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반차는 내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왔다. 하지만 윤재의 개인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에는 예상한 시간을 한참 넘긴 후였다.
“늦어서 미안.”
“아냐. 약속 시간 정하지도 않았잖아.”
사무실에 주언을 들인 윤재는 평소답지 않게 상당히 부산스러워 보였다. 쌓여 있는 서류를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뒤늦게 차라도 내와야겠다며 케틀에 물을 부었다.
주언은 불러놓고 한참 동안 말하지 않는 윤재를 침착하게 기다렸다. 두 사람 사이에 물 끓는 소리만이 들렸다.
“만나자고 한 이유, 혹시….”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굳은 윤재의 얼굴을 보고 주언은 이해했다.
“맞구나.”
그가 만나자고 할 때부터 그가 심상찮은 이야기를 할 거라고 직감했다. 병에 관한 이야기가 화두에 오르자 윤재가 깊게 호흡했다.
윤재는 티백을 담은 컵에 뜨거운 물을 가득 부은 후에 입을 열었다.
“일단 내가 너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됐는지부터 얘기하는 게 좋겠지.”
윤재는 답지 않게 긴장하고 있는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적막이 두 사람 사이를 한참 부유한 후에야 윤재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강윤재는 특수능력기관에서 가장 예산을 많이 할애해주는 연구 실험부 소속 최연소 리드 연구원이었다.
기관에서 1등급 기밀 등급 보안 정보가 가장 많은 부서라, 소속 연구원들도 극소수의 인원 빼고는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들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지는 않았다.
강윤재는 그중 소수로 연구 실험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다 파악하고 있었고, 그중 몇 개의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그중 근 몇 년간 가장 많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풍화증 치료제 개발.
인구수가 늘어나면서 병에 걸린 인구가 점점 늘어나, 대두되고 있는 병 중 하나였다. 병에 걸린 환자가 늘었어도 가이드가 풍화증에 걸리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병에 걸린 몇 명도 등급이 일반인에 가까운 가이드였다. 능력자의 기운을 받아내는 것이 가이드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그런 가이드가 풍화증에 걸리는 건 굉장히 희귀한 일이었다.
몇 년 전부터 풍화증에 대해 관심이 있던 윤재가 팀을 꾸려 연구하게 됐고, 현재는 치료제 개발에 박차를 가해 약은 이제 임상 약리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기관과 연관된 병원은 대부분 거액의 후원금을 받고, 환자들의 신상을 넘긴다고 했다. 강윤재는 특이한 케이스가 필요해 병원에서 건네받은 정보를 검토하던 중 주언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알고 있었구나.”
앞에 놓인 차가 식을 때까지 윤재의 얘기를 가만히 듣던 주언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관의 실태에 놀라긴 했지만, 기관이 유지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불법적인 일은 일어날 거라고 막연하게 짐작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이 얘기를 할지 말지 한참 생각했어.”
윤재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연거푸 쓸어 넘겼다.
“방금까지 고민해 봤거든.”
“…응?”
윤재는 지금까지도 말하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윤재는 무수한 임상 시험을 했다. 그래서 주언의 상태가 어떤지 남들보다 더 잘 보였다.
“이런 말 묻고 싶지 않은데.”
“…….”
“생각보다 진행 속도 빠르지?”
컵을 들었던 주언의 손이 멈칫했다.
“…응.”
남이 보기에도 확연히 티가 날 정도였구나 싶어 혀끝이 썼다. 조금이라도 괜찮아 보이기 위해 애써 웃었으나 얼굴 전체가 경직되어 있어 어색하게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윤재가 인상을 구겼다.
윤재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한참 고민했지만 결국 끝에 남는 건 희미하나마 있는 가능성에 매달리는 것뿐이다.
“아직 치료 방법이 없고, 너한테는 시간이 없으니까… 이것도 보장된 건 아니지만. 난 네가 이 실험에 참여했으면 좋겠는데… 후우….”
윤재의 참담함에 가라앉은 목소리에 이상함을 느꼈다. 마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겉만 빙빙 돌고 있는 느낌.
“…뜸 들이는 데 다른 이유도 있어?”
주언이 아는 강윤재였으면 진작 권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주언의 병에 대해 안지 한 달이 넘은 후에 권한다는 건 껄끄러운 점이 있다는 뜻이다.
윤재가 말라붙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고개를 숙였다.
“주언아. 너는 1차 임상 시험이 어땠는지 들었던 적 있어?”
