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 상담사 이야기-86화 (86/96)

EP. 86

오늘은 12월 8일.

유진이가 말한 12월 15일이 조금씩 다가온다.

무엇이 그리 신이 나는지 유진이는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그날을 기다린다.

수학여행을 기다리는 학생들처럼, 소풍날을 기다리는 어린 아이처럼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는 유진이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다.

허나 어딘가 석연치 않은.. 그러한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유진이의 행동 또한 평소보다도 더욱 부드러워진 것도 느껴진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12월 9일.

유진이가 깜짝 선물과 이벤트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내가 물어도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머릿속으로 그녀가 준비하고 있을 선물들을 가만히 그려보며 하루를 보낸다.

12월 10일.

드디어 벽에서 손을 떼고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그리 오래 걷지는 못하지만, 보조기구 없이도 예전처럼 걷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유진이는 내가 걷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웃음 뒤에서 그녀의 아쉬움 또한 보였다.

내가 걸을 수 있게 된다면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유진이에게 말했다.

내가 다시 걸어다닐 수 있게 되어도 널 떠날 일은 없을 거고, 항상 너만을 사랑할 거라고 말했다.

유진이는 그런 내게 감동을 받은 듯 울먹거리며 나를 껴안았다.

유진이를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게 저지른 짓들도, 나를 향한 지나친 사랑도 이제는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이상해진 거겠지.

정상은 아닐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기 위한 뇌의 필사적인 적응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지쳤다.

그냥 유진이만을 바라보며 살면 편하지 않을까?

예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이제는 외출도 시켜주고,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사주고..

그저 유진이에게 맞추며 평화롭게 살고 싶다.

내가 다른 여자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유진이만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오래 집에서 머물기만 한다면 유진이는 변하지 않는다.

다시 예전처럼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행복한 인생이다.

전업주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집안일을 할 필요도 없이 집에서 쉬기만 하는 전업주부.

유진이가 돌아올 때까지 집을 지키고, 게임이나 책들을 원없이 즐기고...

가끔 놀이공원 같은 곳으로 데이트를 가며 지내는 인생.

행복할 것이다.

그래...

행복할 것이다.

12월 11일.

비가 내렸다.

유진이와 함께 방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가 대문 앞에서 멈춰섰다.

추적추적 내리는 싸늘한 비가 공기를 더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아직 눈이 되지 못한 채로 그렇게 구슬프게도 쏟아져내리는 비를 손등을 내밀어 직접 느꼈다.

유진이는 너무 얇게 입은 내 옷을 걱정하며 어깨에 담요를 두르고는 곧 다시 집으로 들여보냈다.

유진이가 덮어준 따스한 담요를 느끼며 천천히 걸었다.

이제는 정말 걸을 수 있다.

아직 부자연스럽지만, 그래도 걸을 수 있다.

그렇게 다리의 자유를 얻었지만, 그래도 유진이의 말에 따랐다.

유진이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는 애가 타는 듯이 나를 강하게 껴안았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도 불안하게 하는지 알고 있다.

그녀를 껴안은 채로 달랬다.

"내 다리가 다 낫는다고 해도 난 널 떠나지 않아. 알잖아."

허나 유진이는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는 듯 계속해서 훌쩍거렸다.

눈물을 다 쏟아내고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유진이는 내게 울어서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유진이는 내 다리가 나을 수록 내가 자신을 떠나갈까봐 두려운 생각이 든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차피 내가 도망가도 다시 쉽게 잡아올 수 있으면서 유진이가 왜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재에서 책들을 읽던 도중 문득 깨달았다.

서재에 꽂힌 심리학개론을 보고 깨달았다.

유진이도 아버님과 어머님의 관계에서 불안을 느끼고 있다.

내가 아버님에게서 느낀 것을 유진이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

어머님이 죽고 난 이후에 즐겁게 웃으며 속이 후련한 듯이 놀러다니던 아버님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자신의 부모가 겪었던 일들이 반복될까봐 유진이는 두려워한다.

...정확히 말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내가 결국 모두 연기하고 있는 것이고, 자신이 죽거나 약해지면 도망갈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출근을 마치고 돌아온 유진이에게 말했다.

나는 아버님과는 다르다고, 절대 너에게서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너가 어머님과 다르듯이 나도 아버님과 다르다고 말했다.

유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12월 12일.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유진이가 조금 늦게 온다고 한다.

12월 13일.

이틀 뒤가 너무 기대된다며 유진이는 방긋 웃으며 집을 나섰다.

나도 이틀 뒤에 유진이가 무엇을 줄 지 궁금해진다.

12월 14일.

어젯밤부터 유진이는 소풍 전 날 잠을 못 이루는 아이들처럼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다.

너무 기대가 된다고, 빨리 내일이 됐으면 좋겠다고 나를 꼬옥 껴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하지만 그 애교가 끝나자 유진이는 갑작스레 우울해했다.

내가 자신의 선물과 마음을 제대로 받아줄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그런 유진이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길게 키스를 해주었다.

말보다는 행동이 많은 것을 전해주기도 한다.

그렇게, 12월 15일이 다가왔다.

"일어났어?"

"응!.."

먼저 잠에서 깨어 유진이의 얼굴을 따뜻한 물로 씻어내고 있었는데, 유진이가 눈을 배시시 비비며 일어났다.

평소처럼 그녀에게 가글을 건넨다.

그녀는 서둘러 입을 헹구고 나와 진한 키스를 나눈다.

