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3
"아이고, 김 선생님 오셨어요? 커피라도 한잔 타드릴까요?"
아주머니가 나를 환하게 웃으며 반긴다.
"아, 괜찮습니다. 이미 마시고 왔어요. 이따가 원장님 상담 끝나시면 저 왔다고 대신 좀 말씀해주세요"
"알겠으니까 들어가서 편하게 공부해요"
프론트에서 걸어나와서까지 내 상담실 문을 열어주시는 아주머니의 환대에 점차 익숙해진다.
유진 씨의 상담을 맡은 이후부터 원장님과 아주머니가 내게 이런 식으로 고마움을 표하곤 한다.
골칫덩어리였던 내담자를 대신 맡는 모습, 점점 달라지는 그 싸가지없는 내담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듯하다.
덕분에 실습생이면서도 상당히 후한 대우를 받고 있다. 원래부터 잘 대해주시긴 했지만…
상담소에는 출근시간을 피해서 점심 무렵 즈음에 출근한다.
아침 시간에는 상담을 받는 이들이 거의 없기도 하고, 딱히 내가 와서 도울 일도 없다.
천천히 와서는 원장님의 추천을 받은 책들, 논문들을 읽는다.
한 번 읽은걸 다시 꺼내어 또 읽고, 그 안의 내용들이 자연스럽게 내뱉을 정도가 될 때까지 반복한다.
내 책상 옆 선반에도 조금씩 책과 자료들이 쌓이기 시작한다.
증상이 그리 심하지 않은 내담자들이나 일시적인 혼란을 겪는 이들은 내가 도맡아 상담을 한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전보다 훨씬 나아진 것 같아요"
"저도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이제부터는 분명 혼자서도 잘 헤쳐나가실 수 있습니다"
상태가 호전됨을 자각하며 기뻐하는 내담자들의 모습을 보고는 한다.
그들이 전과는 달리 환하게 웃을 때면 나도 분명 기쁘다.
하지만, 상담사의 기쁨은 곧 이별이 된다.
저들은 이제 괜찮으니 더이상 날 만나러오지 않는다.
몇번의 상담을 거치면 그들의 얼굴이 익숙해진다.
그 익숙한 이들을 계속해서 떠나보낸다.
"언제 한번 소식 전하러 들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진심을 담아 그들의 미래를 축복하지만, 내 마음 속에 생겨나는 허탈함과 공허함을 안고 그들이 떠난 후에도 가만히 앉아있고는 한다.
가만히 앉아서는, 앞으로 그들이 누리게될 행복한 미래를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다.
그래, 가끔은 힘든 일도 겪겠지만 분명 그들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날 만나러오지 않고, 기억 속의 나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달래겠지.
하나의 상담이 끝날 때마다 내 기억 안에 소중히 품은 채로 축복해주는 이들이 늘어난다.
"나도 똑같아"
원장님과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눌 때에는 그에게서 상담사라는 직업에 대해 배운다.
"상담이라는건 애틋한 일이거든. 우리가 할 일은, 내담자들이 감당 못할 감정을 추스리도록 도와주고, 다시 정상 범위로 돌아오면 그저 행복을 빌어주면서 떠나보내는 것 뿐이야"
"저는, 누군가를 도와주면 분명 뿌듯할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나도 그랬지"
"..사람 마음은 어렵네요"
"그래, 그런 법이야"
손에 쥔 커피를 홀짝인다.
유진 씨 만큼은 계속해서 날 만나러 온다.
업무 이야기, 가족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자기가 겪은 일들,
그 일들에 얽혀있는 감정들,
그것들을 들으며 그녀와 매주 이야기를 나눈다.
"앞에서는 닥치고 있으면서 뒤에서 까대니까 진짜 좆같다니까"
"맞아요. 저같아도 그런 상황이면 화나죠"
"...미안, 욕 줄이는 건 생각보다 힘드네"
"괜찮아요, 화날 만한 상황이니까. 그래도 점점 나아지잖아요"
유진 씨의 공격성도, 타인을 깔보고 무시하는 성향도 조금씩 호전되는게 보인다.
언젠가 유진 씨도 내게 웃으며 작별인사를 건네겠지.
오래 진행되는 상담일수록 그 이별은 가슴에 사무친다.
하지만 그들에게 티를 내지 않는다.
그들이 떠나가는 건 행복을 위해서니까, 나는 웃으며 떠나보낸다.
"그리고, 아빠가 너 만나고싶대.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아?"
"네, 어차피 상담 말고는 할 일도 없어요"
"아빠한테 말해둘게. 아침 9시 쯤에 집 앞으로 나와있어. 차 하나 보낼테니까"
때때로 이렇게 아버님을 만나뵙는다.
날 부르시고는 내 핑계를 대며 그동안 쌓아둔 술을 하나씩 꺼내어 드신다.
그 이상으로 마시면 뒷감당이 되지 않으시는지, 그저 텅 빈 잔을 하염없이 어루만지실 뿐이다.
"다음에도 꼭 와줘요. 알았죠? 나 요새 지현 씨 오는 것만 기다리잖아"
손을 꼬옥 붙잡고 간절하게 애원하시는 그 모습 앞에서는 내 마음도 한없이 약해진다.
그저, 다음에도 다시 오겠다는 말과 함께 웃으며 떠날 뿐이다.
--------
"야, 엄마가 너 싫어하더라"
유진 씨와 정원을 거닐며 대화를 나눈다.
