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읏.”
병원에 들어가자 주언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시한부라고 통보받은 후부터 병원 특유의 공기가 역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요즘 들어서는 표정 관리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지나가던 간호사가 당황한 듯 주언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가 물었다. 주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을 폈다.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가장 높은 층의, 끝 방에 도착한 주언은 혀로 아랫입술을 축인 후 문을 노크했다.
똑똑.
“네.”
안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침입자를 허락했다. 병실 문을 열자 쏟아져 내리는 햇살 사이로 선이 아주 가느다란 중년의 여인이 보였다. 가냘픈 선이 그녀가 병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이제는 병원 식단 말고 다른 거 먹어도 된대서 사 왔어요.”
하지만 다행히 이제는 재활 치료만이 남아 있었다.
각종 케이크와 차, 괜찮은 한정식 집에서 사 온 식사류까지. 손 가득 들고 온 쇼핑백을 하나둘 내려놓으니 김은선이 손사래 치며 눈시울을 붉혔다.
“뭐 이런 걸 사 와요. 난 괜찮아요, 정말….”
주언은 근 몇 년간 김은선을 찾는 유일한 방문객이었다. 같은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과 사이가 나쁘지는 않지만,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건 씁쓸한 일이었다.
김은선이 서둘러 옆에 접혀있던 의자를 펴며 자리를 내주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주언 씨 얼굴색이 나보다 훨씬 안 좋은데요?”
“요즘에 일이 많아서요.”
여명훤의 어머니. 김은선.
명훤도 은선도 주언에게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아 짐작할 뿐이지만 어렴풋이 두 사람이 숨기고자 하는 이야기가 명훤의 부친과 관련됐다는 것은 눈치챘다.
짐작해 보았을 때 김은선은 명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조건으로 집에서 쫓기듯 나간 후 명훤을 보지 않았다. 명훤은 전후 사정조차 모른 채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명훤은 그 사실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주언이 김은선을 만난 것은 의도되지 않은, 기적에 가까운 우연이었다. 김은선은 우연히 명훤의 부서를 알게 되고 딱 한 번 몰래 보러 왔을 때 쓰러졌고, 주언이 그녀를 발견해 병원에 데리고 가 그녀가 명훤의 어머니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절대 명훤과 마주쳐서는 안 된다고 애원했으나 때때로 명훤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로 싫어하다 못해 증오해서 안 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주언은 명훤이 언젠간 그의 어머니를 용서할 거라고 믿고, 몰래 병원비를 대주었다.
‘난 너만 있으면 된다고 했잖아.’
그 말을 하던 얼굴은 괴로워 보였다. 하지만 명훤은 명백한 거절의 뜻을 보였다. 괜히 자신이 멋대로 판단해서 명훤을 다시 상처 입혔다.
“요즘 바쁠 때인가 봐요?”
“인사이동이 있어서요.”
주언이 어색하게 웃었다. 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은선이 우물쭈물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잘 지내죠?”
이건 자신을 향한 물음이 아니다. 바쁘다는 말에 걱정된 모양이었다.
“네. 잘 지내요.”
“그래요? 다행이네.”
은선은 명훤의 이름을 입에 담는 걸 어려워했다. 주언은 한순간의 사고로 가족을 한 번에 잃었으니까 다시 볼 수 없다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배려하다가 일어난 일이니까.
“저….”
주언이 머뭇거리자 은선이 먼저 주언에게 말했다.
“할 말이 있으시죠?”
“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부담 가지지 말고 편하게 해줘요.”
주언이 결심했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쉽지만 자신이 나설 역할은 아니었다. 주언은 명훤의 사람이었다.
“앞으로 못 올 거 같아서요. 해외 출장이 잡혀서요. 죄송해요.”
묻지도 않는 이유까지 덧붙인 주언은 어색하게 웃었다.
은선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으나 곧 따뜻하게 웃었다. 눈매 끝이 살짝 접히자 명훤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죄책감이 배가 되어 고개를 숙였다. 은선은 주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내가 신세를 갚을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죄송해요. 제가 결국 한 건 아무것도 없네요.”
“중간에서 많이 곤란했을 거 알아요. 미안해요. 짐밖에 안 되네. 내가.”
“아니에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퇴원한 후에 뭐라도 해줘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뭐 바라고 말씀드린 거 아니에요.”
“고마워요. 정말.”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은선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다음에 한 번 더 올게요.”
