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9화 (9/112)

#9

주언은 명훤과 오래 사귀었지만 아직 발 들이지 못하는 그의 영역이 몇 군데 있었다. 명훤은 늘 이상적인 연인이었다. 이성적으로 행동했고, 늘 배려해줬다.

“…근데 네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딱 한 번. 명훤이 에스퍼로 각성하며 크게 앓았을 때 주언은 명훤의 속마음을 들었다.

“주언아. 네가 이러면 나중에 내가 감동이라도 할 줄 알았어?”

“…아주머니한테도 이유가 있어서 그래.”

“내가!”

언성을 높이는 명훤이 낯설었다.

“무슨 이유라도 내가 싫다잖아.”

“이유라도 들어주면 안 돼?”

“어.”

단호한 대답에 주언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오지랖이었나. 두 사람 다 잘못한 건 없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한쪽은 상처를 주었고, 다른 한쪽을 상처를 받았다.

교통사고로 한 번에 가족을 잃어서, 허무하게 오해한 채로 헤어지게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병원비만 댔다. 그 이상 하는 건 명훤을 속이는 것 같아서 그냥 최소한만 했다. 자제했다고 한들 그냥 오지랖이었고, 명훤에게 또 다른 상처만 주는 셈이었는데.

주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명훤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제야 명훤이 감정적으로 구는 것도, 평소와 달리 진심을 내비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미안해. 명훤아. 앞으로 안 그럴게. 내가 너무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나 봐.”

“하….”

명훤이 커다란 팔로 주언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아플 정도로 조여오는 힘에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지만,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술을 마셨어. 몸 상하게.”

“…네가 안 와서.”

그의 더운 숨결이 목에 닿았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명훤이, 이렇게 빈틈을 보일 때가 좋았다.

“난 너만 있으면 된다고 했잖아.”

명훤이 주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잠을 계속 자지 못했는지 명훤의 숨이 곧 규칙적으로 변했다.

주언은 그런 명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단정한 머리카락이 손끝에 걸릴 때마다 어쩐지 한없이 슬퍼져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네가 나한테 질려도, 우리가 호호 할아버지가 돼도 내가 너 끝까지 안 놔줄 거야.’

그제야 실감이 들었다.

“미안….”

있는 힘껏 사랑하는 명훤과의 미래는 아주 짧을 거라는 사실이.

갈 곳 잃은 사과가 허공에 닿았다 스러졌다.

**

오래된 커플에게는 오래 만남을 이어 간 이유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긁으면 크게 부스럼 날 만한 일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고로 어제 일은 암묵적으로 없던 일이 됐다.

기억을 못 할 만큼 취해서인 건지, 아니면 기억하지만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 중 먼저 어제 일을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같이 출근하는데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쉬니 날씨가 추워진 탓에 공기가 희뿌옇게 물들었다.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서, 같이 출근하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오랜만에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밤새 자신의 몸을 감쌌던 명훤의 팔이 느껴지는 것 같아 주언은 얼굴을 붉히며 작게 미소 지었다.

옷 사이로 스미는 바람에 옷을 단단히 여몄다. 몸이 매분 매초 나빠지는 게 느껴졌다. 바람이 닿기만 해도 살갗이 쓰렸다.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연인이 되고, 이제 사귄 지 벌써 9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주언이 좋은 것과 별개로 명훤은 기분이 저조한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서로의 침묵도 익숙해졌다고 느껴졌는데, 오늘따라 유독 둘 사이의 침묵이 무겁게 느껴졌다.

“명훤아. 어제 미안했어.”

엘리베이터에 탄 후에야 주언이 겨우 입을 열었다. 어제 얘기는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주언은 자신의 실수를 그냥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일은 다시 언급하지 않고 묻어가되, 사과는 하는 게 옳았다.

“…그래.”

“그런데 있잖아.”

“어.”

“앞으로 만약에 내가 연락 못 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니까… 이해 좀 해줘.”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자주 그럴 거야?”

자신이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을 급하게 출장 가느라 그랬다고 둘러댔다. 보안 등급 때문에 출장지에서도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덧붙인 탓에 명훤이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지만, 굳이 정정해주지는 않았다.

“너도 그랬잖아.”

“…….”

주언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명훤에게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는 대답을 바랐던 거였나. 톡 쏘아붙인 말에 숨겨진 명훤의 진심을 깨닫고 주언이 쓰게 웃었다.

“따지려는 건 아니고. 나중에 혹시 모르니까 하는 말이야. 그때 딱 한 번만 봐 주라.”

비겁하지만 앞으로 주언은 두 사람의 약속을 깰 예정이니까. 지금 조금이라도 미리 용서받고 싶었다. 지금 헤어지는 게 낫다는 걸 알지만, 도저히 헤어지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주언의 말에 명훤이 미간을 좁혔다.

“우주언.”

“응?”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누구한테 연락 오거나. 그런 거.”

