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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8화 (8/112)

#8

흔들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헤집어 핸드폰을 꺼내 1번을 꾹 눌렀다.

Rrrrr.

Rrrrr.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명훤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명훤아.”

-목소리가 안 좋은데?

어떻게 목소리만으로 내가 아픈 걸 알까.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유언 같은 걸 남겨야 되나? 아직 그래도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몸이 조금 안 좋아서… 병원 좀 데려다주라.”

-어디가 아픈데?

“그냥… 몸이?”

-나 이미 병원인데. 택시 타고 와. 기다릴게.

“너 아파?”

-아니. 나 말고.

-이호윤 씨 보호자님!

간호사가 외치는 소리에 명훤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명훤의 입으로 직접 듣지 않아 다행인 걸까. 네가 누구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지 알게 되어 불행인 걸까.

명훤은 곧바로 전화를 끊는 대신 낮아진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많이 아픈 거야?

“아니… 그냥 어리광 좀 부려봤어.”

-너 제대로 말해.

아주 많이 아프면 온다고? 그건 싫었다. 비참했다. 나를 더 사랑해서 오는 게 아니라, 내가 더 아파서 오는 너를 보고 싶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자존심인 걸 알지만, 그냥 마음이 그랬다.

“괜찮아. 끊을게.”

피를 토해서 입 안에서 비릿하고 시큼한 맛이 났다. 전화를 끊고 바닥에 누웠다.

나도 아픈데, 내가 더 아픈데. 명훤아. 네가 너무 미운데 그래도 네가 보고 싶어. 처음 알았다. 질투하는 데에도 힘이 든다는 사실을.

도움을 요청해야 되는데. 뒤늦게 생각이 들었을 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주언은 가물가물해진 정신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기계 소리에 물 밑에 가라앉았던 의식이 서서히 떠올랐다.

‘…병원이네.’

익숙한 흰 천장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는 금방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장소는 단박에 알겠는데, 왜 여기에 있는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왜 여기에 있는 거였더라.

“아.”

주언은 밀려 들어오는 마지막 기억에 눈을 번쩍 떴다.

“읏.”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어디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쑤셔, 몸을 반쯤 일으켰다가 그대로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눈이 뻑뻑해서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건 명훤이었다. 공격 1팀 사무실은 모두 퇴근해서 아무도 없었다. 오기 어렵다고 했지만, 안 좋다고 하면 올 것처럼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병원에 있던 명훤이 나한테 돌아온 걸까.

흘끗 밖을 보니 늦은 밤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듯해 다행이었다. 심각한 건 아니라고 명훤에게 대충 얼버무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뭐라고 말하지.’

명훤이 자신을 발견했으면 많이 놀랐을 텐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여러 생각을 떠올렸지만 그 어떤 생각에도 명훤에게 진실을 말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팔을 이마에 올리고 눈을 감았을 때였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반쯤 일으켰다. 아직 무슨 변명을 말해야 할지 정하지 않았는데.

“명훤… 어?”

괜히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급하게 쓸어 넘겼다.

“일어났어?”

“…윤재야.”

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이 멈췄다.

“나라서 실망스러워?”

“아니. 그게 아니라 생각도 못 해서.”

주언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으나 윤재가 됐어, 하며 너스 콜을 누른 후 침대 앞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았다.

“…사무실은? 내가 엄청 더럽혔던 것 같은데.”

“이 와중에 그 걱정이야?”

“미안.”

“넌 네 몸은 걱정 안 해?”

“보이는 것보다는 괜찮아.”

주언이 애써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후우. 사무실은 바로 청소했어.”

“밤늦게까지 있게 해서 미안해.”

“너 이대로 일 다니는 거, 더 민폐인 거 알지?”

강하게 말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으면 주언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때까지 일을 다닐 게 뻔했다. 윤재의 지적에 주언이 시선을 피하며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아. 근데 나 진짜 아직 괜찮아.”

미련하다는 거 알았다. 아직 시간이 있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계속 쓰러지면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이 간다. 던전에 갔을 때 기절한다면 팀에게 그냥 피해가 아니라 목숨까지 직결된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일도 많은데….’

주언이 바스락거리는 병원 이불을 손으로 쥐었다. 윤재는 주언이 무슨 생각을 아는지 대충 알아차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 이틀이나 정신 못 차렸었어.”

“…뭐?”

“몇 시간이 아니라.”

아직 괜찮은 사람이 며칠씩이나 기절할 리 없지 않느냐는 말에 어색하게나마 웃고 있던 주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주언아.”

윤재가 주언의 주먹 쥔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내 핸드폰은?”

