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1화 (1/112)

#1

“길게 보면 반년입니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태풍처럼 주언의 위에 내리쳤다. 가시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차라리 잘못 들은 거라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예리하리만큼 선명했다.

영화에 나오는 단골 소재였던 것 같은데.

처음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다음은 어쨌더라.’

어떻게든 해보라고 우는 사람과, 왜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느냐고 화내는 사람. 대체로 이렇게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뉘었던 것 같다.

주언은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번에 의사의 말을 이해 못 했다는 말이 정확했다. 선명히 들렸지만 묵직한 문장을 소화하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반년이라 하시면….”

주언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남의 일을 듣는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

무덤덤한 의사 얼굴에서 희미한 균열을 읽었다. 그제야 의사가 말하지 못했던 주어를 알아차렸다. 의사가 말하는 것은 목숨의 유통 기한이다.

“현재로서는… 치료를 해볼 수는 있지만,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치료를 안 하면….”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해드린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일상생활은 어려우실 겁니다.”

“아.”

안쓰럽다는 듯한 시선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가운 현실과 마주했다. 따끔따끔한 감촉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손이 희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손을 펴고 땀에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닦아냈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토할 것 같아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당장 입원하시는 게 가장 나을 겁니다. 혹시 보호자랑 같이 오셨다면….”

우는 거라고 착각이라도 했는지 의사가 멈칫하며 말했다. 주언이 고개를 들었다. 의사의 예상과 다르게 주언의 눈가는 건조했다.

“아뇨.”

“다음에 오실 때는 같이 오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무래도 주변에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요.”

“…네.”

보호자.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잠깐 한 명이 뇌리를 스쳤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알릴 생각이 없으니 보호자로 부를 수 있을 리도 없다. 주언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물은 주언에게 있어 사치였다.

“환자분께서 스트레스받을 일 없게 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기관에서 주기적으로 하는 검진에서 나온 결과이니만큼….”

의사가 곤란한 얼굴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기관과 연계되어 있는 병원이고, 검진 결과 정보 공유에 응한다고 했으니 뻔했다.

“기관에 연락이 간다는 소리군요.”

의사가 곤란한 얼굴로 주언을 올려다보았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예.”

“제가 직접 말하고 싶은데, 기관에 말해야 하는 데드라인이 언제까지죠?”

“원칙적으로 3개월 이내에만 말하면 되지만…. 환자분 상태라면….”

의사가 설득하려 했으나 주언이 단호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3개월 다 채우고 알려주세요.”

“하지만 환자분.”

의사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주언이 일어나는 게 더 빨랐다. 나가기 직전, 주언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처방전은 접수처에서 받으면 될까요?”

“…예.”

주언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병원을 빠져나왔다. 시계를 흘끗 보았다. 오후 반차를 냈던 터라 저녁까지 일정이 없었다.

병원 앞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운이 안 좋구나, 싶었던 때가 많은 삶이었지만 이렇게 끝까지 안 좋을 줄은 몰랐다.

“아. 이제 어떡하지?”

할 일은 많은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이잉.

멍하니 있다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명훤에게서 톡이 와 있었다.

-오늘 늦어

짧고 간결한 내용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오늘 말할 생각 없었으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슴 한구석에서 서운함이 고개를 내밀었다.

“휴….”

섭섭해하지 말아야지 주언이 고개를 털며 서운함을 떨쳐내려 애썼다. 어차피 이제는 같이 살고, 매일 보는 사이니까 이런 일로 섭섭해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오늘 너무 감당하기 힘든 얘기를 들어서, 이런 사소한 것에도 흔들릴 정도로 마음이 약해졌던 거다. 그러니 이것은 내 탓이다. 주언은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각인을 하지 않았으니 법적으로는 동거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명훤이 혹시라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무언갈 알아내려고 해도, 병원의 비밀 유지 기간이 있으니 당분간은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아직 목구멍에 막혀 소화되지 않은 소식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

우리는 능력을 발현하기 전부터 함께였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친해진 건 아니었다. 우연히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같은 곳이 되었고.

‘또 같은 반이네.’

‘지겹다.’

계속 우연찮게도 같은 반이 배정되었다.

