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 상담사 이야기-56화 (56/96)

EP. 56

"씨발..씨발씨발씨바알! 개같은 년..."

차가운 물로 이 좆같은 기분을 아무리 씻어내려 해봐도 소용이 없다.

온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그 미친 년을 찢어죽이라고 말해대지만..

그럴 힘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서 더 좆같다.

미친년.. 나한테 지랄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짓만 저지르며 살아왔으니 다른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년 입장에서는, 자기 딸을 성장시키기 위한 발판이 나에 대한 집착 뿐인 것이다.

지가 했던 것처럼..

"하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 암담한 상황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그 씹년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정말 죽일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제시한 조건들을 부합시키면 분명 나중에 유진이가 더 큰 일을 저지른다.

다시 찾아가서는 다른 해결책을 제시할까?

다른 해결책이 있을까..?

차라리 유진이한테 몰래 털어놓고 같이 계획을 세울까?

그래, 그게 제일 현명한 방법일 것 같다.

나는 잘못이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충분히 어머님에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아냐, 만약 내가 유진이한테 말했다는걸 눈치라도 챈다면..

"씨이발.."

그 년이 내게 했던 말들이 내 뇌를 옥죄이는 감옥이 되어서는, 해결방안들을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

...없다.

"후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날 유도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에 끌려다니면 분명 비극을 피할 수 없다.

유진이를 자극시키기 위한 매개체로 나를 이용하려한다.

답답함에 분노가 치솟고, 억울함에 눈물이 고인다.

차라리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아가리를 바로 찢어놨어야 했는데..

너무 억울해서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분명히 조심히 살았는데, 신중하게 살았는데..

나라는 인간의 한계가 뼈저리게 느껴진다.

나를 파멸시키는 선택들 사이에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믿기질 않는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미약한 존재에게 어째서 이렇게 가혹한 운명을 주는 걸까..?

신은 분명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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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옥죄여온다.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이 그저 느낌인지, 누가 실제로 쳐다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리고, 정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두리번거리는 여인의 모습에 다시 마음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오.. 오빠!"

그녀가 내게 달려들며 껴안는다.

"오빠.. 진짜 안 오는 줄 알았어요..."

다시 만난 그녀를 보고 느끼는 것은,

소름끼치는 집착에 대한 공포도 아니고, 연락을 끊고는 도망간 것에 대한 미안함도 아니라,

...한 명은 채웠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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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도 안절부절 못하는 지민이와 함께 캠퍼스를 걷는다.

아직 수업 시작까지는 시간이 꽤나 많이 남아있다.

지민이를 사람이 최대한 없는 곳으로 데려간다.

"저, 오빠가 꼭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요! 맨날 정문 앞에서 기다렸어요.. 지, 진짜로 미안해요! 저 이제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차단이라도 좀 풀어줘요. 네?"

고민한다.

내게 매달리는 이 여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고민한다.

"제가 말이 너무 심했던 것 같아요.. 잘못했어요, 네..?"

..어떻게 해야 지민이가 유진이에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여자친구로 지내지 않으면서도 나와 섹스를 할까?

어떻게 해야 뒤탈 없이 여러 명과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이것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에 역겨움이 올라오지만, 어쩔 수 없다고 나 자신을 달래며 머리를 굴린다.

유진이는 내가 집에 늦게 들어가거나, 다른 이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면 분명 의심할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쓰레기같은 엄마가 원하는 것이다.

집에는 평소처럼 들어가면서도 연락은 하지 않게끔..

그래..

"니 말이 맞았어.. 유진이 걔는.. 그냥 미친 년이야..."

지민이에게 동정을 유도한다.

"너무 힘들어서 못 버티겠어..."

지민이를 내 쪽에서 와락 끌어안는다. 그녀가 화들짝 놀란다.

"오.. 오빠?"

"잠깐만 이대로 안고 있게 해줘.. 부탁할게.."

지민이의 손이 천천히 내 등을 감싸는 것이 느껴진다.

당황한 듯이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그녀의 몸짓 또한 느껴진다.

다시 그녀를 밀어내고는 뒤로 돈다.

"미안해, 너한테 밖에 말 할 사람이 없더라.. 그냥 잊어줘."

"오빠.. 괜찮은 거예요? 씨발.. 그 새끼가.."

지민이가 내 팔을 붙잡고는 이를 바득바득 갈아댄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뒤 땅바닥을 쳐다본다. 힘이 없고 시무룩한 모습으로 지민이의 보호욕구를 자극하며, 내 말의 논리적 허점과 빈틈을 그녀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끔 유도한다.

"아냐, 괜찮아.. 그냥 잊어줘. 나도 내가 왜 이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앞으로 연락은 하지 마. 유진이가 어떻게 나올 지 모르니까.."

