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61
애를 태우며 기울어 가는 진한 노을빛 아래 이 벤치에서, 수정 씨에게 달콤하고도 역겨운 제안을 던진다.
날이 저문다. 몇 시간 후면 어둡고 차게 식을 이 세상 속으로 그녀를 같이 끌어내린다.
내 양심의 가책이, 몸부림치는 도덕성이, 튀어나오려 하는 인간성이 그녀를 향해 미안하다고 소리치고 있다.
“…”
수정 씨와 아주 오랫동안 눈을 맞대고 있다.
“저, 정말..이에요?”
“네.”
“장ㄴ.. 장난하시는 거..죠..?”
“아뇨, 수정 씨가 원하신다면..”
이를 꽉 깨물며 억지로 미소를 짓는다. 끝까지 나의 책임을 최소화하고,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그래야 쉽게 떼어낼 수 있음을 아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강하게 흔들리며 고뇌한다.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자신이 사회적으로 규탄받는 비도덕적인 행위에 동참한다는 것을..
“진짜..요..?”
“저희가 비록 상담으로 만난 관계이긴 하지만, 저도 수정 씨에게 호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상담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고 몇 번 정도.. 성행위를 나눠도 괜찮습니다. 물론, 저는 여자친구가 있으니 저희의 관계를 바ㄹ..”
“네..! 해.. 해요! 해주세요..!”
그녀가 도리어 내 손목을 붙잡는다.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인다.
“그.. 그렇게라도..”
그녀의 적극적인 승낙이 가슴을 찢어버릴 것마냥 파고든다. 내 말을 기어코 받아들이는 그녀의 어리숙함과 절박함, 정신적인 결핍..
“..그러면,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만 하고 일찍 끝낼까요? 내일 다시 만나요.”
그녀에게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작별인사를 건넨다. 내 미소가 그녀에게 더없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날 마치 구원자인 것처럼 바라보는 그녀의 눈물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킨다.
“..내일은, 상담실 말고 밖에서 따로 만나는 게 좋겠죠?”
“ㄴ..네에..”
날 올려다보는 저 눈.
“제가 수정 씨네 집 근처로 갈게요.”
“아.. ㄴ, 네..!”
“어디에 사는지 알려주시겠어요?”
“자.. 잠시만요..”
그녀가 허둥대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어 켠다.
“아뇨, 근처 역 이름만 말해주시면 돼요. 수정 씨 집 근처 역 앞에서, 오후 4시에 만나요. 알았죠?”
최대한 차분하게, 최대한 인자하게 느껴지도록, 배려심이 가득 담기도록..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고 쓰다듬는다.
살며시 웃는다.
그녀가 내게 빠져들도록.
“네..에..”
수정 씨가 날 바라본다.
마치 자신에게 찾아온 천사를 보는 것처럼, 감동을 받은 듯 보이는 그녀의 두 눈,
사이비 종교에 빠진 멍청한 이들의 멍한 듯 보이면서도 확신과 믿음이 빽빽이 들어찬 눈,
그녀에겐 내가 무엇으로 보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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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찍 왔네?”
유진이가 현관까지 다가와서는 내 짐을 받아준다.
“..응! 내담자분이 일찍 오셔서 일찍 시작했거든.”
싱긋 웃는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 지민이와 수정 씨의 일을 욱여넣는다.
“..그 내담자 사진이라도 보여주면 안 될까..?”
침착함과 자연스러움.
“씁! 상담은 비밀 보장이 최우선인거 알면서.”
“그래도오..”
유진이의 삐죽 삐져나온 입술에 입을 맞춘다.
“엄마, 나 왔어!”
“어, 그래~”
짧은 인사를 마치고 다시 TV에 시선을 돌리는 엄마를 내버려 두고, 유진이와 함께 방으로 향한다.
“너도 일찍 왔네?”
“응, 좆같아서 그냥 짐 챙겨서 왔어.”
“그래도 되나?”
“몰라.”
“많이 힘들었어?”
코트를 벗는다. 옷걸이를 하나 꺼내어 코트를 구겨지지 않게 잘 정돈한 다음 옷장으로 다시 넣어놓는다.
“별로. 그냥 그 년 얼굴 보기 싫어서.”
“응, 그래..”
니트 티를 벗고는 다시 팔을 빼어 갠다. 유진이가 내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고는 가슴을 감싸안으며 등에 기댄다.
“이렇게 일 하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야. 밖에 있다가 이렇게 우리 둘이 다시 집에서 모이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니까..”
“그래, 근데 나 아직 안 씻어서 냄새나니까 좀 놔주라.. 씻고 오면 안아줄게.”
“흐응.. 꼴릿한 냄새가 나긴 해. 어머님만 아니었어도 그냥 확!”‘
유진이가 목덜미 바로 뒤에서 킁킁거리며 내 가슴을 움켜쥔다.
“됐고, 뭐 먹을지나 골라둬. 나 씻고 나오면 바로 시키자.”
“떡볶이!”
“떡볶이를 저녁으로?”
“응!”
