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명훤은 주언의 위에 올라탄 후, 주언의 입술에 잘게 입을 맞췄다. 그의 손가락이 살결을 쓸 때마다 몸이 달달 떨렸다. 숨이 가빠 와 호흡할 때마다 주언의 갈비뼈가 도드라졌다.
위에서 배회하던 손이 아래로 내려갔을 때, 그의 손가락이 한 지점에 멈춰 섰다. 몸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열기가 아니라 상처가 나서 부은 듯한 열기였다.
“이거 뭐야?”
명훤이 주언의 허벅지 안쪽에 새겨진 글자를 더듬었다.
Remember 0515.
우리가 처음 특별한 관계가 됐던 그날을. 내가 결코 잊지 않기를.
“별거 아니야.”
“우주언.”
“나한테 그런 거 물어볼 정도로 여유 있어?”
“뭐?”
“난 여유 별로 없어서.”
일부러 도발하듯 말하며 주언은 명훤의 상반신을 더듬거렸다. 손가락 끝으로 그의 매끄러운 피부 아래에 있는 단단한 근육을 훑었다.
주언을 향락에 빠트린 명훤의 온기가 주언의 온몸을 감쌌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미약한 고통이 동반했지만, 곧 고통 끝에서 쾌감이 서서히 비중을 키우기 시작했다. 주언은 감각이 미쳐 날뛰는 느낌에 명훤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미, 미안해.”
“뭐가?”
“그냥 다….”
격한 쾌감에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주언이 명훤의 뺨을 쥐었다. 단단한 턱이 도드라지는 게 느껴졌다.
명훤은 주언의 사과를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주언이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명훤의 체취가 주언의 온몸 구석구석에 배일 정도가 될 때까지 명훤은 주언을 놓아주지 않았다.
불로 낙인을 찍는 것처럼 문신을 새긴 피부 위가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새벽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말살된 밤이었다.
**
원래 우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일어났을 때는 희미하게 동이 트고 있었다. 새벽 특유의 푸른 빛 아래 어젯밤 흔적이 들어왔다.
“으으.”
몸을 반쯤 일으키니 오랜만에 무리해서 그런지 허리가 뻐근하게 아파왔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짚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정도가 좀 심한가?’
고개를 숙이자 온몸에 짙은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밤새 얼마나 물어댄 거야, 하며 작게 투덜거렸지만 주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주언은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얻은 안정감과 편안함이 섞인 사랑도 좋았지만, 가끔 서로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불타오르는 사랑도 좋았다.
조금 더 곁에 누워있으려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시야 안에 명훤의 등이 보였다. 손가락 끝으로 탄력 있는 등을 살짝 찌르자 그의 근육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앞으로 이렇게 등을 보고 누워 있을 날이 며칠이나 있을까. 명훤에게 자신의 상태는 말할 수 없으니, 이제 2주도 채 안 되는 시간에 같이 있어 달라고 직접적으로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지 않기로 정했으니까.
임상 시험에 들어가기 전에 헤어지자고 할까도 고민해봤다. 그런데 우리 관계가 연인이 아닌 순간을 견뎌낼 수 없을 거 같아서, 연인인 채로 살아남고 싶어서.
‘이기적인 선택이겠지.’
주언은 닿지 않을 사과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흣….”
고통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 주언이 빠르게 입을 틀어막아 신음 소리를 죽였다. 증상이 악화되어 가이딩이 아니라 순수한 신체 접촉만으로도 안 좋은 영향을 받는 걸지도 몰랐다. 진행 속도가 빠른 것도 어쩌면….
‘풍화증은 에스퍼 곁에 있는 거 자체가 독이야.’
윤재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피해서 하루 더 살 수 있다고 하면 주언은 하루라도 명훤과 더 붙어있는 걸 택할 것이다.
약이 어디에 있었더라.
어제의 기억을 한참 더듬던 주언은 현관에 가방을 내팽개친 것이 떠올랐다.
귀가 밝지만 안심한 채로 잠들면 깊이 잠자는 명훤이기에 최대한 자신의 옆에서는 편히 잠자게 해주고 싶었다. 곤히 자고 있는 명훤을 의식해서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우욱.”
헛구역질이 나왔다. 소리를 낼까 봐 입을 막고 나오던 중이라 다행이었다. 주언이 손을 떼자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아… 으….”
주언의 손이 검붉은 피에 젖어 있었다. 잠깐 사이에 식은땀에 등이 흠뻑 젖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을 입에 욱여넣었다. 약을 씹을 때마다 입 안에 쓴맛이 가득 퍼졌다. 곧 서서히 진정되는 느낌에 몸에 힘이 쭉 빠져 잠시 현관 앞에 주저앉았다. 몸이 완전히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절대 적응할 수 없는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내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쏴아아.
어느덧 완전히 날이 밝았다. 세면대 물을 세게 틀고 피를 흘려보냈다. 꼼꼼하게 피의 흔적을 지웠다.
달칵.
피를 겨우 다 치웠을 때쯤 침실 문이 열렸다.
“벌써 일어났어?”
주언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태연한 척 명훤을 반겼다.
“이제 슬슬 출근할 시간인데.”
“벌써 그렇게 됐어?”
“뭐 하고 있었어?”
“냉장고에 뭐 먹을 거 있나 보고 있었어. 별거 없네. 토스트 괜찮지?”
