다.
[상담실습]
다른 학생들 평가가 의외로 좋지 않다.
그 꿀강의로 유명한 김 교수님의 강의가 5점 만점에 4.1점? 보통 4.8은 넘는데, 의외다.
뭐 그래도 4.1도 꽤나 높은 점수이긴 하지.
자세한 평가를 읽어보니, 김 교수님에 대한 악평보다는 실습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평가가 많다.
'학부 수준의 지식을 적용시켜 상담하기엔 너무 어렵다. 그래도 교수님이 그렇게 많은걸 기대하진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김교수님을 믿자'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제대로 상담하지도 못했네요... 그래도 다행히도 비쁠은 받았습니다'
'상담사의 꿈은 여기서 접음'
'케바케. 운 좋으면 에이쁠이고 운 나쁘면 씨쁠. 괜찮은 내담자가 걸리길 빌자'
뭐 그렇구나.
그래도 들어야지.
약속도 약속이지만, 난 상담사가 아무리 힘들어도 계속 할거니까.근데 기억은 하실려나?
우선 수강신청부터 하고, 하루 날잡아서 만나뵈러 가야할 것 같다.
다시 폰을 끄고 잠을 청한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실습을 걱정하는건가?
지금 걱정해봤자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마음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괜찮아.
잘 할 수 있어.
처음이지만 분명 잘할 수 있어.
실습일 뿐이니까 그리 많은걸 요구하지도 않을 테고, 무료심리상담 같은거나 가볍게 하는거겠지. 경청하고, 예의바르게 말하고, 조심하면 끝이야.
그니까 제발 잠좀 자자,
오랜만에 이렇게 편한 침대에 눕는데.
조금씩 불안감이 누그러든다.
그리고 곧, 나도 모르게 잠이 들겠지.
"지현 학생!"
친숙한듯이 말을 걸어오는 인자한 중년 남성 목소리, 김 교수님이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자 웃으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교수님, 한 학기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우리야 알고있는 것만 떠들면 되는데, 학생이면 처음 듣는걸 달달 외워야하니 오히려 지현씨가 고생이 많았죠"
교수님이 스스럼없이 다가와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씨익 웃어보인다. 그의 표정에서 나에 대한 관심이, 호감이 묻어나온다.
"참 특이한게, 맨 처음 입학했던 학생들은 고등학생 티를 못벗어서 앳된 티가 나거든요? 근데 전공을 공부하다보면 딱 그쪽 전공 특징이 보여요. 학생도 이제 누가봐도 심리학도네요. 날 보는 그 눈부터가 딱 심리학도의 눈이에요"
눈 앞에 있는 김 교수님을 처음 강의실에서 만난 때가 떠오른다.
첫날부터 과제를 내서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는 과제 하나도 없이 학점까지 잘 챙겨주는 완벽한 교수였지.
어쩌면 그걸 노렸을 지도 모른다.
완벽한 교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냈던 그 과제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뭇잎 하나 없이 앙상해진 한겨울의 캠퍼스를 교수와 함께 걷는다. 사실 교수랑 단둘이 있는다는건 대학생들에게는 끔찍한 일이겠지만, 김 교수님이라면 다르겠지.
"그래서, 3학년때 일은 생각해 뒀습니까?"
"군대부터 가야하지 않을까요... 쓰읍"
교수의 표정이 잠시 굳는다.
"아이코, 미필이면... 고생 좀 하겠네요"
"요즘 군대 정도면 괜찮습니다. 제 친구들도 가서 게임만 해대더라구요"
"그래도 그 안에 묶여있다는건 상당히 스트레스입니다. 걱정이네요"
목을 싸맨 목도리 때문에 울려서 들리는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있다. 누군가에게 걱정을 끼치는건 취향이 아니라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다.
"걱정하지 마셔요. 제가 쉽게 주저앉을 놈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네요, 하핫"
슬슬 정문이 보인다. 저곳에 도착하면 우리는 늘 헤어지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향한다.
이쯤이면 인사를 해야 할 때지.
"지현씨"
보통 내가 먼저 말을 꺼내는데, 오늘은 특이하다.
"나중에 복학하면, 꼭 제 수업을 들어보세요"
"아..? 당연히 그래야죠"
교수님이 이런 말을 꺼내는 건 처음이다. 뭐 내생각엔 교수님이 기대를 항상 품고 계셨을 것 같지만.
"지현씨는 상담 쪽을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요? 좋은 경험이 될 거에요"
"저야 좋죠!"
교수님께 진솔한 웃음을 내비친다. 내 웃는 표정이 교수님의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힌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정문 바로 앞이다. 이제 정말 작별이다.
"실습도 섞여있거든요. 상담 실습. 아무튼, 군대 잘 다녀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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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엄마가 울음이 섞인 웃음으로 날 맞이한다.
"아이고, 우리 지현이.."
엄마가 나를 꼭 껴안는다.
엄마가 느끼는 감정이 내게도 스며든다.
드디어 돌아왔다는 안도감, 반가움, 기쁨, 후련함...
그 감정들이 화학 작용이 되어 엄마의 시냅스를 타고 퍼져나간다.
그 화학 작용이 얼굴에 미열을 야기하고, 눈물샘에 도달해 눈물을 터뜨린다.
내 등 뒤로 감겨진 엄마의 손에서 떨림이 느껴진다. 내가 아무렇지 않아야 엄마의 감정도 빠르게 누그러들겠지.
"엄마는 걱정도 많다니까, 이제 맛있는거나 좀 먹으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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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의 일도, 학교에서의 일도, 군대에서의 일도, 지나고 난 이후에 생각해보면 아련함만이 남는다.
