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94
다시 몇 년의 시간이 흐른다.
어느덧 한지은의 나이도 20대 중반이 되었고, 이제는 꽤나 믿음직한 상담사가 되었다.
아직도 미숙하고 더 많은 수련을 거쳐야 하겠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에게서 신뢰를 받고 있다.
이 사람은 유능하다는 신뢰, 착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호감.
한지은의 인생은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허나 그녀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갈증과 공허함을 자기 자신은 해결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랑을 받아온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자신이 처음으로 강렬하게 사랑했음에도 얻지 못했던, 떠나가버린 인연의 옷자락만이 작게 남아있을 뿐이다.
"저기요?"
"네, 네!?"
한지은이 정신을 차린다.
방긋 웃으며 자신에게 커피를 건네는 남자에게 멋쩍은 듯이 미소를 짓는다.
"죄송해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남자는 씁쓸하게 웃는다.
"아하하..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친구가 소개시켜준 남자인데, 예감이 좋지 않다.
굉장히 허영심이 많아보이는 남자의 얼굴과 옷 차림새,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가 한지은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지금까지는 억지로 꾹꾹 참아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죄송해요.. 저희, 그냥 커피만 한 잔 하고 가요."
상대의 단점만이 보인다.
무엇을 상상해도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이상형에 부합하지 않는다.
자신처럼 사랑받는 여자가 어째서 단점만 보이는 남자들과 사귀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들과 사귀는 상상을, 아니, 손을 잡는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온다.
아무리 아름답고 귀여운 여인이라도, 절대로 넘어올 것 같지 않은 모습을 내비치며 어색한 기류를 계속해서 만들어대면 남자들은 떠나간다.
친구로 시작해 자신을 향한 마음을 고백하는 남자들도, 결국 지쳐서는 다른 연인을 찾아 즐겁게 사귄다.
길거리에서 연락처를 따서 작업을 걸어보려는 남자들도, 결국 뜸해지는 연락에 다른 여자를 찾는다.
허나 한지은만은 다른 남자들을 찾질 못한다.
그저 자신을 두고 먼저 떠나버려서, 4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죄책감이 조금 애를 태우고 있을 뿐이다.
"아니, 또 찼어!?"
"미안해.."
한지은에게 남자를 소개시켜준 여인은 한지은을 나무란다.
"아이고 아이고.. 지은아, 너도 늙어! 아직은 젊어서 남자들이 달라붙지? 결국 늙어! 너도 나처럼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니까? 그냥 몇 번 놀다가 버려!"
"나는 그렇게 못하는거 알면서.."
화려한 옷과 매혹적인 화장,
저것이 어쩌면 연애 시장에서의 가장 이상적인 여인의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한지은의 뇌리에 잠시 스친다.
허나 자신은 그렇게까지 노력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매일을 혼자 보낸다.
대학교 시절에는 한지은의 유쾌함과 꾸밈 없는 소박함, 귀여움, 외모 등등의 장점들이 남자들을 끌어모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많은 남자들이 꼬이지는 않는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아름답던 한지은의 외모는 아직도 청아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한지은은 매일같이 상담실을 오가며 일을 할 뿐이다.
한지은의 마음에 드는 남자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완벽한 존재를 어떤 남자가 뚫어낼 수 있을까?
그저 상담에 몰두한다.
오늘도 상담이 시작된다.
자신이 맡은 환자들은 대부분 증상이 미미하거나, 간단한 상담이나 심리검사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언젠가는 더욱 증상이 심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겠지만, 아직까지 자신은 수련 단계이니 스승의 상담 사례와 기법들을 잠자코 배우며 상담을 이어나간다.
잠시 쉬는 시간이 생기면, 환자들의 명단을 직접 정리한다.
상담 기록들과 스승의 조언까지 모두 메모한 이후에 파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삭제해야 하는 것들은 삭제하고, 보관해야 하는 것들은 보관한다.
잡일이 아니다. 환자들의 개인정보를 다루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한 업무이기에 자신에게 맡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한지은은 그렇게, 매일같이 일을 하며 산다.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공부를 한다.
울적하고 우울한 마음을 잊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언제나 바쁘게 만든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지은은 언제나 상담소에 나와 일을 하고 공부를 한다.
때로는 환자의 증상이 호전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을 윽박지르며 화를 내기도 한다.
그리 깊은 상담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아직까지 심각한 환자들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한지은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부정적인 감정들에 상처를 받는다.
그래도 알고 있다.
