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악!”
공격이 통했는지 연기 속에서 살이 터지는 둔탁한 소리와 비명이 울려 퍼졌다.
기관은 AGT에 사람을 심어두었고, 그 사람이 정보를 빼내 알려 주었다. 그럼 그 정보를 토대로 작전을 짰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주쳤다는 것은, 기관 내에 AGT에게 정보를 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아마 이번에는 혼선이 있어서 마주치게 된 거겠지.’
상대가 마음먹고 싸우려고 왔다면 이런 식으로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쾅!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던전 안을 가득 채웠다. 연기에 눈이 따끔거렸으나 신경 줄을 느슨하게 할 수 없어, 눈이 벌게져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연기가 다 가실 때까지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었을 때, 주언은 가장 먼저 명훤부터 찾았다. 벽에 기대어 있는 명훤의 모습이 심상찮았다. 주언은 주변을 살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달려 나갔다.
“후욱… 후우….”
거칠게 숨을 내쉴 때마다 탄 냄새가 진동했다.
“명훤아!”
“우주언 함부로 움직이지 마!”
강노훈의 말에도 멈출 수 없었다. 그런 주언을 본 강노훈이 이마를 짚었다. 그가 봐도 명훤의 상태는 심상찮아 보였다. 명훤의 팔목을 잡았다. 맥박이 불안정하게 뛰고 있었다.
이미 갔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노훈이 시선을 돌려 다른 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빨리 수색해.”
“네, 팀장님.”
명훤에 비해 주언의 가이딩은 한 단계 등급이 낮았다. 같은 S급끼리는 손잡는 것만으로 가이딩을 해결한다고 하지만 주언은 아니었다. 특히나 명훤이 갑자기 힘을 너무 소모해 폭주 직전까지 갔을 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쓰는 수밖에.
“명훤아.”
주언이 뒤꿈치를 들고 명훤의 뒷목을 잡아 이끌었다. 몸이 뜨거워서 그의 피부 위에 닿은 손이 화상을 입을 것 같았지만, 주언은 멈추지 않았다.
명훤도 길들여진 짐승처럼 주언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움직였다. 명훤의 고개가 숙여지고, 그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을 때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츳.
축축한 살덩이가 열에 젖어 뜨거워진 입술 사이를 갈랐다. 주언의 혀가 명훤의 볼 안쪽을 훑었을 때였다. 명훤의 손이 주언의 허리를 낚아채듯 잡아 몸을 밀착시켰다.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맞물렸을 때, 명훤이 주언의 입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오래 굶주렸다가 맛보는 청량한 기운은 명훤의 이성을 놓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흐으…읏.”
주언은 버텼다. 자신의 몸 위로 쏟아져 내리는 그의 능력의 여파가 따갑게 살갗을 찔렀지만 참았다.
명훤이 다른 손으로 주언의 등을 더듬거렸다. 손가락이 척추뼈를 타고 올라갔다.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강렬한 쾌감과 열기에 이곳이 어디인지 잊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그때였다.
“읏.”
갑작스럽게 느껴진 가슴 통증에 주언이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주언은 몸에 힘을 주고 통증을 삼켜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신음과 명백히 다른, 이질적인 소리에 명훤의 흐릿했던 시선이 순식간에 초점을 되찾았다. 명훤은 그대로 주언의 양어깨를 붙잡고 주언을 밀어냈다.
“명훤아. 너 아직 안 괜찮아.”
명훤이 주언을 잠시 응시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상황은요?”
명훤이 시선을 돌려 상황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강노훈에게 물었다.
“시신은 발견 못 했어.”
죽이지 못했다는 뜻이다. 명훤이 인상을 구기며 한숨을 토해냈다. 주언이 명훤의 옷 끝자락을 잡았다.
“먼저 나갈까?”
명훤은 남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다. 이성을 차릴 정도로 진정 됐지만, 아직 안정적이진 않았다. 주언의 제안에 명훤이 주언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앞으로는 나서서 가이딩 하지 마.”
“…뭐?”
명훤이 흘끗 옆을 보자 근처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던 이호윤이 뛰어왔다.
“제가 더 빨리 왔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명훤의 말뜻을 더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이호윤이 기다렸다는 듯 명훤의 손을 잡으며 사과했다.
“원래 이런 일은 잘 없어요. 그리고 명훤이는 약 먹을 때도 있고….”
“네.”
자신의 일을 주언이 대신해 줬다는 듯한 말투였다. 주언의 앞에 선명한 선이 그어졌다.
“일단 가지. 여기서 어떻게 할지 정해야 하니까.”
주언의 가이딩 덕분인지 순식간에 처음과 다름없는 얼굴색을 되찾은 명훤이 주언을 스치고 지나갔다.
