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15화 (15/112)

#15

“아무래도 팀 옮기는 것 때문에 그런 거 같은데… 빨리 옮기게 됐다면서요. 주언 씨가 원하면 내가 따로 건의해볼까요?”

“아뇨. 제가 더 빨리해 달라고 한 거예요.”

“이제 우리 팀은 보기 싫어서?”

“아닌 거 아시잖아요.”

“어어. 이제 내가 아쉬운데?”

장난기 섞인 미소에 윤진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가볍게 말했다는 걸 눈치챘다. 자신에게 있어 과분한 팀이었다. 사람을 은근 가려서 많이 걱정했는데, 명훤이 같은 팀이 됐다는 이유도 있지만, 윤진이 곁에서 잘 도와준 덕분에 공격 1팀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저도 팀 옮기는 거 진짜 아쉬운데… 제 개인적인 감정으로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그래도 아쉬워할 수는 있죠. 나 엄청 아쉽거든요.”

윤진이 좋은 직장 동료 구하기 너무 힘들다며 이호윤이 있는 쪽을 흘끗 보며 속삭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될지 몰라 어색하게 웃자 윤진이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

“명훤 씨랑 싸운 건 아니죠?”

“네?”

“번갈아가면서 안 오길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사정이 생겨서요.”

명훤의 사적인 얘기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어서 얼버무렸다. 때마침 자리에서 일어선 노훈이 두 사람이 있는 자리로 찾아왔다.

“윤진 씨, 주언 씨. 점심 먹으러 안 가?”

“가요.”

주언은 반사적으로 아무도 없을 게 분명한 명훤의 자리를 살폈다. 텅 빈 자리를 훑으며 자연스럽게 그 옆자리인 이호윤의 자리에도 시선이 갔다. 자연스럽게 이지우도 핸드폰을 챙겨 노훈의 옆에 섰다.

“호윤 씨는요?”

보통 점심은 팀원들 다 같이 먹었지만, 아무도 호윤에 대해 묻지 않아 주언이 먼저 물었다.

“호윤 씨는 먼저 나가던데요?”

“그래요?”

“얼른 가요. 늦으면 또 줄 서야 돼.”

걱정한다고 말한다면 위선일 것이다. 그렇다고 팀 생활이 힘들 정도로 못 지내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저열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조금만, 자신이 있을 때만큼은 너무 사이 좋지 않기를 바랐다.

식사 후 명훤에게 연락할까 했으나, 이호윤이 반차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하지 않았다. 둘이 같이 있을 확률은 적지만, 만약 전화했을 때 두 사람이 같이 있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무서웠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이제는 익숙하게 약을 먹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저 지루하게만 흘러가던 시간이 야속할 정도로 빨리 스쳐 지나간다.

윤진이 한 자세로 오래 있었더니 몸이 찌뿌드드하다며 기지개를 켰다.

“이제 내일만 지나면 주말이네요. 얼른 쉬고 싶다.”

던전에 가지 않는 날은 단순 업무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근래 들어 이호윤의 합류로 던전에 가게 되는 일이 잦아 팀의 퇴근 시간이 평소보다 늦어지는 일이 많아졌다.

이호윤에게는 아직 업무 배분을 하지 않았고, 주언도 팀 교체 직전이었기에 새로운 일을 받지 않았다. 대신 기간 내에 서류 업무를 끝내야 해서 업무량이 적어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주언은 내일 이후부터는 던전에 가는 건 그만두게 되어, 평소와 엇비슷한 시간에 퇴근할 수 있었다. 나머지 기존 팀원들만 고생이었다.

“그러게요. 근데 이제 곧 업무 배분 다시 하지 않을까요.”

“얼른 그랬으면 좋겠네요.”

주언은 평소와 엇비슷한 시간에 업무를 마쳤다.

“저 먼저 퇴근해보겠습니다.”

“일 다 끝났어요?”

“오늘 할 일은요.”

“부럽다.”

윤진의 부러움 섞인 배웅을 받으며 주언은 사무실을 벗어났다. 시간을 보니 이대로 가면 조금 늦을 수도 있겠다 싶어 걸음을 재촉했다. 주언은 곧장 집에 가는 대신 평소에 오며 가며 외관만 보았던 번화가 부근에 있는 가게 앞에 섰다.

지나갈 때마다 깔끔한 외관에 시선이 갔던 곳이지만, 한 번도 이 안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붉은 벽돌색의 외관에 깔끔한 네온사인 간판이 하나 걸려 있는 곳은 타투샵이었다.

소지품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며, 부작용 중 하나는 기억 상실이다. 윤재가 알려준 주의 사항은 많았지만 주언에게 가장 크게 와닿은 건 두 가지 사항이었다.

“도안 밑그림 그렸는데 마지막 확인 한 번만 더 해주세요.”

타투이스트가 살 위에 도안을 그리는 걸 마쳤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도안을 그린 부위에 거울을 비춰주며 주언에게 확인을 부탁했다.

“네. 좋아요. 이렇게 해주세요.”