주언이 노골적으로 당황하며 두리번거렸다. 윤재는 그런 주언을 바라보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

“여기.”

핸드폰을 서둘러 돌려받은 주언이 서둘러 날짜를 확인했다. 월말이 지났다. 주언은 환자복에 적혀 있는 병원 이름을 보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전화부터 해야 하나 싶어 통화 기록에 들어갔는데 부재중 통화가 하나도 없었다. 자세히 보려고 했으나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서 순식간에 화면이 꺼졌다.

“너 혹시 내 핸드폰으로 전화 받았어?”

“병원비는 내가 냈어.”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길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놀랐다.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는데.

“고맙다. 돈 바로 이체해줄게.”

“언제부터 여명훤 어머니 병원비를 네가 냈냐. 너보다 돈도 잘 벌잖아. 여명훤.”

멈칫.

“…명훤이는 몰라.”

해명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싶어서 억지로 대답을 쥐어짜 냈지만 이미 윤재는 알고 있었다.

“여명훤은 아는 게 뭐야?”

“…내가 말 안 한 거야.”

한없이 아득해진다. 윤재가 비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너네 제대로 사귀는 건 맞아? 24시간 붙어 있으면서 숨기는 게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네.”

“…….”

“지금 네가 다른 사람 걱정할 때는 아니잖아.”

드르륵.

“우주언 환자분?”

다행히 대답을 하기 전 너스 콜을 받은 간호사가 병실 문을 열었다.

“처방 약은 늘려서 드리기는 하는데 조심하셔야 됩니다. 생각보다 진행이 빨라요. 보호자 데리고 오셔서 입원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의사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신신당부했다. 고민 좀 해볼게요, 라고 대답하자 의사는 주언의 완곡한 표현을 이해했는지 이마를 짚었다.

“입원 안 하실 거면, 일주일에 한 번씩 내원이라도 해요.”

“네. 감사합니다.”

검사를 끝내고 의사가 나간 후 옷을 갈아입었다. 입원을 더 하는 게 낫다고 했지만 빨리 돌아가야 했다. 핸드폰으로 먼저 명훤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배터리가 없어서 마음이 조급했다. 부재중 통화는 없었으나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옷을 다 입었을 때쯤 윤재가 되돌아왔다. 마지막 순간이 껄끄러웠던 탓에 먼저 돌아간 줄 알았는데.

“미안. 밖에서 기다렸어? 그냥 가도 되는데.”

“데려다줄게. 가자.”

“…고맙다.”

**

집으로 돌아오자 익숙한 체취가 풍겨 어깨에 힘이 풀렸다.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회사는 윤재가 알아서 처리를 해줬다고 했다.

명훤에게만 잘 넘어가면 된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들켰을 텐데. 지금은 어떻게 잘 얼버무리면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미묘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명훤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주언의 인기척에 명훤이 눈을 떴다. 목소리가 제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나오길 빌었다.

“아직 안 자고 있었어?”

며칠 만에 본 명훤의 얼굴이 묘하게 수척해져 있었다. 주언이 걸음을 옮겨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명훤은 주언을 살펴보다 입을 열었다.

“너 아팠다며.”

“…심한 건 아니었어.”

“출장에 다녀왔다고? 급하게?”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에 윤재와 입 맞춘 이야기를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어… 응. 윤재가 급하게 조수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연락하는 걸 깜박했어.”

“나한테 다른 할 말은?”

“아. 미안해. 앞으로는 연락 꼬박꼬박 할게.”

“네 출장지가 병원이야?”

“…뭐?”

주언이 황망한 얼굴로 명훤이 무엇을 알고 있나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곧 명훤의 시선을 따라 소파 앞 테이블을 보니 병원 결제 내역서가 놓여 있었다. 주언의 것이 아닌, 일부러 회사 주소로 받도록 정해둔 내역서였다.

김은선. 이름이 떡하니 적힌 내역서.

“설마 했어. 그런데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와 있어서 전화했더니 병원이더라. 너랑 연락 안 돼서 나한테 연락했다고.”

“명훤아.”

주언이 명훤 쪽으로 다가가 그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었다. 이런 식으로 밝힐 생각은 없었다. 명훤은 애원 섞인 주언의 손길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납이라 제2 보호자한테 연락했는데, 병원비 입금됐으니 괜찮다고.”

“내가 다 설명할게.”

명훤이 싸늘한 시선으로 주언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넌 몰라.”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거 아니었어.”

“싫다고 했지. 내가 다 버려도 좋으니까 가지 말라고 했을 때 버린 여자를 왜 네가! 네가 챙겨. 그러면 내가 고맙다고 할 줄 알았어?”

명훤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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