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14화 (14/112)

#14

“서류만 정리하려고… 갔었어.”

“…….”

“미안. 그리고 나 이제 부축 안 해줘도 돼. 괜찮아.”

주언의 변명에도 명훤은 아무 말도 없었다. 명훤아, 라고 운을 떼며 이유를 재차 말하려던 것도 잠시였다. 명훤이 고개를 숙였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자신의 위로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가장 속상한 건 명훤일 텐데, 어깨를 토닥여줘야 하나 싶어 손을 뻗었을 때였다. 뜨거운 혀가 주언의 목에 예고 없이 닿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온몸의 감각이 쭈뼛 섰다.

“읏.”

질척이는 혀에 야릇한 느낌과 동시에 옅은 통증이 느껴졌다. 혀가 쓸고 지나간 자리가 화끈거렸다.

“무슨…! 여명훤!”

주언이 다급히 부른 이름에 명훤이 혀를 뗐다.

“너는 네가 다친 것도 몰랐지.”

“어? 다쳤어?”

아마 계단 앞까지 달려갔다가 폭발과 함께 나뒹굴었을 때 생긴 상처인 듯했다. 다른 일로 정신없어서 아픔을 느끼지 못해 다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너 신경 써.”

“응.”

명훤이 손끝으로 주언의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갑작스러운 온기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조심 좀 하고 다녀.”

“…응.”

“집에 조심히 가고.”

“아냐. 나 있어도 돼.”

“아니.”

“…….”

“나머지 내가 할 테니까.”

“나는 괜찮아. 너야말로 잠도 제대로 못 잔 거 아니야?”

가까이서 보니 얼굴 결이 거칠어 보여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주언의 손이 닿기 전 명훤이 안고 있던 주언의 허리를 놓았다. 갑자기 벌어진 거리는 고작 한 발자국이었지만, 유독 거리감이 멀게 느껴졌다.

“난 괜찮아.”

“명훤아.”

다짐하는 듯한 목소리에 주언이 넘을 수 없는 벽이 견고하게 서 있었다. 이제껏 있었지만 투명해서 모르는 척했던,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벽.

“그냥 이 얘기 더 하지 말자.”

주언은 잠시 말을 고르고 골랐다.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은선의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짧은 말이 더 나을 것이다.

“명훤아. 아주머니께서는 널 절대 버린 게 아니라….”

무언가를 인내하는 듯 명훤의 턱이 도드라졌다. 그는 주언의 말을 끊어내고, 한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알아.”

“어?”

“안다고. 바로 안 건 아니지만. 그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으니까.”

주언이 눈을 끔벅거렸다.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명훤이 은선을 보지 않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으니까.

“그럼 왜….”

아주머니를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았어?

요즘 들어 명훤을 이해하기 어려워졌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너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오만이 잘게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사막에서 부는 바람처럼 작은 입자가 된 가루가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주언을 바라보는 명훤의 시선이 일순간 예리하게 빛났다.

“난 나를 약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싫어.”

“…….”

명훤이 능력을 써서 제 심장에 폭발의 씨앗을 박아넣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팠다.

슬프기보다는 아팠다. 이게 네가 선택한 살아남는 방식이구나 싶어서. 자신의 존재가 날카로운 그의 방식을 무뎌지게 하긴커녕 더욱 날을 갈게 할 것 같은 미래가 보여서.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괜히 휴가 더 쓰지 말고 돌아가.”

**

약해지는 자신을 명훤이 지켜보도록 둘 수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명훤의 말을 듣고 주언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서 주언은 명훤에게 말하지 않고 윤재가 제안한 임상 시험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조금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 가능성에 비굴하고 처절할 정도로 매달려 살아남으리라 다짐했다.

똑똑.

윤재는 새벽에 별안간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다른 동료도 밤을 새웠거니 하고, 검토하고 있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네.”

벌컥.

“…주언이?”

밤을 새우고 동이 틀 때까지 일하고 있던 윤재는 갑작스러운 주언의 등장에 멍청한 얼굴로 두 눈을 끔벅였다.

“밖에 보니까 불이 켜져 있어서….”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겨서. 내가 만약 살아남는다면…. 그러면 명훤이한테 돌아가도 돼?”

아주 희미한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이른 새벽 갑작스레 찾아온 주언이 테이블을 양쪽 손으로 짚으며 저돌적으로 물었다. 그런 주언의 모습을 놀란 듯 바라보던 윤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다른 신분으로 살게 되겠지만, 내가 그거까지는 손써 볼게.”

1상 임상 시험은 최소로 잡아도 3년이었다. 윤재는 그사이에 자신이 기관 내에 어떤 입지를 가질 수 있을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그때쯤이면 주언이 바라는 걸 이뤄줄 수 있을 정도의 입지는 가지게 될 것이다.