대답 대신 되돌아온 물음에 주언이 잠시 고민했다. 깊게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기관이 숨기고자 하는 일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국가에 소속되어 있는 만큼 기본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없는 것 같아.”
하지만 그 기관에 종사하는 윤재의 지적은 주언을 불안케 만들었다. 이제야 되짚어 생각해보니 한 번도 이에 관한 소식을 접한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실험이 항상 성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윤재가 단순히 그런 이유로 이렇게 머뭇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부작용이 가장 높은 게 1상 임상 시험인데 어디에서도 언급한 사람이 없다. 기관에서는 기존 약에서 개선된 약이 아닌, 에스퍼의 폭주를 막아주는 혁신적인 신약을 여럿 개발하면서 시대를 10년 정도 앞서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왜… 없는데?”
주언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사망 사유를 덮으려고, 임상 시험에 들어가기 전에 사망 신고 하고 비밀 유지 계약서를 쓰고 들어가.”
제1상 임상 시험의 주목적은 부작용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에 있으며, 임상 시험 대상은 비밀리에, 가족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행한다. 보안 1등급으로 지정될 만큼 위험도가 높기 때문이었다.
“…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주언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위장하다니.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얘기였다. 하지만 윤재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 못을 박았다.
“그래서 서류상으로는 없는 사람이 되는 거지.”
“…….”
“이번에는 특히 더 위험성이 높아. 비슷한 증상이 있는 병이면, 다른 임상이 끝난 자료를 참고할 텐데. 풍화증은 그런 것도 없으니까.”
그냥 임상 시험이라는 명목 아래 아무도 모르는 채로 외롭게 죽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풍화증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었으면 절대 권하지 않을 일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리더인 강윤재조차도.
목이 탔다. 실험 자체가 힘들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죽기도 전에, 죽은 사람이 되어야 할 거라곤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임상 시험을 통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닌 명훤의 얼굴이었다. 그를 혼자 남겨둔다는 생각에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명훤이한테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만약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
“지금 사전에 자세히 설명하는 것도 원래는 안 돼.”
명훤이 홀로 남겨지는 것도 무섭지만, 혼자 죽으며 잊히는 것도 무서웠다. 네가 없는 나도 싫고, 내가 없는 너도 싫었다. 서로의 삶에서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니까.
“명훤이도 기밀 등급 열람 권한이 있잖아.”
“그건 어디까지나 여명훤한테 관련될 수도 있는 일에 한해서야.”
“기관에 몇 없는 S급 에스퍼잖아.”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열람할 수 있는 정보 권한이 확장될 터였다. 그러니까 그 시기를 조금만 앞당길 수 있다면. 그러면 명훤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릴 수도 있었다.
“…주언아. 그건….”
감정이 격해져 횡설수설 말하던 주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 하나만을 위해 정부에서 그런 권한을 줄 리 없는데. 과열된 생각의 허무맹랑함에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다.
“미안.”
사적인 감정 때문에 안 되는 걸 해달라고 말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주언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겨우 이성을 되찾았지만 속은 여전히 토할 것처럼 울렁거렸다.
“너무 흥분했나 봐.”
“당장 정하라는 거 아니야.”
주언은 손톱을 깨물며 다리를 떨었다. 공기가 너무 무거웠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짓눌리는 것 같았다. 괜찮은 척했지만, 무서워서 회피했을 뿐이었다. 눈가가 뜨거웠다. 갑자기 오른 열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 죽기 싫어. 윤재야. 나 죽는 게 너무 무서워.”
괜찮은 척했지만, 괜찮은 적 없었다. 매분 매초 자신이 죽을 거라는 공포감은 주언을 좀먹어갔다. 누구에게도 한탄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죽음이 피부를 타고 자신에게 침투해 강제로 날것의 현실을 마주하게 만들 테니까. 그러면 자신은 무너져 내렸을 테니까. 그래서 참고 또 참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제안밖에 없어서 미안하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주언일 테지만, 그렇다고 윤재가 괜찮은 건 아니었다. 윤재가 착잡한 얼굴로 눈가가 빨개진 주언에게 사과했다.
“조금만 시간을 줘.”
윤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간은 많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정하기 이전에, 아직 정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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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다가온 계절의 공기는 차가웠으나, 여전히 한낮의 햇살은 따스했다. 일찍 출발했지만 도착하니 어느덧 해는 가장 높은 곳에 떠 있었다.
주언이 들른 곳은 장기 입원 환자들이 주로 있는 파주 외곽에 있는 병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