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93
다시 1년의 시간이 흐른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지내요. 가끔 연락도 좀 하고."
한지은의 수련 생활이 끝이 난다.
원장 밑에서 온갖 일들을 다 하긴 했지만, 그래도 배울 것도 많이 배웠다.
나름 만족스러운 생활이라고 스스로 되뇌며 원장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내가 아는 병원이 하나 있는데, 그쪽에 마침 인턴이 나갔더라고? 괜찮으면 소개라도 시켜줄까요?"
"네? 정말요!?"
마지막 인사 취소.
나중에 다시 따로 고맙다고 찾아뵈리라는 마음으로 원장에게 굽실거리며 감사를 표한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장님!"
"됐어요. 그동안 나같은 아줌마 옆에서 일하느라 지은 씨가 고생했지 뭘."
이번에는 또 어디서 수련을 받을지, 어떤 자리를 구해야 할지 고민하던 한지은은 한시름 덜었다는 생각으로 들뜬 채 집으로 향한다.
발걸음이 가볍다.
일이 꽤나 잘 풀리는 것 같다.
뭐, 연애나 결혼 없이도 다들 잘 사는 세상이니까!
돈만 잘 벌고, 능력만 좋으면 혼자서도 즐겁지 않을까?
TV나 유튜브에 나오는 유명한 상담사들처럼 되어버려서는 인기스타가 될 지도..!
싱글벙글 웃으며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리는 한지은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횡단보도가 초록불로 바뀌기를 기다린다.
어라?
반대편 신호등에 어딘가 낯이 익은 사람이 보인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의 얼굴을 보다 자세히 보기 위해 한지은이 눈을 찌푸린다.
초록불이 켜진다.
사람들이 길을 건넌다.
한지은은 건너지 않는다.
가만히 서서 자신이 보고있는 상대가 앞으로 오기를 기다린다.
점점 상대가 가까이 다가온다.
이제 누구인지 기억이 난다.
"지민아!"
"...!"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응? 학교는 잘 다니고 있어?"
다크서클이 잔뜩 낀 상대의 얼굴이 조금 낯설게 느껴지긴 하지만, 한지은은 그저 졸업이 다가와서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 여기며 계속해서 말을 건다.
"잠 좀 자면서 공부해~ 왜 이렇게 울상이야?"
한지은과 김지민은, 김지현의 병실에서 처음 만났고, 대학 선후배 관계가 되어서 꽤나 자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김지현의 동생이라고 착각한 한지은이 점수를 따볼 생각에 들이댔던 것이지만, 오해가 풀린 이후로는 그저 가끔 술이나 같이 마시는 언니동생이 되었다.
"놔."
목소리에 냉기가 감돈다.
"어..?"
4학년 때에는 바빠서 신경도 못쓰고 살았더니, 그래서 삐진건가?
"언.. 언니한테 그런 말투는 좀.. 아무튼, 오랜만에 만났는데 시간 있으면 술이나 한잔 할까? 언니가 사줄게!"
김지민이 한숨을 내쉰다.
"꺼져."
"뭐!?"
한지은이 깜짝 놀란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게 맞나?
어떻게 후배가 선배한테!?
"너.. 너, 아무리 학업 스트레스가 심하다고는 해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아이, 씨발.. 좆같게.."
김지민이 한지은의 손을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한지은에게서 멀어진다.
"야! 너,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소리를 지르는게 무색해질만큼 김지민이 빠르게 멀어진다.
더 이상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닿을 것 같지 않다.
'첫날부터 애들한테 걸레니 뭐니 그런 소문이 돌길래 내가 도와줬는데..!'
안면이 있는 한지은이 김지민의 편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김지민은 그러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 나는 선배들한테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 영 이상하다니까?"
한지은이 취기가 올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열변을 토한다.
"어떻게 나한테 욕을 해!? 진짜 쇼크다 쇼크.."
아무리 사람들이 떠나갔다고 한들, 아직 한지은의 곁에는 꽤나 많은 이들이 남아있었다.
100명이 50명이 된 정도..