“고마워.”

“마음 정했어?”

“…응.”

주언의 긍정에 윤재가 아랫입술을 혀로 쓸었다. 기쁜 소식이었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막중해졌다.

“일단 앉아. 생각 많이 하고 온 거 같은데. 물어볼 게 이거 하나이진 않을 거 아니야.”

윤재가 일어서 앞에 놓인 접객용 소파 옆에 있는 케틀에 물을 올렸다. 주언이 자연스럽게 윤재의 맞은편에 앉았다.

“부작용을 확실히 알고 싶어.”

주언의 말에 윤재는 아까 앉아 있던 책상에서 서류를 하나 가져왔다. 마침 그 부분에 대해 살피고 있던 중이었다.

“일단 짐작하는 부작용은 기억 상실, 근육 섬유화, 감정 조절장애가 가장 큰 부작용이라고 생각되고 있어. 물론 그 부작용이 될 만한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고 진행할 거고.”

“그렇구나.”

“다른 물어볼 거는?”

마음먹었지만 막상 들으니까 무서웠다. 윤재는 뭐든 대답해주겠다는 듯 얼어붙은 주언에게서 다음 질문을 종용했다.

“…소지품은 가지고 갈 수 있어?”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소지품은 안 돼.”

“사진 같은 것도 안 된다는 소리네.”

주언이 명훤과 추억할 수 있는 모든 건 금지라는 소리다.

“그렇지.”

주언은 몇 가지 질문을 더 했고, 윤재는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찾아온 만큼 질문이 많지는 않았다. 윤재는 이왕 온 김에 시험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진짜 고마워.”

“괜찮아.”

명훤은 쓸데없다고 할지 몰랐다. 몇 년 사이에 자신을 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주언은 후자의 가능성을 더 크게 믿고 싶었다.

“늦은 밤 찾아와서 미안하고.”

“뭐가 그렇게 고맙고 미안해. 그래도 다음에는 연락하고 와. 내가 출근 안 했었으면 어쩌려고.”

“지금 마음먹어서 확실히 말해두려고.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주언이 손이 희게 질릴 정도로 주먹 쥐었다.

‘2주’

임상 시험을 조금 더 앞당겨 2주간의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했는데 사무실은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주언 씨 괜찮아?”

“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주언의 상투적인 대답에 노훈이 작아진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 기사 난 거는 괜찮아?”

“네?”

“…몰랐어?”

“무슨 기사요?”

“몰랐어?”

“네. 계속 장례식장에 있었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주언의 반응에 노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찌라시 기사긴 하지만 아는 사람이 보면 알 수도 있는 내용이라….”

노훈이 A 씨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명백히 주언인 것을 알 수 있는 찌라시 기사를 보여주었다.

[이번 병원 폭발 사건에 특수능력기관 1팀에 소속되어 있는 A 씨도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알리바이는 있지만 그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수 있는 것도 같은 기관 동료.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다음 달에 팀 강등 예정인 A 씨. 일련의 일은 모두 단순한 우연인가?]

짜 맞추는 기사였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충분히 의심이 들 만한 내용이었다. 주언이 범인이라는 듯한 뉘앙스가 짙게 풍겼다.

‘명훤이도 알려나.’

기자가 말한 걸 다 믿지는 않겠지만, 자세히 설명은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장례식장에 있을 명훤이 신경 쓰여 핸드폰을 흘끗 바라봤다. 전화해볼까. 혹시 마침 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방해하고 싶지 않은데… 톡이라도 남겨둘까 싶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혹시 했지만 역시나 명훤에게서 연락은 와있지 않았다.

“…씨.”

“…….”

“주언 씨?”

“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길래 말을 못 들어요.”

“들었어요, 죄송해요.”

서윤진이 어깨를 토닥이며 유쾌하게 웃었다. 주언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반사적으로 들었다고 했지만 사실 못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거지. 주언이 난감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꾹 손가락으로 누르며 곤란해하던 차에, 윤진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삼겹살 말고 항정살이 더 맛있대요. 골목에 있는 곳 말고, 바로 앞에 있는 곳.”

“아아. 그래요?”

업무 얘기가 아니구나.

평소에 윤진과 저녁 메뉴 얘기까지 시시콜콜 하는 사이라 다행이었다. 주언이 안심했다는 듯 웃자 윤진이 수상하다는 듯 의자를 주언 쪽으로 틀었다.

“요즘 주언 씨 속 많이 시끄럽죠.”

“네?”

“요즘 들어 멍 때리는 횟수도 늘고, 대화도 잘 안 하고 그랬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대충 얼버무리려다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윤진의 물음에 주언이 멋쩍게 웃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