그것이 상담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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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자신보다 늦게 인턴으로 들어온 후배들이 인포데스크에서 무엇인가를 즐겁게 떠들어대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나이 지긋한 아주머님들을 쓰겠지만, 젊은 사람들 경력이라도 늘려주겠다며 스승님이 고집하신 덕분에 이런 진풍경이 상담소에서 펼쳐진다.
여자가 여럿 뭉치면 수다가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서로 친해졌다면 더더욱!
한지은도 그런 대화에 빠질 수 없기에 곧바로 살갑게 다가가서는 대화의 화제를 묻는다.
"무슨 얘기해?"
"아, 언니! 지난 주에 새로 오신 내담자님 얘기에요!"
"내담자분들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다니..! 아주 나쁜 짓인데?"
한지은이 방긋 웃는다.
"나도 껴줘!"
이런 이야기에도 낄 줄 알아야 소외되지 않는 법이니까..
뭐, 다른 병원들에서도 진상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가?
딱히 비판받을 일도 아닐 것이다. 아마도.
"글쎄, 뭔가 좀.. 피폐미? 퇴폐미? 그런 게 있다니까요? 아아, 오늘 오시는 날인데.. 빨리 오시면 좋겠다!"
"뭐하시는 분일까? 맨날 다른 경호원들도 같이 오잖아."
"퇴폐미가 아니라 그냥 어두운 분위기 아니에요? 난 무섭더라.."
"잘생기면 된 거지! 그런게 중요해?"
"아무튼 무슨 사연이 있으신 것 같아요. 휠체어만 타고 다니시던데요?"
한지은이 재잘재잘 떠드는 후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궁금한데? 나도 얼굴 좀 보자! 그 사람 오면 나한테 좀 알려줘."
잠시 수다에 참여하며 숨을 고르는 동안, 몇 분 후에 예정되어 있는 내담자가 꽤나 일찍 도착했다.
한지은의 쉬는 시간이 끝이 나고, 상담을 준비한다.
3분.. 3분 정도는 빨리 시작해도 될 것 같다.
너무 빨리 시작하는 것도, 너무 늦게 시작하는 것도 금물이라고 말하셨지만 3분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자, 들어가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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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은이 맡은 오늘의 상담도 끝이 났다.
이젠 실습이라기 보다는 어엿한 '상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 이후의 스케줄은 딱히 없다.
스승에게 자신의 상담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몇몇 기법들을 실전처럼 써보며 학습하고..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천천히 상담실 밖으로 걸어나간다.
잠시 허리도 좀 펴고, 다시 수다도 좀 떨면서 쉴 생각이다.
허나 문을 열자마자 직감한다.
인포데스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남자가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인포데스크 앞에 서있다.
그 옆에도 다른 경호원이 우두커니 서있다. 그는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있다.
두 남자 사이로 휠체어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누군가가 휠체어에 탄 채로 말을 하고 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인포데스크에서 휠체어에 탄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후배들의 표정을 살핀다.
아양이 가득 담긴, 하지만 두려음으로 인해 조금은 떨리고 있는 후배들의 목소리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이 차갑고 냉정하게 말하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
그 싸늘한 목소리에서 한지은은 묘한 익숙함을 느낀다.
후배들 중 하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지은을 쳐다본다.
남자가 그 짧은 찰나의 시선 변화를 느끼고는 말을 멈춘다.
대화를 이어나가던 후배들은 당황한다. 갑작스레 닫힌 남자의 입에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아..? 아무튼, 앉아서 기다리고 계시면 곧 원장님ㅇ.."
"됐어요."
남자가 말을 끊는다.
그가 손짓을 하자 한지은과 남자 사이를 지키며 버티고 있던 경호원이 서둘러 뒤로 물러난다.
서로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경호원이 비켜섰으니 더 이상 둘 사이를 막는 장애물은 없다.
한지은과 남자가 눈이 마주친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가리고 있지 않은 눈 한쪽과 시선이 맞닿는다.
"...선배?"
한지은의 가슴이 순간 멎어버린 듯이 멈췄다가, 폭발적으로 뛰기 시작한다.
남자가 다시 입을 연다.
"원장님은 됐고, 저 분은 상담 일정이 어떻게 되시죠?"
"아..?"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후배가 한지은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대답을 망설인다.
한지은이 다가가서 곤란해하는 후배를 대신해 직접 말을 꺼낸다.
"마침.. 상담이 다 끝나서요. 일정은 없습니다. 수련중인 학생이라 부족한 점이 느껴지실 수는 있겠지만 간단한 검사나 상담은 가능한데, 괜찮으시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김지현이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