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2
“……그렇게 해서 남성성과 여성성 두 가지를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보다 유리하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끝낼까요?”
첫 수업부터 진도를 나가는 양심 없는 판단에 강의실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아있지만, 나는 교수의 배려심 없는 강의 덕분에 옆에 있는 지은이에게서 잠시라도 눈길을 돌릴 수 있었다.
학생들이 교수의 마지막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한시라도 빨리 저 무자비한 교수에게서 도망가고 싶겠지..
허나 지은이는 짐을 챙기지 않는다. 내가 먼저 에코백에 노트북을 집어넣으며 나갈 준비를 한다. 지은이에게 슬슬 비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래, 아직도 지은이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노트북의 키보드를 두드리며 필기를 이어나간다.
지은이의 친구들처럼 보이는 이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야, 한지은! 뭔 첫날부터 공부야? 빨리 가자.”
그들을 쳐다보지 않으려 턱을 괸 채로 교수가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제 곧 내 뒤에 다가온 저들이 지은이를 데려갈 것이다.
“응, 오늘은 너희들 먼저 가.”
..지은이가 필기를 이어나간다.
“아니, 뭔 소리야? 빨리 가자~”
이번에는 다른 이가 지은이를 재촉한다.
“응, 너희들 먼저 가.”
잠시 아무런 대답도 오고 가지 않고, 정적이 흐르며, 그저 키 패드를 씌운 지은이의 노트북 키보드의 투박한 소리만이 이어질 뿐이다.
..저 친구들이 나와 지은이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음이 느껴진다.
“아.. 알았어, 다음에 보자!”
지은이의 단호하고도 기계적인 대답에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그들이 먼저 의견을 굽히고 교실에서 빠져나간다.
이제 교실에 남은 건 나와 지은이, 그리고 교수님뿐이다.
“..지은아, 이제 슬슬 비켜줘.”
투둑, 툭 투두둑,
그저 지은이의 타자 소리만이 계속된다.
“지은아, 이제 슬슬 가자.”
탁!
지은이의 노트북이 닫히며 꽤나 큰 소리를 낸다.
“선배, 오늘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까요?”
지은이가 드디어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지은아, 아까 말했지? 여자친구 있어서 힘들어.. 그런 거에 꽤 신경 쓰는 애라서, 미안하지만 그냥 혼자 먹을게.”
“..그래요! 그렇구나!”
지은이가 자기 가방을 무릎 위에 얹어놓고는 말을 이어나간다.
“선배, 또 이상한 여자한테 당하고 있죠?”
“응, 웬 이상한 여자애가 비켜주질 않아. 지금쯤 점심 메뉴 주문은 끝냈어야 다음 강의에 안 늦는데 말이지.”
“..미안해요, 저도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이렇게라도 말해야겠어요.”
지은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 본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선배, 그런 거죠? 누가 또 괴롭혀서 어쩔 수 없는 거죠?..”
“아니, 이번에는.. 하..”
지은이의 눈물이 선을 그리며 떨어져내린다. 그녀의 다른 한쪽 눈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것을 보니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선배, 제가 도와줄게요. 경찰에 신고해요. 네?”
“..지은아, 그런 거 아니야.. 잘 사귀고 있어.”
교수님이 우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챘는지 우리를 애써 모르는 체하며 밖으로 나간다.
“거짓말, 거짓말..”
지은이가 눈물을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지, 그 예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서러움과 슬픔을 잔뜩 토해낸다.
“거짓마알..”
지은이가 책상 위에 엎드리고는 잔뜩 웅크린 몸으로 계속해서 울음을 쏟아낸다.
“거짓말이야아..”
후우..
답답한 상황 속에 과열되어버린 머리를 쓸어넘기며 주위를 둘러본다.
텅 빈 강의실 안에서, 지은이의 울음이 메아리치듯 울려 퍼진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내 옆에서 가슴 아프게 울어대는 여인을 그저 가만히 앉아 기다린다.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그저 이렇게 앉아 기다린다.
오늘은 아무래도 점심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다.
여인의 울음소리는 잦아들고, 움츠린 채로 잔뜩 떨던 그녀의 몸도 다시 얌전해진다.
“..지은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지은아, 미안해.”
지은이가 드디어,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 어여쁜 얼굴이 눈물자국에 망가지고, 부드러운 머릿결은 잔뜩 헝클어져 엉망이 되었다.
나 같은 인간이 지은이에게 이런 아픔을 준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기다릴게요.”
그리고, 지은이가 아직도 나를 포기하지 못했음에 가슴이 미어진다.
“저, 계속 기다릴게요..”
“제발 기다리지 마. 너처럼 착하고 예쁜 애는 분명 나보다 훨씬 멋진 사람 만날 수 있어.”
“선배,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지은이가 웃는다.
눈물로 얼룩진 그 서글픈 얼굴에 미소가 걸리자 쳐다보기 힘들 만큼 날 힘들게 만든다.
