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 상담사 이야기-57화 (57/96)

EP. 57

대학에서의 생활은 아주 개같다. 공부에 집중하려 하고는 있지만, 날 향한 다른 이들의 시선과 날이 선 차가운 공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변명을 할 수도 없고, 대학에 나오지 않을 수도 없다.

그래, 내가 쓰레기같이 여자애들 울리고 다니는 발정난 복학생처럼 보이겠지.. 나도 이해한다. 내가 저들의 입장이었어도 나 같은 놈은 피했을 테니까.

그래도 개같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날 경멸하는 저들을 저주하고, 이 좆 같은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나를 저주한다.

“자, 여기까지만 하고 끝내죠. 오늘 수업도 수고하셨습니다.”

교수의 말이 끝나길 간절히 빌고, 끝나는 즉시 곧바로 일어나 도망치듯 강의실을 떠난다.

그 비좁은 공간에서 내게 눈치를 주는 듯한 수많은 다른 이들을 견딜 수가 없다.

넓고 탁 트인 바깥 캠퍼스에서 숨을 고르며 악에 받치는 마음을 애써 달랜다.

그리고 나를 도대체 어떻게 찾아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의가 끝날 때마다 지민이가 달려와서 날 끌어안는다.

“오빠, 기다리고 있었어요! 벤치에 앉아서 좀 쉴까요?”

강의실에서 나오는 다른 이들이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하니, 지민이를 데리고 벤치로 향해 잠시 앉아있는다.

“지민아, 너 강의는 제대로 듣고 있는 거 맞지?”

“당연하죠~ 그냥, 오늘은 수업이 없어서 그래요.”

“..그러면 지금까지 뭐 하면서 기다린 거야..?”

“그냥, 오빠 생각!”

지민이가 웃는다. 그 해맑은 웃음과 함께 내뱉는 비정상적인 사랑에 나도 실소를 터뜨린다. 내가 제대로 상담을 끝마칠 수 있었더라면, 지금쯤 내 눈 앞의 소녀는 분명 즐거운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 기다려줘서 고마워.”

지민이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포옹을 선물한다.

“헤헤…”

지민이가 품에 안기는 게 기쁜지 헤실헤실 웃는다.

지민이를 안은 채로 생각한다.

언젠가 지민이와 유진이가 부딪힐 때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한다.

아냐, 어쩌면, 들키지만 않게 하면 내가 해결할 필요도 없다.

..하, 아냐.. 너무 멍청한 생각이야.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 보면, 유진이한테 들키지 않는다고 가정해도 지민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이랬으니, 분명 지민이와의 관계를 끊어낸다고 해도 어떻게든 유진이를 찾아와 난리를 피울게 뻔하다.

“오빠, 무슨 생각 해요?”

“..니 생각.”

지민이가 다시 웃는다.

그래.. 지민이는 유진이가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찾아와서 난리를 피우는 미친 짓은 못 할 거야..

적당히 맞춰주다가 끊어내면 될 거야..

분명 날 붙잡겠지만, 유진이를 오히려 방패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아직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남아있다. 지민이에게 성급하게 다가서면 안 된다. 나중에 분명 곤란해질 테니.

“나 이제 슬슬 집에 가야할 것 같아.”

“아.. 벌써요?”

지민이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리고 곧바로 어두워지는 표정을 관찰한다. 날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 하는 그녀의 감정 뒤에는, 유진이를 향한 분노와 질투가 자리잡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민이는 유진이를 두려워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날 보내줄 수밖에 없다.

“..내일도 또 만나요!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와요.. 정문까지는 같이 가도 괜찮죠..?”

“당연하지.”

지민이가 신이 난 듯 팔짱을 낀다. 그리고 날 보내야 한다는 걸 자각하자 다시 시무룩해진다.

그녀의 감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보며 천천히 걷는다.

이번에 헤어질 때에는, 칼에 찔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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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곧 유진이와 만나야하니,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른다.

쉽사리 걸리지 않는다. 아니, 분명 걸리지 않는다.

아무런 증거도 없고, 나는 유진이를 똑같이 사랑한다. 분명 걸리지 않는다.

‘지민이와의 키스도 잊고, 어머님의 협박도 잊자.‘

내 행동이 그 일들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계속 찍어누른다.

“학생!”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는 영롱한 소리와 함께 멈춘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날 부르는 경비원 아저씨를 쳐다본다.

“이거, 학생 여자친구가 보낸 거 아니야? 아까 전에 와서는 건네주라던데?”

..아저씨의 손에 들린 그 파란 통을 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는 아저씨를 향해 걸어간다.

