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 상담사 이야기-39화 (39/96)

EP. 39

평정심..

"...둘이 어떻게 알고 만나있었어요?"

지민이와 유진 씨를 번갈아 쳐다보며 유진 씨의 옆자리에 천천히 앉는다.

지민이는 커피를 홀짝이고, 유진 씨는 내 오른손을 포개어 잡으며 대답한다.

지민이가 우리의 손을 잠시 보더니 다시 커피를 홀짝인다.

"응? 오늘 만나는 애가 지민이야?"

유진 씨가 몰랐다는 듯이 놀라며 지민이에게로 눈을 돌린다.

"신기한 우연이네, 그치 지민아?"

"그러게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커피를 쥐고 있는 지민이의 손에서 미약한 떨림을 본다.

"유진 씨, 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시면 안될까요?"

"아니, 나도 같이 낄게. 혼자 위에서 기다리려니까 심심하더라."

"오빠, 괜찮아요. 셋이 같이 있어요."

지민이가 날 슬쩍 보고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

"...그래, 그러지 뭐."

"먹고싶은 거 있으면 시켜"

유진 씨가 내 손등을 톡톡 건드리며 애정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 지민이 너도 더 시켜. 내가 다 살 테니까."

지민이가 살짝 미소지어보이고는 조심스럽게 끄덕인다.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유진 씨에게서는 여유가, 지민이에게서는 긴장감이 느껴지는걸 보면 선후배 관계?

나이차이가 꽤 되니까 학교에서 만난 사이는 아닐테고,

유진 씨의 지인이나 친구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그쪽 부류인가?

허나 그냥 지인이라고 하기에는 둘 사이의 입장 차이가 꽤나 선명하다.

손을 들어 직원을 부른다. 직원이 테이블에 다가온다.

"저는 카모마일 티, 따뜻한 걸로요."

"네 도련님."

지민이를 슬쩍 쳐다본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주문 의사가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제스처를 받아들인다.

"아, 잠깐"

유진 씨가 주문에 끼어든다.

"지민이도 이제 성인이잖아? 술 마셔본 적 있니?"

"아뇨, 아직.."

"음.. 그럼 달달한 걸로 해야겠네."

유진 씨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적당히 골라올테니까 둘이 얘기나 하고 있어."

유진 씨가 또각 또각 소리를 내며 온갖 고급스러운 술들이 전시되어 있던 진열대 쪽으로 향한다.

직원이 유진 씨의 뒤를 급히 따라간다.

"...어떻게 된 거야?"

"오빠야말로, 어떻게 된 거예요?"

"빨리 말해. 유진 씨랑 무슨 사이인 거야?"

"오빠도, 도대체 언니랑 무슨 사이인 거예요?"

"지금 말장난할 때 아니야. 빨리 말해."

"이게 장난 같아요? 오빠, 미쳤어요?"

"유진 씨가 니 없는 동안 나랑 만났고, 며칠 전부터 사귀기 시작했어. 이제 니가 말해."

"...사귄다고요?"

"그래, 그렇게 됐어."

지민이가 부들거리며 주먹을 쥔다. 소녀의 감정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

"...됐어요. 지금은 오빠 걱정이나 해요."

"무슨 소리야? 빨리 유진 씨랑 무슨 관계인지나 말해줘."

지민이가 앞으로 몸을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 사람, 진짜 미친년이니까 조심해요. 오빠 전여친이나 저보다 훨씬 더 미친ㄴ..."

"둘이 뽀뽀라도 하니?"

유진 씨가 그새 와서는 지민이와 내 어깨에 손을 살며시 얹는다.

"암만 지민이 너여도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지민이가 다시 등을 의자에 기대면서 멋쩍게 웃으며 말한다.

"아뇨, 수능 점수 물어보길래, 다른 사람들한테 들리면 좀 창피해서..."

"아, 그래. 수능은 어떻게 됐어?"

유진 씨가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냥, 평소에 모의고사 칠 때랑 비슷하게 했어요."

유진 씨를 따라온 직원들이 트레이를 옆으로 밀어놓고는 테이블 중앙에 잔과 안주들을 세팅하기 시작한다.

"그럼 거의 다 맞았으려나? 잘했네~"

세 사람 앞에 놓인 영롱한 유리잔에 기포를 내는 보석 같은 액체가 차오른다.

유진 씨가 적당히 채워진 잔을 살며시 들어 올린다.

"그동안 고생한 지민이를 위해"

나와 지민이도 잔을 들어 올려 그 유리잔에 가져다 댄다.

세 잔이 맞부딪치며 청아한 울림을 쏟아낸다.

"그리고, 오늘 이후로는 나랑 지현이 눈에 띄지 마."

유진 씨가 샴페인을 음미하며 미소를 짓는다.

"다음에 보이면 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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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씨, 도대체 왜 그런 거예요?"

방 문을 닫고 직원들이 나가고 나서야 참아왔던 말을 꺼낸다.

"왜? 니가 무서워했잖아. 도와준 거야."

"아니, 하..."

유진 씨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 걸어놓는다.

"제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어요. 지민이랑 다툼이 있긴 했지만, 그건 유진 씨가 나설 일은 아니잖아요."

"니가 해결하기 힘든 문제니까 내가 대신 해결해 준 거야. 왜 나한테 화를 내?"