“저, 기다릴게요. 점심 못 드시게 해서 죄송해요. 나중에.. 여자친구분한테 물어봐주실래요? 후배랑 같이 점심 한 끼 먹어도 되냐고..? 허락해주시면 제가 밥 살게요.”
“허락 안 할 거야. 기대하지 마.”
“..기다릴게요.”
지은이가 그 작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짐을 챙겨 일어난다.
“행복한 연애 하세요.”
그 마지막 말을 뒤로하고 강의실 밖으로 서둘러 뛰어나가는 지은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제는 완전히 텅 비어버린 강의실 안에서.. 얼마 남지 않은 공강 시간을 마저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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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의 말처럼, 우리 몸 속 안에는 우주 진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여러분 몸 속에 있는 모든 원소 하나하나는 오래 전 폭발과 함께 사라진 먼지 한 조각입니다. 그래서 천문학에서는 인간을.. ‘생각하는 별 먼지(stardust)’라고 부릅니다.”
내 전공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교양 과목을 가만히 듣고 있다. 졸업 요건을 채우기 위해 선택한, 평점과 수강생들의 평가를 고려해 고른 천문학 과목,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
이렇게 비참하게 남들에게 상처를 주고, 본인 또한 상처를 입으며 연명하는 나 같은 인간이, 우주의 기적 같은 진화가 이루어낸 산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신님,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생각하는 별 먼지는, 왜 이렇게 힘든 일들을 겪으며 살아야 하나요.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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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기울며 이 아름다운 캠퍼스를 구슬픈 황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그것을 느끼며 천천히 정문으로 걸어내려간다.
어렴풋이 보이는 정문에, 쉴 새 없이 빠져나가는 많은 학생들의 인파 속에서, 가만히 서있는 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미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걸어갈수록 그 사람의 외형이 선명해진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들기 시작한다.
“오빠, 여기요!”
저 해맑게 웃으며 내게 뛰어오는 지민이를 어떻게 떼어내야할까?
왜 하필 아름답고도 위대한 원소들이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게 됐을까?
제발 차라리 누가 날 죽여주면 좋겠다.
다시 머나먼 우주의 별들이 되면 좋을텐데.
"계속 기다린 거지?"
"당연하죠~"
지민이가 팔짱을 껸다.
"아까, 내가 집적대지 말라고 한 것도 기억하지?"
"음... 그랬나?"
지민이가 내 팔을 흔들며 애교를 부린다.
"아이~ 그런 건 모르겠구~ 저 배고파요! 선배가 밥 사줘야죠!"
짝!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이의 뺨에 손을 댄다.
지민이가 놀란 듯이, 내게 맞은 뺨을 부여잡고는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날 쳐다본다.
그리고 지민이만큼이나 놀란 듯이 보이는 주변 사람들이 놀라며 나를 쳐다본다.
"나, 그냥 학교 안 다닐게."
"오.. 오빠, 무슨 소리에요?"
택시를 잡기 위해 길가에 서서 도로를 바라본다.
"오빠! 자.....잠깐만요!"
지민이가 내 옆으로 달려와서는 당황한 듯이 매달리기 시작한다.
"오빠, 갑자기 왜 그래요? 알았어요, 그만 할게요. 너무 반가워서 그랬어요. 네?"
택시 한 대가 온다.
빈 차는 아니다. 그냥 지나간다.
"오빠...? 오빠! 제가 미안해요, 네?"
이번에도 빈 차가 아니다. 그냥 지나간다.
"무시하지 말라고요...!! 제가 잘못했다고 하잖아요!"
곧 오겠지.
"어차피 못 그만둬요. 제가 오빠를 모를 것 같아요? 오빠는요, 절대로 자기 일 포기 못해요. 그런 사람이니까! 나약하고, 멍청하고, 소심하고, 우유부단해요. 알고 있죠?"
택시가 보인다. 빨간 불 때문에 저 앞 횡단보도에 멈춰있다. 빈 차이고, 날 봤으니 이제 곧 날 태우러 올 것이다.
"...그래요, 그래도 전 오빠를 사랑해요."
파란 불이 켜진다.
"오빠, 그런 미친 정신병자년이랑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절대 그렇게 못 살아. 오빠는 결국요, 질질 짜면서, 그 때 다른 애들이랑 사귈걸... 하면서 후회할걸요? 응?"
택시가 내 앞에 멈춰선다.
"씨발!! 대답하라고!"
지민이가 소리를 지른다.
택시 뒷자리 문을 연다.
지민이가 내 다리에 매달린다.
"아.. 아냐, 오빠! 제가 잘못했어요. 네? 제가 잠깐 미쳤나봐요... 오빠가 그런 년이랑 사귄다고 해서, 걱정이.. 걱정이 돼서!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택시기사와 눈이 마주친다.
"저.. 손님? 뒤에 다른 차도 많은데.."
"그.. 그래요! 오빠! 그냥 장난이었죠? 저도 그냥 장난 좀 친 거예요.. 네?"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다리에 힘을 주고는 지민이에게서 발을 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