주언이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은 거였다.
역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보고 싶었다. 오지랖인 것도 알고, 명훤도 괜한 걸 다시 묻는다고 화내리라는 것도 알았다. 만약 자신에게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이기도 했다.
**
보호자로서 은선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의사와의 면담까지 시간이 제법 남아, 리셉션에 가서 퇴원 전까지의 병원비를 현금으로 먼저 지불했다.
간호사가 살가운 목소리로 주언에게 말을 걸었다. 평일에 월차를 내고 나와서인지 병원 안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방문인은 주언 외에 한두 명밖에 없는 듯했다.
주언의 앞에서 눈치를 보다가 입술을 달싹이던 간호사가 은근슬쩍 대화의 물꼬를 텄다.
“곧 환자분이 퇴원하셔서 좋으시겠어요.”
“네. 뭐.”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주언이 고개를 들었다. 간호사는 환자와 거금을 선뜻 내는 주언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주언이 순순히 대답하자 간호사는 대화를 더 해도 괜찮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두 사람 근데 무슨 관계인지 여쭤봐도 돼요?”
진짜 궁금한 용건은 이거인 듯했다. 간호사의 질문에 뒤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던 간호사들도 이쪽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주언은 잠시 머뭇하다가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애인 어머니세요.”
“애인이 좋아하시겠다.”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간호사가 눈을 크게 떴다. 말만 해도 달콤하게 감기는 단어에 주언의 말간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명훤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을 텐데. 어떻게 다시 이 문제를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간호사가 한창때 같다며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다. 그도 한창때 지금의 부인과 내외하던 시절이 있었다며 웃었다.
대화가 끝난 후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도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냥 의사 사무실 앞에서 기다릴까 하는 차에 전화가 울렸다.
Rrrr.
화면을 확인한 주언은 서둘러 비상계단이 있는 쪽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팀장님. 무슨 일 있나요?”
강노훈 팀장이 월차를 낸 직원에게 전화를 거는 건 드문 일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잔뜩 긴장하며 받자 강노훈이 도리어 당황하며 서둘러 변명했다.
-아니, 오늘 월차 냈는데 마침 오늘 팀 교체 건으로 연락받아서. 일주일 후쯤으로 앞당겨 줄 수 있다고 해서. 어떻게 할 건지 다시 물어보려고.
“네. 괜찮아요.”
급박한 소식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유쾌한 소식도 아니었다.
-목소리가 안 좋은 거 같은데? 괜찮아?
“네. 괜찮아요.”
-다른 팀 가도 자주 놀러 오면 되지. 송별회도 내가 크게 해줄 테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제가 앞당겨달라고 한 거잖아요.”
-주언 씨가 많이 불편했을 거 알아서 미안해서 그러지.
“괜찮아요.”
벽에 등을 기대자, 벽 특유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체온이 빠르게 내려가며 주언의 몸에 시원함이 감돌았다. 주언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래. 그럼. 오늘 쉬는 사람 오래 안 붙잡고 있을게.
“네.”
-참. 명훤이 오늘 급하게 출장 가서 연락 안 될지도 몰라.
왜 이런 말을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어야 하는지. 이런 걸로 슬퍼하면 안 된다. 그러면 슬퍼할 일들이 넘쳐나서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전화를 끊고 잠시 그대로 서 있는데 진동이 울렸다.
우우웅.
다시 전화가 온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진동은 자신의 핸드폰이 아니라 건물 전체에서 울리고 있었다.
벌컥.
서둘러 비상계단 문을 열고 밖을 나가자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이동하고 있었다. 주언은 때마침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눴던 간호사를 붙잡았다.
“죄송한데 무슨 일 있나요?”
“지금 확인하고 있어서, 잘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간호사는 대답 후에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언은 창문 밖을 살폈다. 한눈에 이질감이 느껴지는 장면이 시야에 잡혔다.
불행은 때때로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마치 지금처럼.
“저기는….”
주언이 아연실색하며 중얼거렸다.
병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멀쩡했건 건물 일부가 훼손되어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주언이 헛숨을 들이켰다.
“아주머니가 있는 곳인데…?”
반 박자 뒤늦게 저 건물이 입원 병동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은선은 거의 다 나았지만 재활 치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걷지 못했다.
그 생각이 머리에 들어온 순간 주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 순간 바로 모든 걸 내팽개치고 그대로 병동 쪽으로 달려나갔다. 가이드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게 분명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