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78
결박된 내 몸 위에 유진이가 살며시 올라타고는 내 입을 틀어막는다.
"지현아. 내 말 좀 들어.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일인거 알지?"
내 대답을 의도적으로 봉쇄한 그녀가 다른 수행원들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보내고는, 그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응? 자꾸 쓸데없는 년들 생각만 하면서 짜증나게 하면 내가 어떻게 해야겠어?"
"으읍!"
입에서 손을 떼어내려고 머리를 흔들지만, 그녀가 머리를 고정시키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간다.
"나 진짜 많이 참았거든? 너도 좀 참을 수 있잖아? 너도 성인이야. 알지?"
유진이가 다시 내 입을 자유롭게 놓아준다.
"할 말 있어?"
"많아. 우선 이거 당장 풀어. 더 이상 이런 짓 하면 진심으로 화낼 거야."
"하아.. 미치겠네."
유진이가 내 몸 위에서 이마를 찡그리며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응? 왜 내 마음을 이해를 못 하는 거야... 내가 도와주려는 거잖아!"
"도와줘? 이게? 진짜 도와주고 싶었으면 수정 씨를 잡아다가 고문하고 나를 이렇게 꽉 묶어두는 게 아니라, 경찰에 신고하고 병원에나 데려갔어야지!"
나도 그녀에게 화를 내며 맞받아친다.
허나 유진이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점점 격앙된 목소리로 악을 쓰기 시작한다.
"또 그년 이름을 꺼내네? 몇 번 떡 좀 쳤다고 그새 떡정이 들었나? 지금까지 바빠서 제대로 못 놀아줬는데, 오늘 그년은 뒤지는 줄 알아. 아예 죽여버려야 잊겠네. 그치?"
"제발 그만 좀 해!!"
목에 핏줄이 서고 머리에 집중된 혈류가 얼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든다.
그동안 담아둔 분노와 걱정과 두려움이 지금 이 순간에 어지러이 뭉쳐져서는 입 밖으로 내뱉어진다.
"그냥 제발 예전처럼 지내자고..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니가 하는 짓들은 죄다 싸이코패스나 다름없다고. 알아?"
"후우..."
유진이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쉰다.
"제발 예전처럼 지내자. 응? 유진아.. 다시 우리 집으로 가자.."
"아냐.. 이미 너무 멀리 왔거든."
"아니, 아직 안 늦었어. 제발 우리 집으로 가자. 다시 천천히 시작하자."
"니가 너무 멀리 왔다고."
유진이가 내 볼을 손으로 붙잡는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진짜 많이 참았거든? 근데 일어나서 하는 꼬라지가 마음에 안 든다고! 창녀 새끼들이랑 놀러 다니더니 대가리에 그년들 생각밖에 없는 거잖아? 응?"
"놀러 다녀..?"
유진이의 말에 나도 진심으로 화가 나기 시작한다.
"놀러 다녔다고? 이런 미친... 니네 엄마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도 그런 말이 나온다는 거지?"
"아니, 니가 지금 하는 짓거리들을 보고 이런 말이 나오는 거야. 왜 그런 년들을 자꾸 신경을 써?"
"사람인데 신경을 안 써? 너한테는 벌레만도 못할지 몰라도 내 눈에는 사람들이야. 아무리 밉고 죽여버리고 싶어도 우리가 지켜야 하는 선이 있는 거라고!"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오늘부터 시작하자."
내 눈에 안대가 씌워진다.
"뭐하는 거야?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유진아, 제발 정신 좀 차려어.."
내 몸 위에서 느껴지던 유진이의 무게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오른쪽에서 유진이의 발소리가 들린다.
"사람이 동물이랑 다른 점이 뭘까?"
"유진아.. 그래, 화 내서 미안해. 하지만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제발 그것만 알아줘. 아직 늦지 않았어. 제발 예전처럼 다시 행복하게 지내자.."
"예전처럼 다시 행복하게 지내려고 이러는 거야. 다시 말해줄게. 사람이랑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뭘까?"
"몰라! 모른다고! 제발 이거나 좀 풀라고!"
"물에서 건져올린 상어 눈을 가려놓으면 미쳐 날뛰던 상어가 얌전해지고, 강제로 붙잡은 사자 눈에 안대를 씌워놓으면 흥분하지 않아."
"유진아.. 제발 좀 풀어.."
"근데 너무 웃긴건, 사람들 눈에 안대를 씌워놓으면 벌벌 떨면서 온갖 지랄을 다 떤다니까?"
"제발!! 좀 풀라고!!"
다시 내 몸 위에 유진이의 체중이 느껴진다.
그리고 내 얼굴에 그녀의 손가락이 느껴진다.
"왜 그럴까? 진짜 궁금해. 우리 지현이는 심리학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알려나?"
"유.. 유진아, 제발 그만 둬. 난 아직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제발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줘.. 제발.."
"거기에다가 말이지! 다른 감각들까지 지우면 무슨 일이 있을지 생각해본 적 있어?"
유진이가 나를 어루만지며 계속해서 말을 한다.
"안대만 씌워도 발작을 하는데.. 어두운 곳에 눕혀만 놔도 심심해서 미치려 하는데..."
"유진아. 제발 예전처럼 돌아가자. 응? 우리 좋았잖아.."