“응.”
한동안 밖에서 계속 먹었더니 냉장고가 텅 비어있었다. 오늘은 식탁에 나란히 앉아서 같이 밥 먹고 싶었는데. 주언은 냉동실에 있던 식빵을 꺼내 토스터에 넣고, 케틀에 물을 올렸다.
명훤이 컵 두 개를 꺼낸 후 커피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사는 건 이런 거였다. 한동안 같이 지내지 못해도 서로의 습관을 속속들이 아는 것.
“우리 퇴근 후에 같이 장 봐서 밥 먹을까? 내일 주말이잖아.”
“오늘은 안 되잖아.”
“왜?”
“오늘 저녁, 네 송별회잖아.”
“…그랬나?”
“어제 말했다고 하던데 못 들었어?”
어제 옆에서 삼겹살 어떠냐는 윤진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때 했던 얘기가 자신의 송별회 이야기였구나.
“아. 응. 잠깐 까먹고 있었네.”
주언이 잘 구워진 토스트를 접시 위에 담고, 냉장고에서 잼을 꺼낸 후 명훤의 맞은편 자리에 있었다.
“너 머리 뻗쳤다.”
“…너도.”
오랜만의 평화다.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주 잠깐만, 지금 이 순간만.
해야 할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건 주언의 나쁜 버릇 중 하나였다.
“송별회 늦게까지는 안 할 것 같은데. 그럼 끝난 후에 돌아와서 잠깐 얘기하자. 나 할 얘기 있어.”
찌라시 기사가 진짜가 아니라고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자신이 없을 때 명훤이 그런 이야기를 듣게 해서 흔들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제 주언의 최선이었다. 명훤도 어렴풋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았다는 듯, 별말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세상이 멸망해도 회사는 가야 한다는 누군가의 우스갯소리처럼. 아무리 자신이 죽어간다고 한들 회사 일은 변함없었다.
일을 끝마치고 시간이 조금 남아서 윤진의 업무를 도와줬다. 주언은 오랫동안 화면을 보고 있어 뻐근해진 어깨를 주무르며 마지막으로 윤진에게 보낼 파일을 검수했다.
“윤진 씨. 맡긴 서류 다 했어요.”
“벌써요? 주언 씨 이제 다른 팀 가면 누가 내 일 도와주냐.”
“윤진 씨도 제 일 많이 도와줬잖아요.”
윤진이 그래도, 하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아, 주언 씨.”
노훈의 목소리에 주언이 고개를 돌렸다.
“네?”
“오늘 송별회. 2팀도 친목 도모하고 싶다고 같이 하자고 하는데 어때?”
“2팀이요?”
“새 팀 들어가기 전에 미리 안면 트면 좋을 거 같아서 생각해보겠다고 했는데.”
껄끄럽긴 했다. 굳이 쓸데없이 정붙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노훈이 여러모로 신경 써주는 것도 알았다. 주언은 떨떠름한 마음을 숨기고 대답했다.
“어… 전 상관없어요.”
“그래? 다행이다.”
노훈이 그럼 2팀에 말하고 오겠다며 경쾌하게 몸을 돌렸다.
“주인공은 주언 씨인데 팀장님이 제일 신났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죠.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송별회 안 해도 되는 건데.”
주언은 도로 제 자리로 시선을 돌리기 전, 흘끗 호윤과 명훤이 있는 쪽에 시선을 뒀다.
‘차라리 다행인가.’
찌라시 뉴스의 말처럼 공격 1팀에서 공격 2팀이 되는 건, 출세 가도에서 내려가는 걸 뜻했다.
주언이 자의로 2팀에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공격 1팀만 있으면 서로 괜히 눈치 보느라 분위기가 싸해질 확률이 높았다.
“오늘 실컷 회사 카드 털어먹어요.”
윤진이 결심했다는 듯 결의에 찬 목소리로 다짐했다.
“한도 있지 않아요?”
“그래도 오늘 조금 더 비싼 데 가는 거랑 2팀 부르는 거 보니까 한도금액 좀 높은 것 같던데. 우리 한도까지는 다 털어요.”
별것 아닌 일에 결연히 눈을 빛내는 윤진의 모습에 주언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강노훈의 권한으로 일찍 퇴근한 덕분에, 공격 1팀이 먼저 고깃집에 도착했다.
“예약석에 앉으시면 돼요.”
직원이 테이블이 길게 이어진 쪽으로 안내해주며 메뉴판을 건넸다.
“삼겹살이 거기서 거기 아니에요?”
이지우는 회식 장소를 정확히 듣지 못했었는지 괜히 기대했다며 혀를 찼다.
“제일 잘 먹을 거면서 저러더라. 지우 씨 먹기 싫으면 냉면 시켜줄까요?”
자연스럽게 세 명씩 나눠서 앉았다. 윤진이 먼저 안에 들어가고 옆에 주언을 불러 앉혔다. 맞은편에는 강노훈이 앉았다.
“안 먹겠다는 소리는 안 했어요.”
윤진의 타박에 지우가 툴툴거렸다. 다른 테이블, 강노훈의 옆에는 이지우가 앉았고 명훤과 이호윤이 나란히 맞은편에 앉았다.
“특수 부위도 있네요.”
자연스럽게 나눠진 테이블에 윤진이 주언의 얼굴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괜히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주언이 지우의 투정에 한마디 보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