처음에는 강렬했던 일들도 계속 꺼내어 눈물을 흘리다 보면 결국 그 눈물에 녹아내린다.
하지만 정말 가끔, 몇몇 기억들은, 아무리 닦아내도 작아지질 않는다.
소녀와의 순간이 아직도 내게서 맴돈다.
소녀에게 아무런 말도 전하지 못했던 그때의 나의 모습이 내게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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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아, 먹고싶은거 다 시켜!"
없는 형편에 가격대가 꽤 부담되긴 하지만, 그만큼 기쁘신거겠지. 최대한 가격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그나마 값이 적당하고 괜찮아보이는 음식을 시킨다.
"어릴 땐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여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기분이 좋거나 술을 마셨을 때 옛날 일들을 꺼내곤 한다.
"어떻게 버텼대? 나였으면 쥐어박고 다리 밑에 버렸겠다"
장난 섞인 말로 엄마를 놀려본다. '얘는 말을 해도!' 같은 예상한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술을 한모금 더 들이키고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아니, 너 없었으면 진작에 아빠랑 이혼하고 끝냈을거야. 너 부모 없는 애 만들기 싫어서 버틴거지. 아빠는 너한테 죽을 때까지 고마워해야돼"
엄마가 그렇게도 애증하는 아빠 이야기가 나온다.
회사에서 짤린 이후로 갈피를 못잡던 아빠, 능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한없이 착하고 유쾌한 친구같은 우리 아빠, 엄마한테 전화만 오면 마누라 곧 호강시켜줄테니 좀만 기다리라는 아빠.
다행히도 해외에 나가서 사업을 시작한 이후로는 전보다는 잘 되어가는 모양이다.
"하여튼, 날 닮아서 망정이지, 니네 아빠 닮았어봐라"
말은 저렇게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가 아빠를 언급한 이후로 조금씩 떨린다.
해외로 나가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남편을 그리워하겠지. 아빠를 향한 원망과 답답함이, 그리움과 섞여 애증이 된다.
아빠한테 자주 전화하라고 미리 말해둬야겠다.
"아무튼, 너 아니었으면 진작에 할머니 할아버지 다 내버려두고 이혼서류에 도장 찍었지 뭘"
의외이다. 내가 본 엄마의 인생은 분명 나를 낳을 때부터 힘들어졌을텐데.
나도 가득 차있는 술잔을 집어들어 목 뒤로 밀어넣는다.
맥주의 탄산, 그 청량감이 목을 축인다. 그 후에 밀려들어오는 알코올이 조금씩 신경으로 퍼져나가겠지.
"다행이네, 낳은게 나라서"
엄마도 술 한잔을 마저 비운다.
"당연하지, 우리 예쁜 아들.."
엄마가 웃는다.
나도 엄마를 보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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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취한 채로 침대에 눕는다.
오랜만에 편하게 누워있는 내 침대에서, 자유로워졌다는 해방감과 함께 불안감이 피어난다. 자유란 달콤하지만, 풀린 족쇄는 오히려 죄수를 당황시킨다.
이제부터는 내 힘으로 인생을 살아야겠지. 우선 대학부터 복학하고, 다시 배우고...
주식도 슬슬 빼야되니까 다른 종목도 찾아야지. 돈도 좀 벌다가 내 사무실도 하나 차리고...
알코올이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린 신경은 점점 둔해지고, 몸은 나른해진다. 생각이 더뎌지면서 자연스럽게 잠에 들
뻔 하다가 복학 생각에 정신이 든다.
김 교수님.
약속했는데.
수강신청 기간이 언제더라?
뒤척이며 스마트폰을 찾아 켠다. 암순응이 완료된 눈이 다시 빛을 보자 약간의 불쾌함이 느껴진다.
당장 이틀 뒤네.
일단 날짜를 메모해두고, 김 교수님의 과목을 찾는다.
[상담실습]
다른 학생들 평가가 의외로 좋지 않다.
그 꿀강의로 유명한 김 교수님의 강의가 5점 만점에 4.1점? 보통 4.8은 넘는데, 의외다.
뭐 그래도 4.1도 꽤나 높은 점수이긴 하지.
자세한 평가를 읽어보니, 김 교수님에 대한 악평보다는 실습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평가가 많다.
'학부 수준의 지식을 적용시켜 상담하기엔 너무 어렵다. 그래도 교수님이 그렇게 많은걸 기대하진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김교수님을 믿자'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제대로 상담하지도 못했네요... 그래도 다행히도 비쁠은 받았습니다'
'상담사의 꿈은 여기서 접음'
'케바케. 운 좋으면 에이쁠이고 운 나쁘면 씨쁠. 괜찮은 내담자가 걸리길 빌자'
뭐 그렇구나.
그래도 들어야지.
약속도 약속이지만, 난 상담사가 아무리 힘들어도 계속 할거니까.근데 기억은 하실려나?
우선 수강신청부터 하고, 하루 날잡아서 만나뵈러 가야할 것 같다.
다시 폰을 끄고 잠을 청한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실습을 걱정하는건가?
지금 걱정해봤자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마음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괜찮아.
잘 할 수 있어.
처음이지만 분명 잘할 수 있어.
실습일 뿐이니까 그리 많은걸 요구하지도 않을 테고, 무료심리상담 같은거나 가볍게 하는거겠지. 경청하고, 예의바르게 말하고, 조심하면 끝이야.
그니까 제발 잠좀 자자,
오랜만에 이렇게 편한 침대에 눕는데.
조금씩 불안감이 누그러든다.
그리고 곧, 나도 모르게 잠이 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