"아빠가 너만 오면 술 마신다고 단단히 벼르던데"
"유진 씨가 쉴드 좀 잘 쳐줘요"
"이미 쳐주고 있거든? 아빠랑 마실 때 선 넘고 사고만 치지 마"
"당연하죠"
"엄마랑 안그래도 사이 안좋으니까 괜히 꼬투리 잡히면 골치아파"
"어머님이랑은 왜 사이가 안좋아졌나요?"
단풍이 떨어져서는 그 앙상한 가지로 부들부들 혼자 떨어대는 나무들,
그 나무들을 쓰다듬으며 가족사에 대해 물어본다.
"그냥, 옛날부터 그랬어"
유진 씨도 내 옆으로 바짝 붙어서는 나무를 올려다본다.
"엄마는 나를 방해꾼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빠랑 같이 있을 시간을 뺐잖아"
"아버님에게 상당히 집착하시나봐요"
"응, 그냥 미친년이야"
유진 씨가 고개를 떨구고는 바닥에 소복이 쌓인 낙엽을 발로 흩뜨린다.
"나도 알아. 그 새끼 닮아서 성격 지랄맞은거"
유진 씨의 말에서 마음 속 깊이 우러나오는 증오와 자기혐오가 느껴진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아직 단풍이 달려있는 다른 나뭇가지를 쓰다듬으며, 그것이 붙들고 있던 단풍을 하나 떼어내 땅으로 떨어뜨린다.
"유진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유진 씨가 흩뜨린 낙엽더미 위로 그 단풍이 떨어진다.
"저도 제 얘기 하나 해줄게요"
손목을, 옷 너머로 어루만진다.
"..손목을 그어버린 적이 있었어요. 이런저런 일이 있었는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더라구요"
"..보여줘"
소매를 걷어서 흉터를 보인다.
"되게 크네"
"지금까지 본 적 없으시죠..? 실수로라도 유진 씨나 가족분들한테 보였을까봐 걱정 많이 했거든요"
"응, 없어"
찬 바람이 불고, 내가 떼어낸 단풍보다 훨씬 많은 단풍들이 쏟아져내린다.
쏟아져내리는 단풍 아래에서 유진 씨가 나를 품에 안는다.
"...단풍 맞을까봐 안아주는 거야"
"그래요.."
바람이 잦아들고, 단풍이 떨어지지 않음에도 난 그녀의 품에 안겨있다.
그녀도 날 계속해서 안아준다.
"자살하려고 했던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줘요,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
"유진 씨, 세상에는 힘든 일들도 많이 일어나요. 어딘가에선 즐겁게 놀지만, 어딘가에선 절망에 허덕여요"
"응"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행복하지만 때로는 좌절하죠"
"응"
"인생 속 요소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것은 제게 장애물이 되지만, 또 어떤 것은 제게 힘이 되죠"
"응"
"유진 씨가 느끼는 부정적인 것들도, 긍정적인 것들도 모두 그대로 받아들여요. 인생이라는건 두 가지 모두를 겪는 거니까"
"알았어"
"하지만, 부정적인 것은 때때로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개같은 감정을 야기하고 악순환을 만들어요"
"응"
"그럴 때마다 그 하강나선을 그리며 유진 씨를 끌고내리는 멍청한 생각들을 이겨내야해요"
"그래"
"저, 앞으로는 더이상 흉터같은 건 신경쓰지 않을 거예요"
"응"
"유진 씨도 어머니와 자신을 연결시키지 말고 살아요"
"..응"
"그렇게 빨리 훌륭하게 성장해서 절 떠나세요"
"..."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어서는, 빨리 절 떠나세요"
"..."
"유진 씨가 제게 오래 머물수록, 유진 씨는 힘들어집니다"
"....."
날 껴안고 있는 그녀가, 조금 더 힘을 주며 날 꼬옥 껴안는다.
"제발 빨리 떠나세요. 알았죠?"
"....."
"떠나는 날을 기다릴게요"
내가 떠나보낸 이들을 떠올린다.
이젠 날 찾아오지 않는 그들을 떠올린다.
지민이가 떠오른다.
내게서 벗어나 잘 해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지은이도 떠오른다.
제발 날 기다리지 말고 멀리 떠나갈 수 있도록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날 자신의 목덜미로 품고 있는 유진 씨를 생각한다.
그녀의 향수를 넘어, 은은하게 느껴지는 살냄새가 느껴진다.
포옹 속에서 그녀를 느낀다.
그녀의 온기와, 그녀의 옷과, 그녀의 몸과, 그녀의 심장박동까지..
"이제 풀어줘요"
유진 씨가 날 껴안은 팔을 푼다.
그녀와 내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혼자 남은 듯한 기분이 드는 이 상황 속에서, 내가 이 내담자에게 몸을 맡겼다는걸 받아들인다.
모두를 내치려 하면서도 혼자 남는걸 두려워하는 내 모습을 마주한다.
가만히 웅크려앉아 온갖 생각을 해대며 사랑을 피하는 아이, 하지만 떠나가는 이들을 보며 좌절하는 아이.
웅크린 채 날 바라보는, 어릴 적 나를 마주한다.
"오늘 일은 잊어주세요. 죄송합니다"
다시 코트를 고쳐입고 그녀에게서 뒷걸음질친다.
"가볼게요. 차는 안불러주셔도 괜찮아요. 오늘은 그냥 지하철 타고 갈게요"
"...지현아"
유진 씨가 내 손을 붙잡는다.
"아뇨,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갈게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입구 쪽으로 빠르게 걸어간다.
웅크린 소년이 무릎 사이로 고개를 쳐박고는 기어코 눈물을 쏟아낸다.
내게서 떠나간 이들을 다시금 되새기며, 유진 씨에게서 떠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