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래. 주언이 말대로 가브리살 먹어.”
“항정살 먹을 건데요?”
“주인공이 주언 씨인데 왜 네가 항정살을?”
여기서 제일 비싼 게 항정살이니까 주언 씨는 항정살 먹으라고 말하며, 강노훈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다소 수다스럽게 메뉴를 정하는데 이호윤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와. 저 이런 데 처음 와봐요.”
비꼬는 말투는 아닌 것 같았지만 이호윤이 L 기업 차남이라는 걸 모두 아는데, 그런 말이 나오니 이런 별로인 곳에 처음 와본다는 뉘앙스가 풍겼다. 여기 온다고 신나 했던 강노훈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수 정예 팀 팀장인 내가 사비를 들여서까지 소고기 사줄 걸 그랬나.”
“그냥 팀 옮기는 명목으로 회식하는 건데 사비까지 쓰면 제가 너무 죄송하죠.”
“맞아요. 무슨 생이별하는 줄 알겠네. 당직이라 콜 들어오면 바로 가야 돼서 술 못 마시는 사람들은 두고 우리끼리 마셔요.”
“나 당직인데.”
“그럼 나랑 주언 씨만.”
윤진이 메뉴판을 펼치며, 우리끼리 제대로 마셔보자며 주류 페이지를 열심히 훑었다.
딸랑.
다행히 공격 2팀이 타이밍 좋게 가게에 들어왔다. 2팀이 들어오자마자 가게 내부가 시끌벅적해졌다. 데리고 온 사람만 해도 족히 10명은 넘어 보였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내부를 살피던 것도 잠시, 강노훈을 발견하고는 곧장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강 팀장님.”
“한 팀장님. 오랜만이에요.”
강노훈이 손을 격하게 흔들며 들어오는 사람들을 반겼다. 공격 1팀이 합이 맞는 능력으로 일궈진 소수 정예 팀이라면 2팀은 내부에서 10개 이상 팀을 나눠 활동하는 대규모 팀이었다. 기관에서 맡고 있는 80% 이상의 던전은 공격 2팀이 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팀 다는 못 오고, 앞으로 주언 씨랑 이래저래 얼굴 많이 볼 사람들만 데리고 왔어요.”
“다 오면 가게 안에 다 들어오지도 못하잖아요.”
“그렇긴 하죠. 하하.”
호쾌하게 생긴 남자가 자신을 한 팀장이라고 소개하며 강노훈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다른 팀원들도 옆에 있는 테이블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바빠진 가게 사장님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기 주문을 받는 사이, 한 팀장이 주언을 보며 손을 건넸다.
“우주언 씨. 처음 인사드리죠? 이제 같은 팀인데…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은 1팀이거든? 일주일 후까지 우리 팀이야.”
노훈의 말을 가볍게 씹은 한 팀장이 씩 웃었다.
“공격 1팀 출신 엘리트가 2팀에 오다니. 저 주언 씨 온다는 소식 듣고 사무실에 새 의자 샀잖아요. 오래 앉아 있으라고.”
“한 팀장님. 부담 주지 마세요.”
윤진이 정말 하나같이 다 부담스럽다며, 주언의 술잔 위로 술을 가득 채웠다.
“부담 준 거 아닌데요?”
강노훈이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나오고 싶을 것 같다며 낄낄 웃으며 한 팀장을 약 올렸다.
한 팀장이 억울하다는 듯, 부담 줄 생각은 없었다며 말하며 사정을 덧붙였다.
“요즘 2팀 1군 메인 가이드가 은퇴해서 다들 많이 고생했거든요.”
한 팀장은 주언이 새로운 에이스가 되길 바라는 것 같았지만, 주언이 2팀에서 활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윤재의 설명에 의하면 주언의 죽음은 사고로 위장될 것이다. 평범하게 생활을 하다가, 아무도 주언이 풍화증에 걸린 사실을 모르게끔.
“열심히 하겠습니다.”
“주언 씨야 뭐 늘 열심히 잘하니까 걱정 없지.”
그러니 미리 죽음을 아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다. 자신에게도 매일 내일이 찾아올 것처럼 굴어야 했다. 앞으로 더 고생할 한 팀장이 안쓰럽긴 했지만 주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분위기는 금방 무르익었다.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강노훈도 한 팀장을 놀리는 걸 관두고 서로 잔을 주고받으며 요즘 일이 힘드니, 마니 하면서 서로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강노훈은 얼굴이 시뻘건 채로 웃느라 바빴다.
“아, 참.”
윤진이 잊고 있었다며 가방을 뒤적였다. 포장된 작은 박스를 가방에서 꺼낸 윤진이 주언에게 불쑥 건넸다. 윤진이 갑자기 자신에게 박스를 내밀자, 주언이 얼떨떨한 상태로 받아 들었다.
“뭐예요?”
“선물이에요.”
“선물이요? 저한테 왜….”
“풀어봐요.”
윤진이 턱짓으로 재촉하자 주언이 선물을 풀어보았다. 포장지를 뜯고, 박스를 열자 곰 인형이 나왔다. 단순한 인형인가 싶었으나 곰 인형을 만진 순간 주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거 아이템 아니에요?”
“맞아요.”