타투 위치를 정할 때 생각 없이 정했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만지는 건 생각보다 기분이 이상한 일이었다. 중요한 부위는 아니었지만 명훤 외에 한 번도 타인에게 보여준 적 없는 곳이었다.

“흑.”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입술을 깨물었는데 그 사이로 빠져나온 신음에 주언이 가장 놀랐다. 타투이스트는 이런 상황을 자주 겪었는지 태연하기 그지없었으나 주언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사과까지 했다. 명훤과 밤을 보내며 허벅지 안쪽이 예민하다는 건 알게 됐지만, 고통에도 취약하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주언은 간이침대 끄트머리를 세게 쥐었다. 피부를 찌르는, 낯선 아픔에 신음을 흘리지 않도록.

**

창문이 없어서 몰랐는데 타투를 끝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진 후였다.

쏴아아-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렸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센 비였다. 가게 앞 주홍색 가로등이 깜박거렸다.

“…그냥 갈까.”

이런 날씨에 그렇게 멀지 않은 도착지까지 가는 택시는 없을 것이다. 비와 함께 바람이 세게 몰아쳐서 우산을 쓴다고 해도 흠뻑 젖을 것 같았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걸을 때마다 신발이 젖어 들어갔다. 가을 끝 무렵에 내리는 비라 그런지 춥기 그지없었다. 너무 미련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미 몸은 흠뻑 젖었다. 주언은 걸음을 재촉해 빨리 걸었다. 온몸은 온도가 식어가는데 허벅지 안쪽은 걸을 때마다 살갗이 스쳐 화끈거렸다.

삐삐삐삐.

띡. 띠리리.

현관문을 열자 주언이 집에 잠깐 들렀었던 때와 똑같은 상태로 불이 전부 꺼져 있었다. 텅 비어 있는 집 안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달칵.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침실에서 상의를 벗은 채로 나오던 명훤과 마주쳤다. 우습게도 싱숭생숭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어? 집에 있었어? 불도 안 켜고 뭐 해?”

“옷만 갈아입고 나가려고. 왜 그렇게 젖어 있어?”

또?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주언이 들어와 켜졌던 현관문 자동 센서 등이 꺼졌다.

“밖에 비 와서… 맞고 왔어.”

주언은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얼른 들어와.”

“…가지 마.”

자신답지 않은 말이었다. 명훤도 평소의 주언과 다르다는 걸 눈치챘는지 멈칫했다.

어디 가는지도 묻지 않았다. 어디를 향하는지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외롭고 힘들고 아픈 나를 조금이라도 알아주고 보듬어주길 바랐다. 말하지 않고, 그런 걸 바라는 건 이기적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

“무슨 일 있어?”

톡.

주언은 대답 대신 단추를 위에서부터 천천히 풀어 내렸다. 옷은 물에 젖어 무거웠고, 계속해서 몸에 남아있는 온기를 앗아가고 있었다.

톡.

단추를 천천히 풀 때마다 명훤도 숨을 죽이고 주언의 손끝에 시선을 두었다.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갈수록 명훤의 시선도 내려갔다. 짙어진 시선에 손끝이 떨렸으나 주언은 멈추지 않았다. 겉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움직임 탓에 현관문 센서 등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안아줘.”

데어도 좋으니까. 네 열기에 잠식당하고 싶다.

항상 부끄러워서 명훤에게 넘겼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일을, 이번에는 주언이 먼저 했다.

“…….”

명훤은 굳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못에 박힌 듯 주언에게 닿아 있었다.

너무 나답지 않았나. 서툴기 그지없는 유혹이었다. 사귀는 9년 내내 이런 식으로 주언이 먼저 유혹하는 건 처음이었다.

‘너무 서툴렀나.’

주언이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밋밋한 가슴팍이 보였다.

“…싫으면… 말, 흣?”

명훤이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와 주언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흐읏…!”

명훤은 주언의 손목을 벽에 밀어붙인 후 턱을 비스듬히 돌려 주언의 입술을 갈취했다. 주언은 자유로운 한 손을 명훤의 목에 둘렀다.

명훤의 뜨거운 혀가 밀려 들어왔다. 불이 붙은 명훤이 아까보다 열렬하게 주언을 껴안았다. 두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센서 등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잠시 입술이 떼어지고 명훤이 주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너. 그런 거 어디서… 하.”

“하아….”

명훤이 주언의 아랫입술이 살짝 아플 정도로 씹자, 주언이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입을 벌렸다. 그의 열기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마치 사막에서 찾은 오아시스처럼 명훤은 주언의 타액을 삼켰다.

명훤이 노골적인 뜻을 품고 몸을 밀착시켰다. 눈을 감고 있던 주언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놀란 주언을 보고 입술을 뗀 명훤이 고개를 틀어 주언의 귓불을 입 안에 넣었다. 입 안에서 귓불을 굴리자 질척거리는 소리가 한층 더 선명하게 들려서 주언의 몸이 움찔 떨렸다.

“팔 제대로 둘러.”

명훤이 낮아진 목소리로 주언에게 속삭였다. 주언이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고, 명훤은 그런 주언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명훤은 주언을 침대 위에 눕혔다. 완전한 어둠 속, 두 사람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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