"진짜 짜증나네? 내가 그 년 그럴 줄 알았어!"
"어이가 없네, 하! 지가 뭐라고?"
같은 테이블에 앉은 친구들이 한지은을 도와준다.
그 말들을 들으며 다시 한지은도 기력을 회복한다.
"그니까! 아주 어이가 없어서는.."
커다란 맥주잔을 두 손으로 붙잡고 벌컥벌컥 들이키는 한지은을 내버려두고 두 친구들은 다시 얘기를 시작한다.
"근데 걔 자퇴하지 않았나?"
"그랬을걸? 2학년 되기 전에 했었나..?"
한지은의 음주 행위가 멈춘다.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둘에게 다시 묻는다.
"자.. 자퇴? 무슨 말이야?"
"어라? 몰랐어? 걔 자퇴했잖아!"
한지은이 더 자세한 사건의 전말을 묻는다.
"갑자기 왜?"
"우리도 모르지~ 걔한테 딱히 관심도 없어!"
다시 김지민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허나 한지은의 귀에는 좀처럼 들리질 않는다.
잠깐 좀 씹어준 다음에 마음 편하게 술이나 퍼먹을 생각이었는데, 자신이 너무 무관심했다는 생각이 들자 죄책감을 느낀다.
"...으으.."
실연의 아픔과 학업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었다며, 애써 자신을 달래면서 술을 들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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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가 끝이 나고, 한지은은 아직 취기가 남아있음에도 연락처를 뒤져서 김지민의 전화를 찾아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전화를 연결한다.
뚜르르..
뚜르르..
...
....
연결이 되지않아 삐 소리 이후 ㅌ..
"아잇, 왜 안 받아..?"
다시 전화를 건다.
뚜르르..
뚜르르..
...
연결음이 끊긴다.
전화가 연결되었다.
"어, 지민아? 지민이 맞지? 나 지은이야!"
[...]
"아까전에 길에서 만났잖아..? 너무 오랜만이라 내가 너무 반가워서 좀 실례했던 것 같아. 미안해."
[...]
"..혹시 시간 되면 한번 만날까? 그동안 공부하느라 바빠서 너랑 얘기도 못하고 지낸 것 같아.."
[하아..]
"응? 혹시 언니한테 좀 서운한 거 있니? 언니가 사줄 테니까 편할 때 나올래?"
[이 좆같은 년아, 이 전화로 다시는 연락하지 마. 니 목소리 듣는 것도 역겹고, 니랑 만나는 것도 역겨우니까 제발 좀 꺼져. 아무것도 모르면서 친한 척 들이대지 말고 다른 새끼들이랑 술이나 쳐먹으면서 니 좆대로 살라고.]
"어..에에..?"
[귀찮아서 말 좀 받아줬다고 옆에서 알짱대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난 니같은 새끼랑 같이 있는 거 싫으니까.]
한지은이 당황해서는 아무런 말도 꺼내질 못한다.
[다음에 또 깝치면 윗구멍 아랫구멍 전부 찢어버린다.]
전화가 끊어진다.
"뭐.. 뭐야?"
손이 덜덜 떨린다.
"무슨..?"
한지은이 길 한복판에 멈춰서서는 믿을 수 없는 말들을 곱씹는다.
난생 처음 들어본 온갖 강한 욕설들에 머리가 아찔해진다.
"무..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걱정해서 전화했더니!!"
한지은은 자신이 느끼는 당황스러움과 공포를 분노로 승화시킨다.
"됐네요! 내가 사절이다! 이.. 이 쓰레기 같은 년! 죽어!"
최대한 자신의 분노를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표현으로 구사하며 화를 푼다.
"못된 년! 나쁜 년!"
한지은의 연락처에서 김지민의 전화번호가 사라진다.
아니, 차단된다.
"너 같은 년은 내 쪽에서 사절이야! 이.. 이런 애인 줄 몰랐네.."
한지은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분노가 끝이 나자 다시 불안감과 공포가 몰려든다.
집에 가서 빨리 너튜브로 고양이 영상이나 봐야겠다고 다짐하며, 한지은은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