입을 씻기고 진하게 키스를 나누었다.

아침부터 서로의 혀가 얽히며 침을 섞는 야릇한 소리가 방을 가득 채운다.

평소보다도 그 키스는 아주 진하게, 아주 오랫동안 계속된다.

"휴우.. 이제 그만!"

만족할 만큼의 키스가 끝나자 유진이는 몸을 일으킨다.

"하루종일 키스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나야 좋지만, 그래도 오늘은 참자!"

오늘과 내일은 회사에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나를 위한 이벤트에 전념한다고 한다.

유진이가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잠시 침대 위에 걸터앉아 그녀를 기다린다.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짜잔~!"

유진이가 방으로 들어와서는 내게 자그마한 통을 건넨다.

"선물이야?"

"첫 번째 선물!"

세련된 느낌의 상자를 직접 열어본다.

반지..

"반지네..?"

"주문 넣어놨었거든. 어때?"

"엄청 예뻐! 진짜로.."

은은한 은빛 위에 시선을 사로잡는 보석이 하나, 그 주위로 반지의 윤곽을 따라 박혀있는 자그마한 보석들이 여러 개.

"이거 도대체 얼마 짜리야..?"

유진이는 그런 내 입술에 손을 가져다대며 말을 막는다.

"아직도 가격을 신경 쓰고 사네.. 내가 말했지? 가격이 비싼지는 신경 쓰지 말고, 그 가격에 걸맞은지만 생각하라고. 빌딩보다 비싸다고 해도 그 가치만큼 예쁘고 마음에 들면 되는 거야."

"빌딩보다 비싸..?"

"..아니!"

유진이가 방긋 웃는다.

"아무튼 우리 처음으로 맞춘 반지잖아~ 손 줘!"

유진이가 내 왼손을 붙잡고는 약지에 반지를 끼운다.

기분좋은 착용감과 함께 반지가 손가락에 착 달라붙는다.

"딱 맞네?"

유진이가 반지를 끼운 내 손에 살포시 입을 맞춘다.

"내가 딱 맞게 만들라고 했거든."

유진이도 자신의 손을 내민다.

"내 것도 끼워줘."

유진이에게서 내 것과 똑같아보이는 반지를 건네받는다.

"보통 커플링에 보석을 박아..?"

"응!"

유진이가 왼손을 내민다.

그녀의 약지에 천천히 반지를 끼운다.

"지현아.. 이제 우리는 하나인 거야. 알겠지?"

반지가 전부 들어간다.

유진이가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며 반지의 착용감을 느낀다.

"괜찮네."

유진이가 살며시 내 뒤로 달라붙었다.

"지현아, 보여?"

유진이가 반지를 낀 왼손으로, 반지가 끼워진 내 왼손을 어루만진다.

"응? 자기야... 이제 정말 둘이 이어지는 거야."

"난 이미 너랑 이어졌다고 생각했는걸?"

유진이가 내 말을 듣고는 흐뭇하게 웃는다.

"아이, 착해라! 근데 아직 조금 더 남았어. 내 말을 잘 들어줄거라 믿을게!"

"도대체 뭐길래 자꾸 그래..? 나도 고양이 귀라도 껴야 해?"

"그런 귀여운 짓은 환영이지만, 오늘은 다른 거부터 해야지!"

사귀기로 시작한지 정확히 1년이 되었다.

어머님의 생신이랍시고 끌려간 자리에서 나는 결국 유진이와 사랑을 나누었고, 교제를 시작했다.

오늘은 그 날이다.

유진이에게는 어머님의 생신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저 나와 사귀기 시작한 날일 뿐이다.

유진이를 따라 아주 천천히 걷는다.

이제는 보조 기구가 없어도 어느 정도는 걸을 수 있다.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걷는다.

"사람들 불렀어? 연회장 가는 거야?"

"응! 연회장!"

"연회장에 가는데 이렇게 입고 가도 괜찮아..? 그냥 우리 평소에 입는 옷인데?"

"상관 없어~"

"그리고, 난 단둘이서 보내는 줄 알았는데.."

"푸흣! 어차피 밤에는 우리 둘이서 놀 거야! 금방 끝나~"

유진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척이나 즐거운 듯이 사뿐사뿐 걷는다.

이젠 얼굴이 익숙해진 집사와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아주 천천히 연회장으로의 걸음을 내딛는다.

우리가 연회장 문 앞에 다가서자 사용인들이 모두 뒤로 물러난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문 앞에 나와 유진이만이 서있다.

유진이가 문을 연다.

유진이를 따라 연회장 안으로 들어선다.

연회장 정 중앙에 사람들이 보인다.

두 명.

뒤에서 문이 닫힌다.

쿵!

문이 잠긴다.

유진이가 앞에서 내 손을 이끈다.

"가자!"

"뭐.. 뭔데?"

가까이 다가갈 수록 그들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묶여있다.

언제 자른 것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부스스한 긴 머리와 잘 정돈된 단발.

묶인 채로 소리를 지르며 꿈틀거리고 있는 사람과, 덜덜 떨고 있는 사람.

조금 더 걸어서 그들의 얼굴을 보자 다리에 힘이 풀린다.

"지현아?"

"걷기 힘들어? 내가 업어줄까?"

유진이가 넘어진 내게 손을 내민다.

"빨리 끝내고 나가자!"

지민이와 수정 씨가 묶인 채로 나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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