"아직 몸은 회복중이니까 어떻게 해야 몸이 안 상하고 머릿속에서 더러운 년들 생각만 지울지 되게 고민 많이 했거든!"
"제발 내 말 좀 들으라고!"
"지현아. 니가 내 말을 들어야지. 계속 설명할 거니까 닥치고 들어."
내 입에 무언가가 채워지고, 입 밖으로 내뱉는 소리가 뭉개져서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으읍..."
"얌전히 누워있는게 싫다 이거지? 나한테 그렇게 짜증만 내고... 그래, 우리가 오래 사귀긴 했지. 다른 사람들 다 사귀면서 다툰다고들 하는데, 우리가 너무 안 다투긴 했어. 그치?"
"우으읍!"
"난 니가 화내는 모습도 귀엽고 사랑스럽거든? 근데, 내가 아니라 다른 개같은 년들만 생각하느라 나한테 화를 낸다는게 어이가 없어서 견딜 수가 없네? 나는 너만 생각하면서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니 머리 안에는 다른 여자들이 자꾸 비집고 들어가지?"
잔뜩 격앙된 유진이의 목소리가 내 귀를 찢어버릴 듯이 울려댄다.
"어!? 도대체 왜! 내가 어디가 부족한데? 그냥 다 잊고 살라고! 다른 년들은 전부 너한테 더러운 짓만 하잖아! 왜 그 새끼들을 그렇게 걱정하는데?"
얼굴에 그녀의 침이 튄다. 흥분한 채로 말을 내뱉는 그녀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냥 여기서 편하게 살라고! 멍청한 년들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나만 생각하라고! 그게 어려워? 이미 뒤진 년이랑, 구더기같은 좆거지 년이랑, 어린 거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쓰레기같은 골빈 년들이 왜! 니 머리에! 있냐고!"
유진이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며 내 관자놀이를 쿡쿡 찌른다.
"내가 다 해줬잖아. 협박하던 미친 년도 죽여줬고, 납치해서는 강간하던 정신병자년도 복수해줬고, 앵겨대는 쓰레기년도 더 이상 못 깝치게 해줬잖아! 도대체 뭐가 문제인데? 왜 그 새끼들을 자꾸 생각하냐고!"
"우으.."
제대로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서 침이 새어나와 입가를 적신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유진이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 두려워진다.
눈이 가려졌다는 것만으로도 내 몸의 신경이 이상하게 반응한다.
"오늘부터 봐주는 거 없어. 끝까지 가자.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아. 니가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유진이가 잠시 몸을 일으키더니 내 머리에 무언가를 씌운다.
귀를 완전히 감싸는 그 감각이 느껴진 이후로는, 내 귀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우으으.."
내 몸에 손이 닿는다.
유진이의 손일 것이다.
그 손이 내 옷을 벗겨버리자 아무런 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할 것인지 두려움에 벌벌 떤다.
허나 아무런 자극도 오지 않는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내 몸에 서늘함이 느껴지고, 소름이 돋은 것처럼 쌔한 느낌이 온다.
허나 아무런 자극도 오지 않는다.
몇 분 정도가 지난 것 같다.
유진이가 날 이대로 두고 떠난 것 같다.
내 몸에 더 이상 아무런 자극도 오지 않는다.
몸이 쑤시기 시작한다.
의도하지 않게 쭉 뻗어져 있는 나의 몸이 조금씩 불편해진다.
허나 자세를 바꿀 수 없다.
강하게 묶여진 무언가가 나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다.
몇번 정도 몸을 뒤척여보려 했지만, 그 강한 구속에 번번이 가로막힌다.
유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이대로 두고는 나를 이상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이겠지.
정신적인 공포와 신체의 결박으로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게 만드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쉽게 당해주지 않을 것이다.
유진이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내가 멀쩡하게 버티면서 유진이를 천천히 설득할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이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불편함들을 다스리고자 침착함을 유지한다.
그래.. 꽤나 버틸 만한 것 같다.
유진이의 의도를 알아채니 이 암흑에 저항할 의지가 생긴다.
충분히 정신과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다.
속으로 평소에 자주 듣던 노래들을 부르며 시간을 보낸다.
배 위가 너무 가려운데 긁을 수 없다.
속으로 노래를 부른다.
기억에 떠오르는 노래는 전부 부른 것 같다. 예전에 들어본 것 같은 노래나, 친구들이 흥얼거리던 노래들을 머릿속에서 재생하며 견딘다.
힘들다. 하지만 버틸 수 있다. 이대로 계속 버티다가 유진이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그 기회를 노려 설득해야 한다.
설득할 수 있을까?
가려운 곳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그 가려움을 느끼지 않으려 애를 쓴다.
진짜로 가려운게 아니라, 그저 가렵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속으로 되뇌인다.
시간이 꽤나 많이 흐른 것 같다.
아직 괜찮다. 제대로 버티고 있다.
괜찮다...
잠시 잠에 들 것 같았는데, 내 입 안으로 물이 들어와서 깜짝 놀라 깨어버렸다.
침을 질질 흘려 바싹 말라있던 목이 축여진다.
잠시 잠에 들었었나?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깨어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신체에 지속적으로 자극을 준다.
견딜 수 있다.
이 암흑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만 같다.
갑작스레 울화가 치밀어서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직 버틸 만하다.
괜찮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