“..이거, 언제 와서 주고 갔어요..?”

“아니, 학생 꺼 맞지?”

“네, 맞아요.”

“그래, 자! 아니 직접 주면 되지 이런 걸 왜 나한테 전해달래? 이벤트, 그런 거야? 참.. 풋풋~하구만.”

아저씨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 서늘한 파란 리스테린 통에 신경이 꽂힌다.

“아저씨, 이거 언제 와서 주고 갔냐니까요.”

“어? 얼마 안 됐는데? 오 분 전쯤에?”

오 분 전에..

“네, 감사합니다.”

리스테린 병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것에 적혀있는 두 단어가 누나를 떠올리게 만든다.

[미안해, 사랑해.]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아까 전에 이미 1층으로 내려와 있던 턱에 이번에는 곧바로 문이 열린다.

우리 집 층수를 누르고, 문이 닫히기를 기다린다.

안내음성이 문이 닫힌다고 친절하게 얘기하고는 문을 닫는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포스트잇을 꺼내어 갈기갈기 찢는다. 그것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기억들도 포스트잇을 찢어버리며 애써 지워내고자 한다.

분명 보호조치를 취해달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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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분명 저희 집까지 왔다가 갔다니까요? 벌써 두 번째입니다.”

“(에.. 우선 진정하시고.. 저희 쪽에서 해드릴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접촉을 한 것도 아니고, 또 피해자 분에게 해를 끼치려고 한다는 그런 증거도 없고..)”

그래, 나와 통화를 하는 이에게서 스마트폰 너머까지 들려오는 귀찮음과 한심함이 느껴진다.

남자새끼가 여자한테 쫄아서는 뭘 이리 벌벌 떨면서 보호해달라고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경찰의 목소리에 그저 한숨 섞인 웃음만 나올 뿐이다.

“예, 감사합니다. 그냥 조용히 살겠습니다.”

경찰관의 말을 끊고 마지막 말과 함께 전화를 끊는다.

유진이에게 말하면..

아냐, 유진이에게 말하는 순간 누나를 찾고 날 보호하기 위해서 내 주위에 사람들을 붙인다.

그러면 지민이를 만날 수도 없고, 어머님은 사람들을 죽인다.

쇼파에 앉아 버릇처럼 틀어놓은 옛날 예능 프로그램을 멍하니 보고 있다.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은 텅 빈 집 안에서, 씁쓸함만을 안겨주는 통화의 여운을 느끼며 그저 멍하니 TV를 바라본다.

(아 그냥 빨리 끝내! 이 형 결혼이 무슨 상관인데!)

(넌 뭔데! 넌 뭔데!)

저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곤 하지만, 오늘은 다른 것 같다.

날 괴롭히는 수많은 것들이 잠시라도 편해지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

현관문 근처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유진이와 엄마, 둘 중 한 명이겠지만, 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누나의 모습이 연상된다. 내 눈앞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던 누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현아?”

호흡이 부자연스러워지고, 식은땀이 새어 나온다. 날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할 수가 없다.

“지현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유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조금씩 긴장 상태가 풀어지기 시작한다.

“…누나.”

“그래, 누나 여기 있어..”

유진아, 너는 왜 하필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거야?

돌이킬 수 없는 상황들이 내 다리를 붙잡아 끌어내리고, 내가 대응할 수 없는 문제들에 이리도 고통받고 있는데,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명,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나도 알고 있어.

너는 내가 아니면 절대 사랑하지 못해.

다른 수많은 이들은 너를 미쳤다고 말하고, 잔혹하고 잔인한 년이라고 말하지만, 내 곁에 있는 너의 모습은 그저 한없이 아름다운, 사랑스러운 여인일 뿐이야.

나라는 사람이, 우리 집이라는 터전이, 셋이 함께 지내는 이 관계가 너의 유일한 버팀목이라는 걸 알고 있어.

그동안 네가 겪지 못했던 일상의 행복과 화목한 관계를 꿈꾸게 만든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 꿈은 분명히 곧 깨지고 말겠지.

"그냥, 너무 무서워.."

유진이에게 안긴다. 유진이도 나를 안아준다.

"무서워하지 마, 내가 옆에 있잖아.."

그런 게 아니야..

유진아,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게 두려워.

내 나약함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쌓아올린 업보들이 너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는 게 두렵단 말이야..

유진이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나 자신의 모순적인 감정에 점점 속이 썩어 문드러져간다.

감당할 수 없는 미래가 날 옥죄이고 있음을 느낀다.

거친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인간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산 같은 파도에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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