“아니. 없는데? 왜?”

“아냐. 아무것도 아니다.”

띵.

명훤이 됐다는 듯 고개를 젓고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했다. 더 묻고 싶었으나 불쑥 찾아온 통증에 약통을 꺼내 들었다. 물 없이 급하게 알약을 털어 삼키니 입에 쓴맛이 가득 찼다.

명훤보다 조금 늦게 사무실로 들어가자, 문 옆에 있는 정수기 앞에서 피곤한 표정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던 강노훈과 마주쳤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흘끗 강노훈 어깨 너머를 보니 명훤의 옆에 이호윤이 있었다.

“회식 못 가서 죄송했어요.”

“급하게 출장 다녀왔다며? 그때 퇴근 안 하고, 같이 갈 만한 사람이 주언 씨밖에 없었다니. 특별 수당 많이 받았어?”

“뭐. 받을 만큼요.”

“한턱 쏴야되는 거 아니야?”

강노훈이 상상만 해도 기분 좋다는 듯 흐뭇하게 웃었다.

“다음에 한 번 살게요. 저, 그리고 팀장님 면담 요청하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농담하며 웃음 짓고 있던 노훈이 잠시 멈칫했다. 뒤에 있는 명훤을 의식하는 태도에 주언도 머쓱하게 웃었다.

“…급한 일이야? 아니면 뭐 중요한 일?”

“그건 아닌데요.”

“그럼 나 지금 잠깐 시간 있어. 커피 마실래?”

“네. 제가 내릴게요.”

강노훈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갯짓으로 주언을 빈 사무실로 이끌었다.

문을 닫은 후 자리에 앉은 강노훈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언은 한 번도 먼저 면담 요청을 해본 적 없었다. 그런 주언이 출근하자마자 면담 요청이라니.

“무슨 일 있어?”

강노훈의 맞은편에 따라 앉은 주언이 손사래를 쳤다.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이호윤 씨 잘해주고 있는 거 같아서, 인수인계 조금 빨리 끝내고 싶어서요.”

“우리 팀한테 서운한 거 있어서 그런 거야?”

강노훈이 팔짱을 끼며 최근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봤다. 확실히 서운해할 만했다. 회식에서 다독여주고 풀려고 했는데 오지 못해서 이렇게 된 건가. 강노훈이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언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그저 공격 1팀에게는 아프지 않은 사람으로 비치고 싶었다.

“알았어. 호윤 씨랑 명훤 씨한테 얘기 한 번 해볼게.”

“고맙습니다.”

“…진짜 서운한 거 아니지?”

강노훈이 불안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아무래도 이호윤이 들어와서 이호윤을 명훤의 가이드로 둔 게 못내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그래. 주언 씨가 사적인 감정을 일에 끌어들이는 타입은 아니지.”

“아. 그리고 제가 부탁드린 건 비밀로 해주실 수 있나요?”

“왜?”

“다른 분들이 팀장님처럼 오해할까 봐요. 제가 다 해명하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뭐. 알았어.”

강노훈이 그제야 표정을 풀며 주언의 어깨를 다독였다. 주언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새 조금 식은 커피가 평소보다 쓰게 느껴졌다.

**

공격 1팀은 오후 1시에 일주일 전 발생한 서울 도봉구에 발생한 B급 던전으로 향했다.

등급이 아주 높지는 않지만 규모가 큰 던전이라 공격 1팀이 배정되었다. 몬스터 하나하나의 능력은 낮지만, 던전 크기가 광활해 체력이 중요한 던전이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작은 몬스터 몇 마리만 나왔을 뿐, 등급이 높은 몬스터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이 비 오듯이 났다. 던전 초입에서 발작이 일어날 징조가 보여 약을 씹어 삼켰다. 옥죄는 가슴 부근을 남모르게 쥐어짜며 고통을 삼켜냈다.

“주언 씨 괜찮아?”

“…네. 괜찮아요. 아까 점심 먹은 게 얹혔나 봐요.”

강노훈의 질문에 주언이 허리를 꼿꼿이 폈다. 태연한 척하려고 했으나 창백해진 안색과 흐르는 식은땀이 주언의 상태를 알려주고 있었다.

“잠깐 멈출까?”

“괜찮아요.”

조금만 더 견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와서 이 정도인데, 만약 긴급 출동을 하게 된다면. 아찔한 생각에 주언이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잠깐 멈칫한 사이 명훤은 이상한 흐름을 느꼈다.

“잠깐.”

기감이 뛰어난 명훤의 말에 다들 순식간에 공격 태세를 갖췄다. 그때였다.

쉬이익-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도마뱀처럼 생긴 몬스터가 벽을 타고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발이 지면을 밟을 때마다 던전 안이 흔들렸다. 벽이 아닌 늪지대에 숨어 있던 몬스터도 동시에 도약하여 공격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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