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6화 (6/112)

#6

강윤재. 차기 연구 소장으로 거론되는 기관의 주요 인물 중 하나. 하지만 촉망받는 인재가 되기 전 그는 실험 상대가 없을 때 스스로에게 실험해서 그 부작용으로 머리 색이 옅은 색이 된 괴짜였다.

친하게 된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입사 시기가 겹쳐 기본 훈련을 받을 때 같은 방을 쓰면서 안면을 텄고, 자연스럽게 친하게 지냈다.

주언의 방에 쉴 새 없이 들락날락하던 명훤도 윤재와 어느 정도 친하게 지내 셋이 곧잘 어울려 다니곤 했었다.

주언은 물끄러미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묵묵히 걷고 있는 윤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될 수 있으면 아니라고 시치미 떼고 싶었다. 어두운 분위기는 질색인데. 하지만 대충 넘어가기도, 도망칠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윤재의 얼굴이 너무 험악해서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윤재의 개인 사무실까지 따라왔다.

혹시 몰라 문을 살짝 열어뒀다. 문이 열려 있으면 적어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말조심을 할 테니까.

얄팍한 수였다.

“우주언.”

이름이 불리고 곧 커다란 그림자가 주언의 위에 드리웠다. 사무실에만 있어서 명훤이처럼 온몸이 촘촘한 근육으로 짜여 있진 않았지만, 일반 남자보다 훨씬 컸다. 표준 남성 키인 주언을 가뿐히 넘어설 정도로.

“…어?”

주언이 두 눈을 깜박거렸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윤재의 시선이 형형하게 빛났다. 숨이 막히는 기분에 숨을 멈췄다.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문.”

탁.

그 말을 끝으로 윤재가 주언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그제야 이유 모를 압박감에서 해방된 주언이 어색하게 웃었다.

“윤재야.”

어떻게든 변명 먼저 하고 싶었다.

“너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어.”

하지만 주언의 노력에도 윤재의 인상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뭐가.”

“뭐긴 뭐야. 너 뭐 하자는 거야.”

윤재가 이마를 짚으며 책상 끝에 걸터앉았다.

“병원에 3개월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병원이 벌써 정보를 넘겼나 보네.”

“언제 말할 생각이었어?”

“내 상태 내가 제일 잘 알아. 나 아직 괜찮아.”

“잘 안다는 애가 A급 던전에 가? 제정신이야? 너 가이딩 하는 거 자체가 독이야.”

윤재가 흥분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네가 가이드인 것과 별개로, 에스퍼 곁에 있는 건 너한테 독밖에 안 돼.”

에스퍼는 인외 존재 취급될 만한 과한 힘을 품으며, 가끔 스스로도 제 힘을 감당하지 못해 가이드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에스퍼의 파동만으로도 영향을 받는 사람이 존재한다.

풍화증. 에스퍼가 내뿜는 파동의 작용으로 신체 내부가 점차 파괴되는 현상.

일반인에게 풍화증은 흔한 병은 아니지만 드문 병도 아니었다. 하지만 에스퍼의 곁에 살아야 하는 가이드가 풍화증에 걸리는 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알아. 아는데….”

혼란에 빠진 목소리에 서서히 물기가 배었다.

주언도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직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인정하기 힘들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명훤에게 털어놓고, 엉엉 울고 위로받고 싶었다. 만약 다른 병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풍화증이라서. 그걸 말하면 명훤이 자신과 연관 짓지 않을 리 없어서. 그래서 삼켰다. 숨긴다고 되는 일이 아닌 걸 알면서도.

“여명훤은 뭐래?”

“…….”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가 나왔다. 명훤이 알게 하고 싶지 않지만 평생 숨길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니지. 애초에 모를 수도 있겠네. 여명훤은 알아? 너 이런 상태인 거?”

침묵은 긍정의 뜻이었다. 윤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토해냈다. 강윤재는 주언이 명훤에게 왜 이토록 희생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윤재는 드물게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후회했다. 병원 검사 결과를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혼자 죽음을 선고받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과 통화할 수가 있었던 걸까.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었다. 새삼 안색을 살피니 얼마 전에 봤을 때보다 야위었다.

털썩.

“말하지 말아주라.”

“주언아.”

침묵 끝에 되돌아온 건 대답이 아니었다. 윤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주언이 무릎을 꿇었다. 여명훤이 상처 입는 게 싫어서, 스스로를 상처 내고 있는 우주언이, 명훤을 위해서 무릎까지 꿇었다.

주언이 허벅지 위에 얹어진 두 손을 주먹 쥐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 나왔다.