“여자들은 왜 그거에 환장하는지 모르겠네. 나중에 졸업 논문으로 써볼게.”
뒤로 돌아 유진이의 이마에 입을 살포시 맞추고 갈아입을 속옷을 챙긴다.
“그냥 지금 미리 시켜. 6시 넘어서 시키면 너무 오래 걸리더라. 금방 씻고 나올게.”
“응~”
“엄마한테 말은 했지?”
“아, 맞네?”
유진이가 엄마를 찾으며 쇼파로 달려가 눕는다.
엄마의 허벅지에 머리를 올리고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유진이와, 그런 유진이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애틋하게 웃는 엄마..
"일단 치즈하고, 계란도 넣고.. 또 뭐 넣을까요?"
"비엔나 소세지가 빠지면 안돼! 고기는 무조건 들어가야지."
"넵! 다 추가했어요! 음료수도 시킬까요? 콜라?"
"콜라지~"
둘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본 뒤에 욕실로 향한다.
바닥이 차갑다. 그 차가움을 얌전히 받아들이며 좁아터진 욕조 안으로 들어간다.
욕조 위로 길게 연결된 샤워기가 날 내려다본다.
눈물이 삐질삐질 새어나온다.
급하게 샤워기를 틀고 욕조 바닥으로 물을 떨어뜨린다.
애써 참아보려했던 죄책감과 공포가 내 몸을 가득 메우며 요동친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용서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어머님의 협박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나는 어쩔 수 없었기에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이다. 유진이에게 들키지 않고 잘 끝내면 된다.
하지만 눈치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님은 내가 유진이, 지민이, 수정 씨.. 셋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성공시켜낸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 계획을 내 눈앞에 들이밀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분명 날 더 지옥으로 떨굴 것이다.
그 결과는 유진이의 타락이고, 나의 절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내 주변 이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서도 제정신으로 남아있을 자신이 없다.
그 미친 년의 사형선고를 그저 잠시라도 미루기 위해, 내 인간성을 하수구로 흘려보내면서까지 발버둥을 친다.
혹시라도 울음이 들리지 않도록 이를 꽉 깨물고, 눈물과 사워기의 물만을 흘려보낸다.
제발 이 행복과 일상이 깨어지지 않길 간절히 기도한다.
신이 있다면, 정말 존재한다면, 제발 나와 내 가족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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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흐으읏..”
지민이와 내 입을 잇는 실 같은 침이 툭 끊어진다.
어제 유진이와도 나누지 못했던 진한 키스에서 느껴지는 배덕감..
“괜찮아요. 학교에서만큼은 저한테 기대세요. 제가 다 잊게 해드릴 테니까..”
지민이가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날 위로하며 다시 입술을 들이민다.
아냐, 너는 아무것도 몰라..
그렇게, 남들의 시선을 피해 구석진 곳에서 서로의 혀를 맞대고 있다.
“오빠, 이제 슬슬 갈까요? 키스만 해도 좋긴 한데, 밥은 먹어야죠!”
지민이가 키스를 끝낸 뒤 다시 한번 내 입술에 짤막한 입맞춤을 하고는 내 손을 이끌어 교직원 식당으로 향한다.
“그래서, 언니가 눈치 챘어요?”
“으응.. 아직 모르는 것 같아.”
“진짜요? 다행이다! 요새는 사람들 안 쓰나봐요? 전 이제 슬슬 잡혀갈 줄 알았는데!”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입에 담는 지민이를 이해할 수 없다.
“..지민아, 넌 안 무섭니?”
“무서워요. 진짜로..”
“근데 어떻게 그렇게 당당한 거야?”
“오빠가 제 옆에 있잖아요! 지금 칼 맞고 죽는다고 해도, 옆에 오빠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이렇게 동등한 관계로 오빠 옆에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하답니다..”
뒤틀리고 비틀어진 소녀의 애정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내가 이렇게 만든 것이라는 죄책감 또한 뼈저리게 느껴진다.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일까?
소연 누나와 사귀기로 해서? 아니, 과제를 진심을 담아 써내서? 아니면 어머님의 충격적인 죽음 때문에?
아냐.. 다시 생각해 보면, 상담이라는 길을 택한 나의 잘못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그래도.. 저희,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같이..”
지민이가 쑥쓰러운 듯이 시선을 떨군다.
“모텔..이라도..”
지민이가 드디어 내게 한 단계 위를 바란다. 그토록 바라던 그녀의 요구를 우선 거절한다.
“지민아, 그건 힘든거 알잖아.. 너, 만약 나랑 모텔까지 가잖아? 들켰을 때 어떻게 될지 몰라?”
“저도 알아요! 아는데.. 상관없어요! 아프게 죽는 것도 상관없어요. 오빠 옆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다른 년이 비벼대는 거 상상만 하는 게, 그게 저한테는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단 말이에요.. 모르시겠어요..?”
지민이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내게 간절히 애원한다.
“네..? 오빠랑 섹스라도 하면서 지내게 해주세요. 네? 제발요..”
지민이가 매달린다.
"..일주일에 딱 한 번 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