**
강노훈은 욕심을 부리는 대신 안전을 추구했다. 가장 큰 전력이 한 번 폭주할 뻔했다.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필요 이상으로 큰 힘을 썼다. 여기서 클리어까지 노리기엔 리스크가 컸다. 이호윤이 더 노련한 가이드였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써는 철수가 최선이었다.
공격 1팀의 판단에 기관은 동의했고, 유예 기간을 가지기로 했다. AGT 팀이 어떤 경로로 이렇게 빨리 던전에 도착했는지와 수거 팀의 눈을 피해서 어떻게 던전에 입장했는지도 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한동안 오늘 갔던 던전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팀장님.”
“난 네가 날 그렇게 부르면 소름이 끼치더라. 왜.”
“우리 오늘 회식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무실에 돌아온 후에야 다들 겨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긴장을 풀다 못해 신경 줄을 놔버린 듯한 이지우의 물음에 강노훈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넌 머릿속에 회식 생각밖에 없냐?”
“우리 방금 뒈질뻔했는데, 뭔 회식?”
서윤진이 한마디를 거들자 이지우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그러니까 매일 하루를 후회 없이 보내야죠!”
“또라이 새끼. 훈련 더 할 생각은 안 하고.”
“우리 자칫하면 위험했어. 추적해본 결과 4명 정도 있었다던데.”
주언은 시끌시끌해진 사무실을 보며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어.’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컵을 든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으나,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쾅!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안 그래도 험한 일이 있었던 공격 1팀이 불쾌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문을 거칠게 연 사람을 맞이했다.
“우주언!”
하지만 상대는 아무런 상관 없다는 듯 큰 목소리로 주언의 이름을 불렀다.
“윤재?”
주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윤재가 화난 기색을 드러내며 성큼성큼 다가와 주언의 앞에 섰다.
“너… 하….”
“무슨 일이야?”
“너 그걸 말이라고 해? 무슨 일?”
주언이 아는 윤재답지 않게 언성이 높아졌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아.”
“너 왜 말 안 했어.”
“…나가서 얘기하자.”
주언은 그제야 윤재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왜 말하지 않았냐는 책망을 들을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명훤이 아닌 윤재가 먼저 알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비밀 유지 기간 동안에는 기관에 정보가 아예 안 가는 줄 알았는데….’
병원에서 주언의 정보를 이미 기관에 넘긴 듯 보였다. 그렇다면 윤재가 먼저 정보를 접한 게 설명된다. 연구소 쪽에서 일하는 강윤재가 어떤 이유로 자신의 정보를 열람했을 것이다. 강윤재는 기관의 핵심 연구원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열람할 수 없는 등급의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무슨 얘긴데.”
명훤이 나서서 윤재와 주언 사이에 섰다. 윤재는 처음에는 주언의 친구였지만, 이제는 명훤의 친구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모든 생활을 공유했으니까 당연했다.
명훤도 윤재가 평소답지 않게 흥분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강윤재는 명훤의 평온한 태도에 얼굴을 사정없이 구겼다. 주언이 윤재를 간절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 아니다. 나가서 얘기하자.”
윤재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주언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명훤아. 별일 아니야. 그냥 전화하다가 잠깐 말다툼이 있어서. 그때 너 바빴던 날. 그렇지, 윤재야?”
“…….”
“내가 사과할 타이밍을 놓쳐서.”
“…어.”
“팀장님. 죄송합니다. 잠깐만 자리 비울게요.”
주언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자, 갑작스러운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강노훈이 어색하게 “어어.” 하고 말했다.
“우리 나가서 얘기하자.”
“너… 진짜….”
“제발.”
남의 사무실에서 행패를 부린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싶지만 상대는 기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연구원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벌써부터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인재.
“선배님. 저 궁금한 거 있는데.”
명훤이 문 쪽으로 몸을 틀었을 때, 호윤이 살갑게 다가와 명훤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나중에 하지.”
명훤이 귀찮다는 듯 자신의 옷자락을 잡으려는 호윤의 손을 세게 쳐냈다.
“앞으로 같은 팀으로 활동할 사람은 저인데, 더 신경 쓰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호윤이 작게 웃었다. 이 말에 숨겨진 의미를 명훤이 깨닫지 못할 리 없었다. 그리고 명훤에게 얼마나 효과적인 말인지까지도.
문을 향해 걸어가려던 명훤의 걸음이 멈췄다.
**
윤재를 따라가는 내내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윤재에게 살갑게 인사를 해왔다.
“넌 인사 안 해줘? 인기 많네.”
“…….”
“차기 연구 소장이라는 소문도 돌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