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9
"지현아, 앙~"
누나가 내 입에 죽을 밀어넣는다.
뜨겁지 않게 적당히 식은 한 숟가락의 죽이 입 안으로 들어온다.
"청춘이구나, 청춘! 어디서 이렇게 참하고 예쁜 애를 데려왔대?"
"아이,, 어머님도 참.."
쑥쓰러운 듯이 웃는 누나가, 다시 죽을 떠서 호호 불어 식힌다.
"자, 다시 아~ 해봐"
받아먹으면서 생각을 한다.
지민이와 있었던 일을 누나한테 말할 수는 없다.
누나가 저렇게 웃고있지만, 분명 응어리진 분노와 한을 품고 있다.
사실대로 털어놓는 순간, 지민이랑 김 교수님 인생은 끝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완벽히 타개할 변명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제 열은 괜찮나?"
누나가 올려둔 수건을 걷고 자기 이마를 가져다댄다.
"으음... 아직인 것 같아"
다시 물에 적셔 수건을 짜는 누나를, 엄마가 앉아서 빤히 바라본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어떻게 우리 아들이 이렇게 예쁜 애를 꼬셨지? 참..."
"모임에서 처음 만났는데, 둘이 따로 빠져서 놀자고 저한테 그러더라구요"
"이그! 지 아빠 닮아가지고 예쁜 사람들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그러니까요... 참"
엄마와 누나가 웃는다.
수건을 이마에 다시 올려놓는 누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통증과 피로감 때문에 몰려오는 열과 무기력함이 내 사고를 방해하는 것 같다.
"...누나, 이제 그만 먹을래.."
"아직 반도 안먹었는데?"
"그래, 아플수록 더 먹어야지, 너네 누나 말 듣고 더 먹어"
엄마와 친해진 듯한 저 유대감이 날 불안하게 만든다.
누나가 다시 죽을 입 앞에 가져다댄다.
"아~"
..받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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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틈을 타 엄마가 내게 다가온다.
"우리 아들이 능력이 좋긴 하네, 소연이 쟤 맘에 든다"
"...그래"
"요즘 세상에 저렇게 자기 애인한테 잘해주는 여자가 어딨어. 잘 해봐"
"알았어"
"에휴... 그래서, 도대체 뭐하다가 다쳐서 온 거니"
"...일하다가"
"위험한 일 같은거 하지마"
"응.."
"그래도 이제 좀 안심이다, 언제까지 혼자서 빈둥대나 걱정이었는데"
"..."
"그리고, 아빠가 조만간 한번 오라더라"
"방학에?"
"아니, 당장 일요일이야. 3일 남았어"
"나는 그럼 못가겠네"
"너 말고 나만 오랜다"
"...혼자?"
"넌 학기 중이라 바쁠 테니까 혼자 놀러오라더라. 아빠가 요새 잘 버는지, 마님 대접 한번 해준댄다"
"잘 됐네"
"너 때문에 못 갈 뻔 했어"
"...미안"
"휴우... 됐다, 제발 몸 좀 건강히 다녀, 엄마 쓰러지는 꼴 보기 싫으면"
"알았어"
"아무튼, 다음 주에 갈 거니까, 둘이 잘 지내고 있어"
둘이...
방 문으로 작게 보이는 누나의 뒷모습.. 차분하게 죽그릇과 식기를 닦는 저 모습이 어머니에겐 똑부러지는 여인의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내게는 날 어떻게 처분할 지 고민 중인 중세시대 이단심문관의 모습으로 보인다. 손에 들고 있는게 숟가락이긴 하지만..
"그리고 너, 쟤랑 싸웠다며?"
"조금"
"소연이 쟤, 아직도 속으로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든 기분 좀 풀어줘. 여자 마음은 엄마가 더 잘 아니까,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
"...그래? 알았어"
엄마도 느껴지겠지.
누구 엄마인데, 당연하지.