아이템, 던전에서 몬스터를 쓰러트리면 나오는 물건. 아티팩트보다는 희귀도나, 등급은 낮지만 던전에서만 구할 수 있어 가격이 상당이 높은 물건이었다. 근래에는 마나석을 가공해서 아이템을 만들 수 있게 되어 가격이 낮아졌다고 해도 결코 쉽게 선물할 물건은 아니었다.
“비싼 거잖아요. 저한테 왜 선물을… 저 못 받아요. 이런 선물.”
“엄청 할인받아서 샀어요. 그리고 이거 가공된 거라 등급도 낮고.”
“…그래도.”
“회사에서 좋은 동료 찾기 진짜 힘들잖아요. 좋은 동료 되어줘서 고맙다고 주는 거예요.”
윤진이 억지로 선물을 안겨주었다. 여기서 더 거절하는 게 도리어 그녀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할 것 같아 주언은 품에 인형을 안았다.
“죄송해요. 전 준비한 거 하나도 없는데.”
“뭐 받을 생각하고 준 거 아니에요.”
“네?”
“한동안 서로 바빠서 못 볼 거 같아서. 이거 주언 씨한테 가장 먼저 말해주는 건데. 나 결혼하거든요.”
“네? 전혀 몰랐어요. 축하드려요.”
윤진의 깜짝 소식에 주언이 놀라 더 물어보려는 것도 잠시, 강노훈의 주머니에서 시끄럽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Rrrrrr.
“아. 왜 기관에서 연락이 왔지?”
“네?”
한 팀장의 팔을 흔들고 있던 강노훈의 움직임도 뚝 끊겼다. 전화를 받은 노훈이 몇 번의 대답 끝에 전화를 끊었다. 얼굴에 순식간에 드리운 그늘이 전화 내용을 유추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필 오늘… 내가 당직일 때.”
던전이 발생했다는 비상 연락이었다. 오늘 가이드 당직은 자신이 아니었다. 흘끗 옆 테이블을 보니 이지우의 앞에 술병이 즐비해 있었다.
고로 남은 건 명훤의 옆에 앉아 있는 이호윤이 가야 한다는 뜻이다. 강노훈은 그대로 자리에서 윗옷을 챙겨 일어났다.
“호윤 씨. 가자.”
호윤은 자신에게 시선이 쏠린 걸 흘끗 보곤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난 명훤 씨랑 아니면 안 가고 싶은데요.”
“호윤 씨!”
“상성이 가장 잘 맞는 에스퍼랑 가는 게 제일 낫잖아요.”
강노훈이 언성을 높이자 끝쪽에 있는 공격 2팀 테이블까지 조용해졌다. 혼자 술을 빠르게 마셔 잔뜩 취해있는 이지우마저도 눈치를 보고 있는 와중에, 이호윤만이 태연해 보였다.
“긴급한 일이라 장난할 시간 없어요.”
공격 1팀에게 당직은 크게 의미 없는 것이었다. 특이하거나 까다로운 던전을 긴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그래서 당직이 걸리는 사람은 할 일도 없는데 기관에서 뭐 하면서 하루를 보낼지 고민할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할 일이 없었고, 특히 이런 호출은 흔치 않았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연락이 온 건 그만큼 긴급한 일이라는 뜻이다. 몇 초가 아주 중요한.
“장난 아닌데. 명훤 씨가 대신 가면 안 돼요?”
호윤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명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 있던 명훤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이호윤의 끈질긴 고집 끝에 결국 명훤도 함께 가기로 정했다.
“호윤 씨. 잠깐만 이리로.”
강노훈은 이호윤을 불러 면담을 따로 해야 할 것 같다며 심각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고, 이호윤은 노골적으로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요.”
주언은 윤진에게 작게 속삭인 후, 조용히 빠져나와 술 좀 깨고 오겠다고 화장실 쪽으로 간 명훤을 뒤쫓았다.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거울 앞에 서 있는 명훤의 뒷모습이 보였다. 거울을 통해 뒤를 본 명훤과 시선이 마주쳤다. 세수를 했는지 명훤의 앞머리가 살짝 젖어 있었다.
“왜?”
“왜냐니…. 갈 거야?”
먼저 입을 연 건 주언이었다.
“가야지.”
“너 술 마셨어.”
“맥주 한 잔 마셨어.”
“그래도 술 마신 채로 가는 건 위험하잖아.”
“맥주 한 잔으로 위험하지 않다는 건 너도 알잖아.”
“규정에도 걸리고.”
“급한 일에 그런 일까지 신경 안 써.”
“그래도….”
“…….”
명훤은 입매를 굳혔다. 이 얘기를 계속해 봤자 명훤은 이 이유로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 돌아가서 얘기하기로 했잖아.”
그제야 명훤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다음에 하자.”
“난 오늘 하고 싶어.”
“금방 올게.”
“그럼 나 집에 가서 안 자고 기다릴게.”
주언의 단호한 말투에 명훤이 미간을 좁혔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술을 몇 잔 마셔서 그런지, 명훤의 말에 머리에 열이 확 올랐다. 자신답게 굴라는 명훤의 말이 주언의 신경을 건드렸다.
‘나답게 굴면 그냥 참고, 널 또 보내고 난 네 뒷모습만 봐야 하는 거잖아.’
명훤이 일 때문에 가야 하는 것도, 자신이 답지 않게 고집을 피우는 것도 알지만 싫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하게 된다더니. 그 심정이 어떤 심정인지 절절하게 이해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