"저한테 말도 안 하고 그렇게 행동하시면 제가 난처해진다는 걸 모르시겠어요?"

"뭐가 난처해지는데?"

"아니, 이렇게 되면 저랑 지민이는 이제 어떻ㄱ..."

"더 이상 안 만나게 도와준 거잖아"

"제 내담자였고, 제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고요. 이런 도움 필요 없으니까 다음부터 절대 이러지 마세요."

유진 씨가 속옷만 남기고는 전부 벗어버린다. 그 상태로 옷장을 열어 안에 걸려있는 목욕 가운을 꺼내어 걸친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듯이 평소처럼 편하게 행동하는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유진 씨, 저희가 아무리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고는 해도, 서로의 삶은 존중해야 해요."

"그래, 존중하니까 내가 도와준 거잖아"

"아니, 이건 도와준 게 아니라니까요? 제 문제들에 나서지 마세요. 알겠어요?"

그녀에게 감정을 담아 강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대로 전달될 것 같지가 않았다.

"...나한테 화낸 거야?"

"네, 화냈어요. 유진 씨가 한 행동은 절 위한 행동이 아니라, 유진 씨가 배려심 없이 끼어들어서는 멋대로 행동한 거라고요."

"내가 안 도와줬으면 앞으로도 지민이한테 휘둘리면서 스트레스 받았을 텐데, 그걸 내가 도와줬는데 왜 나한테 화를 내?"

"그럼 제가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면 바로 달려와서는 그렇게 깽판을 치실 거예요? 그게 저를 위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 남자친구 힘들어하는 꼴 보기 싫으니까 도와줄 수도 있는 거지,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그냥 이 방에 가만히 있어주는 게 도와주는 거였어요. 하..."

한숨을 쉬고는 유진 씨의 얼굴을 살짝 살펴본다.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도리어 가슴이 더 답답해진다.

그녀는 아직 잘 모를 뿐이다. 화 내지 말자...

화를 가라앉히자 방금 전의 행동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화낸 건 미안해요.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라 감정 조절이 제대로 안됐어요."

그녀에게 먼저 사과를 건넨 후 옷을 벗어 하나하나 걸어놓는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살아서 그런지, 잠깐 화를 낸 것만으로도 금세 마음이 무거워진다.

침대 위에 앉아서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유진 씨를 다시 한번 슬쩍 쳐다본다.

"..아냐, 나도 잘못한 것 같아. 앞으로는 조심할게."

유진 씨가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을 옆에 내려놓고는 내게 사과를 건넨다.

말싸움이 끝이 났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전보다는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옷장 안에서 목욕 가운을 꺼내어 입는다. 부드러운 촉감이 몸을 따스하게 감싼다.

그녀가 저 사과를 하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얼마나 꺾은 건지 잘 알고 있다.

기분이 꽤나 상했을 테니,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나도 침대로 향한다.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그녀의 옆에 나도 앉는다.

"저를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하신 거 알아요. 고마워요. 그래도, 앞으로는 제가 직접 해결해 볼게요. 사람은 그렇게 성장하잖아요."

달래면서도 다시금 입장을 확고히 하는 말과 함께 그녀의 손을 잡는다.

"알았죠?"

"..그래"

그녀가 다시 내려놓았던 스마트폰을 집어들고는 뒤로 드러눕는다.

푹신한 침대에 파묻혀서는, 하늘을 향해 손을 높이 쳐들고는 그 최신형 기기를 들여다본다.

이제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남아있는 감정들도 가라앉을 것이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나도 그녀를 따라 침대에 눕는다. 상대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은 꽤나 많은 상황에서 호감을 산다.

"..!"

그녀가 내가 눕자 화들짝 놀라며 스마트폰을 끄고는 벌떡 일어난다.

"...? 왜 그래요?"

"어..? 아냐, 그냥.. 씻을려고"

그녀가 어색하게 일어나서는 스마트폰을 쥐고 욕실로 향한다.

..꽤나 많은 상황에서 호감을 사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스마트폰 화면을 내게 보이고 싶지 않은 듯하다.

난 그냥 그대로 누워서, 약간의 의아함을 품은 채로 TV를 켠다.

(아니 형님! 맨날 지각하셔놓고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

(내가 맨날 지각하는건 아니잖아~ 진짜 너무한다 니들)

채널을 조금 돌리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옛날 예능 프로그램이 나온다.

착잡함과 의아함, 미안함 등의 감정은 잠시 넣어두고, 저 네모난 화면 속에서 항상 웃으며 능청스럽게 행동하는 이들을 본다.

샤워기의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나도 자세를 편하게 고쳐눕고는 TV를 보는 데에 집중한다.

(아 좀 뒤로 가라고! 카메라에 나 안 잡히잖아)

(어차피 말도 안 하면서 뭘 자꾸 카메라에 잡힐라 그러냐? 그냥 거기 있어)

근데 이 시간대에 이렇게 옛날 편 다시보기를 틀어주곤 하나?

요새는 TV보다는 유튜브를 더 많이 보니까... 잘 모르겠다.

(야 야 야! 뚱뚱보들 말하는 거 아무도 관심 없으니까 닥쳐!)

(아이 참, 저쪽 말도 좀 들어보고...)

그냥, 옛날부터 즐겨보던 그 예능을 보며, 유진 씨가 샤워실에서 언제 나올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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