"근데 어떻게 알고 문을 열어준 거야"
"아니, 니 이름 부르면서 엉엉 울길래 들여보냈지"
"...그렇다고 문을 열어주면 어떡해.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럼 저 이쁜 애가 밖에서 니 이름 부르고 엉엉 울면서 두드리는데 가만히 냅둬?"
"언제 온건데?"
"오늘 아침에"
"그럼 지금까지 둘이 뭐했어?"
"니 얘기 했지. 소연이 아니었으면 나는 니 없어진 줄도 몰랐어. 그냥 또 친구들이랑 놀러간 줄 알았지. 듣고 깜짝 놀랐어"
날 찾으러 내 집에 왔고, 내가 집에도 온 적이 없다는 걸 엄마랑 말하면서 들었겠지.
누나는 분명 지민이를 의심하고 있다. 지민이의 냄새..가 진짜로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까지도 다퉜던 지민이가 의심받는건 당연하다.
내가 설명해야할 건 세 가지
1. 왜 헤어지자고 말했는가
2. 왜 몸에 상처가 있는가
3. 어디에 있다 왔는가
전화를 받지 못한 건 상처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고 둘러대면 되니까 제외.
어떻게 해야 세 가지를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민이 이야기는 일체 꺼내지 않는게 좋다.
옛 친구들을 꺼내 변명하는것도 바보같은 짓이다.
분명 누나는 내가 말하는 내용의 진위를 악착같이 확인할 것이다.
진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신빙성 있는 이유...
"어머니, 다 끝냈어요!"
"아이고, 고마워요.. 나 대신 지현이 좀 봐줘요. 한시름 덜었더니 나도 피곤하네"
엄마가 자리를 비켜주려는 듯이 누나와 나를 남겨두고 문을 닫는다.
...좋은 배려는 아니다.
"지현아, 어머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누나가 내 침대에 걸터앉는다.
"그냥, 엄마가 나 걱정했다고.. 앞으로 그러지 말래"
"다른 얘기는?"
"곧 아빠 보러 간대"
"내 얘기는?"
"했어"
"그래? 어머님이 나 어떻대?"
"예쁘대. 자기 마음에 드니까 잘하래"
"정말? 다행이다.. 아침에 너무 추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혹시라도 안좋게 생각하실까봐 걱정했거든"
누나가 기쁜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짓는다.
"응, 걱정하지마"
"어머님 참 좋으신 분이시다"
"응"
"근데 왜 우리 지현이는 자꾸 나쁜 거짓말을 하지?"
누나가 날 내려다본다.
미소와 차가움이 공존하는 그 얼굴이 나를 압박한다.
"...누나, 다 설명해줄게"
..아직 제대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칼에 찔린 상처와, 이별 통보와, 24시간 가량의 알리바이를 연결지을 수가 없다.
"아냐아냐, 괜찮아"
누나가 내 입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나 지금 기분 되게 좋아!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랄까? 갑자기 헤어지자고 말한 우리 애기가 다시 이렇게 귀엽게 돌아왔잖아! 이 기분을 아직은 느끼고 싶어"
"게다가, 어머님이 날 좋게 생각해 주신다니.. 나 오늘 너무 행복해"
누나가 내 볼을 쥐어잡는다.
"우리 지현이가.. 응? 누나를 위해서 이렇게 즐거운 이벤트를 준비했잖아?"
볼을 이리저리 늘리고 누르며 날 귀여운 듯이 쳐다본다.
"그래서, 나도 지현이를 위해서 이벤트를 준비할려고! 그때 왜 이런 일을 만든 건지, 어디서 뭘 하고 온 건지, 솔직하게 말해줘야해.. 알겠지?"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시간은 있다.
"푹 쉬어.. 빨리 나아야해"
다 낫기 전에, 어떻게든 대가리를 굴리자.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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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동남아 쪽은 선크림 꼭 챙기셔야 해요!"