지겹다고 말했지만 눈매를 휘던 명훤의 얼굴이 아직도 선했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에 반짝이던 머리카락, 창문 틈새로 흘러들어온 미풍에 흔들리던 커튼, 시끌벅적한 다른 사람들의 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자신을 오롯이 보던 여명훤.

사사로운 대화가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그와 막역해졌을 때쯤.

‘넌 지겨워?’

난 좋은데.

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여명훤이 오롯이 자신만을 향해 환하게 웃었던 때.

아직도 그날이 선명했다. 감정에 서툴던 소년은 그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달았다. 어렸고, 영글지 않은 풋풋한 감정이었지만 우리 둘 사이에 싹튼 건 사랑이었다.

과실이 달콤하게 무르익을 때까지 오래 이어질 거라고 믿었고, 그 믿음만큼 우리는 오래된 연인이 되었다.

Rrrrr-

전화 소리에 주언이 퍼뜩 과거에서 빠져나왔다. 휴대폰 화면을 보니 강윤재라는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다.

순간 명훤이었길 바랐던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우스운 마음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살짝 웃었다. 혀끝이 썼다. 전화벨 소리가 한참 울리고 나서야 주언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너 오늘 병원 간댔지?

“응.”

-명훤이는 콜 받았던데. 너 혼자 갔어?

“콜?”

보통 에스퍼와 가이드는 최소 2인 1조로 함께 움직인다.

-너 몰랐어?

“응.”

-급하게 받은 건가 보네.

보통 명훤과 함께하는 가이드는 주언이었다. 최근에 몇 번 그가 다른 가이드와 함께하긴 했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상했다.

‘한마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늦는다고 연락을 보낼 때 함께 말해줄 수도 있던 일인데, 왜 네 소식을 다른 사람한테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주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가이드는 흡수율이 떨어져서 약도 같이 먹을 게 분명하다. 가이드보다 약은 훨씬 더 성능이 떨어졌다. 불렀다면 같이 갔을 텐데.

-나라도 부르지.

“…뭘 또 그래. 혼자 갈 수도 있지.”

마치 제 생각이 타인의 입에서 나온 거 같았다. 주언이 쓰게 웃었다. 자신이 한 말은 만약 자신이 명훤에게 물어봤다면, 명훤이 했을 법한 말이었다.

-그래도.

“나 근데 이만 가봐야겠다. …약속이 있어서.”

-어. 그래. 알겠어. 그럼 내일 보자.

결과는 어땠냐고 강윤재가 물어보면 얼버무리기도 전에 눈물이 날까 싶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푸른 하늘 아래 흰 셔츠를 입고 자신에게 웃어주던 명훤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언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전에 명훤과 침대 위에 뒹굴거리며 만약 내가 얼마 뒤 죽는다면 뭐 할 거냐는 시답잖은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났다.

‘장난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명훤은 자신을 세게 껴안고,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정뿐인 질문에도 한없이 슬퍼하던 너였다.

‘그냥 만약에, 라는 가정이 붙은 질문이잖아.’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던 너는.

‘그럼 내가 너 책임질게.’

알게 된 너는 어떤 말을 할까.

**

에스퍼는 능력의 범위에 따라 등급이 나뉘지만, 가이드는 표출하는 범위보다 안에 담는 그릇의 크기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에스퍼의 능력이 여러 물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종이에 물을 담을 수 없듯이, 가진 그릇의 성질에 따라 맞는 에스퍼를 지정받는다. 가이드의 등급이 높은 것은 단단한 그릇을 가졌다는 뜻이다.

에스퍼보다 가이드 수가 월등하게 많지만, 높은 등급의 가이드 수는 에스퍼 수보다 적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주는 것처럼, 주언과 명훤의 상성이 좋아 주언은 A급 가이드임에도 명훤의 가이드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영원할 줄 알았다. 우리의 영원이라고 해봤자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니까.

TV를 멍하니 보았다. 시간을 흘끗 보니 새벽이 지나가는 시간이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으나 아무런 문자도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까지 늦을 때는 연락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용건 때문에 연락만 하게 된 건 언제부터지….”

그전에는 붙어있지 않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해 어디서 무얼 하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는데.

아직 우리는 괜찮은 게 분명한데, 괜히 병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다. 사람이 항상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 애정의 온도가 조금 낮아진 건 당연한 거다. 항상 처음처럼 불탈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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