"오빠,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해봐요. 제가 도와줄게요."

"됐어. 그냥.. 그냥 나한테서 좀 멀어지면 안될까? 그냥 제발 잊어주라. 분명히 위험해져. "

"아.. 아뇨!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어떻게든 도와드릴게요. 제가 잘못한 일들이 많으니까.."

다시 고개를 젓는다.

"아니, 난 너한테 화 안 났어. 다 용서했고. 그냥.. 나 잊고 편하게 살아."

그대로 걸음을 옮긴다.

이제 곧 지민이가 내 뒤에서 나를 껴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껴안은 후에 날 보낼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오빠아..."

지민이가 날 따라와서는 뒤에서 껴안는다.

"나 오빠 없이 못 살아요.. 이대로 절대 못 보내요. 절대.."

좆같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린다는게 너무 좆같고 역겹다.

이제 다시 약한 모습을 내비쳐야한다.

"제발.. 니가 이러면 자꾸 흔들린단 말이야.."

눈물이 나온다.

연기에 진실함을 더하려고 일부러 흘리는 것이 아님에도 눈물이 나온다.

내 내담자였던 아이를, 이렇게 역겨운 일에 끌어들여야 하는 현실에 눈물이 나온다.

그래도 알고 있다.

이 눈물이 지민이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지민이가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나와 마주선다.

내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고는 지민이도 울먹거린다.

"우리 오빠.. 어쩌다가 이렇게..."

그렇게 총명하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듯 가지고 놀던 지민이가, 자신이 연모하는 이의 눈물에 그 지적인 면모를 잃어간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지민이가 나를 끌어안는다.

나는 그저 가만히 선 채로 그녀의 포옹을 받아들인다.

"오빠아..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나를 향한 그녀의 동정심이, 아무것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로 이어진다.

"지민아.. 제발 놔 줘..."

그러나 그녀를 밀어내지 않는다.

"불쌍한 우리 오빠.."

지민이가 훌쩍인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한적한 길이라 하더라도 몇몇 이들이 지나다닌다.

그들이 우릴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민아, 나는 너랑 더이상 만날 수가 없어..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야.. 유진이 성격 알지? 이제 제발 나 좀 잊어주라.."

"오빠는 어떡해요. 그러면 오빠는 어떡하냐구요.."

"...모르겠어."

지민이를 끌어안는다.

...이제 마지막 몇 마디만이 남았음을 알고 있다.

그 말들을 내뱉기 전에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나를 도와주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날 지옥에서도 가장 뜨거운 곳에 처박겠지.

이미 나를 둘러싼 세상의 부조리와 불합리에는 익숙해진지 오래이니 그저 담담히 받아들인다.

유진이가 미쳐가는 꼴을 보고 싶지도 않고, 지민이가 내 진심 없는 사랑에 상처받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 정말 모르겠다 지민아..

니가 날 사랑하게 된 것도, 상담을 맡게 된 것도, 누나와 니가 싸웠던 것도, 날 찔렀던 것도, 묶어놓고 강간을 한 것도, 내가 널 용서한 것도, 니가 날 대학까지 따라온 것도,

어느 하나도 난 더이상 알 수가 없다..

"...지민아. 이럴수록 난 자꾸 널 의지하게 된단 말이야.."

"오빠, 저한테 기대셔도 괜찮아요. 전 항상 오빠 편이에요.."

날 둘러싼 이 세상이 미쳐가는 건지, 내가 미쳐버린 건지,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이런 벌을 받고 사는 건지,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건지,

"..그러면, 나.."

왜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건지, 왜 아무도 날 구해주지 않는 건지,

왜 나는 아무런 힘이 없는 건지, 왜 그 미친년은 그렇게도 높은 위치에 있는 건지,

"가끔 너무 힘들 때.."

...어쩌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되어버린 건지..

"너한테 조금 기대어도 될까..?"

"...당연하죠, 오빠아.."

지민이에게 얼굴을 천천히 들이민다.

무슨 뜻인지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도 내 목덜미에 손을 얹으며 나를 받아들인다.

우리 둘의 입이 맞닿고, 잠시 뒤엔 혀가 뒤섞이기 시작한다.

근처엔 다행히 아무도 없는 이 한적한 벤치 위에서 지민이를 기어코 이 일에 끌어들인다.

"..유진이가 알면 안 되는데.."

"괜찮아요. 저희, 학교에서 만날 때만.. 하면 되니까.."

이번에는 지민이가 내게 입술을 들이민다.

그것을 받아들인다.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내 인생도, 유진이와의 사랑도, 지민이와의 관계도, 평범한 일상도..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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