"아고, 내 정신 좀 봐. 고마워요"
"그리고 이거, 가서 아버님이랑 드시라고 좀 사왔어요"
누나가 비닐에 밀봉된 김치와 라면을 가져온다.
"어머님이 김치 없이는 못 사신다고 지현이가 그러더라구요! 라면은 가서 아버님 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아요, 한인타운이나 마트에서 판다고는 해도 한국에 있는 거랑은 다르더라구요"
"어머머, 딸내미 있으면 이런 기분인가봐.. 예뻐 죽겠네"
두 사람이 화목하게 웃으며 짐을 챙긴다.
내일 아침이면 엄마가 아빠를 보러 간다.
꽤나 긴 장기 투숙, 14박 15일.
엄마도 내가 집에 거의 안오니 혼자서 적적했겠지.
아빠가 오라니까 바로 가는걸 보면..
"엄마, 몸 조심해. 그쪽 치안이 그나마 낫긴 한데, 그래도 관광객이면 조심해야돼"
"니네 아빠는 완전히 현지인 다 됐어. 생긴 것도 아주 딱 똑같더만. 탈 날 일 없어. 그리고 호텔에서 재워준대니까 호텔에서 놀 거야"
"그래, 그럼 다행이고"
"너희들도 사고치지말고, 한창 때라서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아이.. 어머님"
누나가 부끄러운 듯이 눈을 땅으로 떨군다.
"지현이 쟤가 걱정이지. 할 때 하더라도 피임은 무조건 해야하는 거야. 책임지지도 못할 짓은 하지도 마"
"...엄마, 나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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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잘 다녀오세요!"
"잘 갔다와"
"그래, 둘이 잘 지내고 있어. 올 때 니 좋아하는 말린 망고, 그것 좀 사다줄게. 우리 딸은 뭐 사올까?"
"저도 말린 망고 좋아해요, 같이 사다주세요!"
"그래, 둘 다 한번씩 안고 가자. 아이고, 우리 아들 딸.."
엄마가 나와 누나를 양팔로 끌어안는다.
엄마가 가면 이제 둘만 남는다.
"저기, 저 택시 같아요!"
누나가 손을 흔들어 택시를 앞으로 불러온다.
"어머니, 짐 올려드릴게요"
누나가 그 무거운 짐을 트렁크에 싣는다.
"어머, 우리 딸 힘도 세네! 어쩜~"
"연락드릴게요. 잘 다녀오세요!"
누나가 뒷문을 열어 엄마를 들여보낸다.
"그래, 우리 지현이 잘 부탁해"
"네, 어머니"
문이 닫힌다.
엄마가 손을 흔든다.
택시가 움직이며, 엄마가 점점 멀어진다.
"어머님, 가셨네"
"응"
누나가 내 허리를 감싸안는다.
"그럼, 우리도 갈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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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네, 그치?"
온갖 물건들이 어지러이 놓여있는 자취방이 낯설다.
이곳에서 누나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어렴풋이 느껴진다.
"발 조심해! 내가 깨버려서.."
깨져있는 소주병과 그릇들을 누나가 쓸어담는다.
"잠깐 거기 누워있어. 이불 위엔 아무것도 없어"
"누나, 미안해"
"뭐가?"
"...나 때문에 이렇게 됐잖아"
"흐응... 뭐 그렇긴 하지"
누나가 꼼꼼하게 쓸어낸 파편들을 쓰레기통에 쏟아붓는다.
"누나, 다 설명해줄게.. 어쩔 수 없었어"
누워있는 동안 나름 생각해둔 시나리오가 있다.
누나가 확인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아니, 확인하려 하지 않을 테다.
이대로 잘 넘기면 분명 사건이 어느정도 해결될 듯 하다.
차분하게 심호흠을 하고, 천천히 다가오는 누나에게 설명을 시작한다.
"누나도 알지? 학교 근ㅊ...."
빠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