“나, 명훤이한테 못 말하겠어. 알아. 나 미련한 거.”

주언의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윤재는 명훤에게 말할 것이다. 상처주고 싶지 않았다.

명훤이는 태양이었다. 어떻게 내게 유일한 태양을 꺼트릴 수 있겠어.

윤재가 성큼성큼 걸어가 주언의 팔을 강제로 끌어 올렸다. 몸이 강제로 일으켜진 주언이 고개를 숙였고, 윤재는 주언의 양팔을 잡고 흔들었다.

“에스퍼랑 가까이 있을수록 네가 힘들어지는 거 알면서도 일 나가게 두는 나는?”

명훤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주언을 알게 된 순간부터 주언의 곁을 지켰다. 그저 이미 명훤과 사귀고 있어서, 도저히 틈이 안 나서 친구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제발.”

“우주언!”

“나중에 말할게. 조금만 더… 나 어차피 팀 옮기니까 그 이후에 말할게.”

주언은 대부분의 순간에 상대나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었지만, 한번 마음먹은 건 꺾지 않는다.

“넌 여명훤이랑 그렇게 오래 사귀었는데 왜 솔직하질 못해? 숨기는 거 이것만 있는 거 아니잖아. 그건 어떡하려고.”

“윤재야.”

“…팀 옮길 때까지만이야.”

윤재가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백기를 들었다. 그전까지 윤재도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대답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윤재가 주언의 병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므로.

“업무 시간에 너무 오래 있었다. 돌아갈게.”

주언이 떨어지지 않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애써 웃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었지만,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 한 달.’

그 후에는 말하지 않아도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테니, 실질적으로 남는 시간은 그 정도겠지.

“전화해.”

“윤재야, 고맙다.”

주언이 이대로도 충분히 고맙다고 말을 전한 뒤 윤재의 개인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자 윤재는 서류 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서류를 보자마자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어서 무작정 주언에게 찾아갔다. 하지만 이성을 되찾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냈다.

윤재도 아무런 생각이 없이 주언에게 시간을 준 게 아니었다.

“그 새끼가 아무것도 못 하고 손 놓고 있을 때, 내가 널 구해줄 테니까.”

그의 손끝에 걸린 종이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

사무실로 돌아가자 팀원들은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언은 부산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을 뚫고 자리로 돌아가, 옆에 앉은 윤진에게 물었다.

사무실 안에 명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돌아오자마자 마주쳤다면 표정 관리가 어려웠을 것이다.

“내일은 일정 없지 않아요?”

“왔어요? 내일 호윤 씨가 합 맞춰보고 싶다고 해서 공격 2팀이 공략하려던 B급 던전에 가기로 했어. 그래서….”

“저는 안 가도 된다는 소리죠?”

“나도 안 가니까 같이 사무실에 있어요. 그리고 다음 주쯤 환영회도 한다더라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비품실에 들렀는지 아이템 몇 개를 손에 든 명훤과 호윤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주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러곤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네. 그럼 저는 먼저 오늘 퇴근할게요. 오늘 못한 업무는 내일 하고요.”

“그래요. 잘 가요.”

주언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호윤이 명훤을 가이딩 해줬던 순간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밤길을 걸었다. 달밖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바로 집에 가고 싶지 않아 괜히 길을 멀리 돌아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걷는 내내 머리를 비우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온통 네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허탈하게 웃었다.

매번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지만, 슬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소박한 바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너무도 큰 소망이 되어버렸다. 너무 커서 이룰 수 없는 소망.

삐삐삐삐-

현관문을 열고 안에 들어갔을 때였다. 불을 켜지 않아 컴컴한 거실, 어둠 한가운데 명훤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우주언.”

“명훤아.”

그가 있을 줄 몰랐던 주언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걸음을 멈췄다.

“너 어디 갔다 왔어?”

“…오늘은 퇴근 일찍 했네.”

주언이 불을 켜러 걸음을 옮기기 전, 명훤이 먼저 일어나 성큼성큼 주언 쪽으로 다가왔다.

“강윤재랑 무슨 얘기 했어?”

“별 이야기 안 했어….”

“그런데 강윤재가 그렇게 화를 낸다고?”

명훤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보였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서 명훤의 윤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주언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명훤의 뺨을 쓰다듬었다.

“별일 아니야.”

그러고 보니 가이딩 목적이 아닌, 그냥 키스는 언제 했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최근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따뜻한 피부의 감촉에 심장이 제 존재감을 드러내며 쿵쿵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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