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18화 (18/112)

#18

명훤의 말에 주언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비밀을 이야기해 주겠다는 듯 속삭였다.

“사람은 변해. 명훤아.”

주언은 항상 자신다운 게 싫었다.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가 싫어하는 모습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결국에 명훤은 떠났고 송별회는 흐지부지 끝이 났다.

혼자 돌아가는 길이 오늘따라 유독 길게 느껴졌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쳤다. 추워서 그런지 코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며칠 전만 해도 이렇게까지 춥지 않았던 것 같은데.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운 밤이었다.

“시간 왜 이렇게 빨리 가.”

불도 켜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텅 빈 방 안을 보는 게 싫어서 그대로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큰일이 나긴 했는지 온갖 뉴스에서 새벽에 갑자기 나타난 게이트에 대해 긴급 뉴스를 보도하고 있었다.

-밤 11시경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이레귤러 A급 던전이 생성되었는데요. 보통 던전보다 균열이 빨리 생성되어 인근 시민들의 공포감이 최고조에 다다랐습니다.

헬리콥터를 타고 촬영을 했는지 던전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각도로 중계되고 있었다. 주위 건물은 던전의 여파에 무너져 있었고, 건물 잔해 사이로 던전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스산한 분위기는 화면 너머에 있는 주언에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균열 중심에서 멀리서 봐도 일반 동물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 거대한 늑대처럼 생긴 몬스터가 어슬렁거리며 던전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주언은 불안한 시선으로 TV를 바라보았다. 얼굴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카메라는 멀리 있었으나 주언은 한눈에 명훤의 모습을 찾아냈다.

주언은 명훤을 주시했다. 식별하기 어렵지만, 식별한다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얼추 보일 정도의 거리는 됐다.

-이에 기관 측은 균열에서 나온 몬스터를 처치한 후 던전도 최대한 신속하게 클리어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기자는 쉴 새 없이 말을 내뱉으며 현장 전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하기 바빴다. 명훤의 얘기는 언급되지 않아 주언은 주변 상황을 보지 않고 명훤이 있는 쪽만을 바라보았다.

명훤은 한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바로 뒤에 강노훈과 이호윤도 보였다. 몬스터가 명훤을 발견했는지 저 멀리서 빠른 속도로 명훤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콰아앙!

보도하던 기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굉음과 함께 일대가 잠깐 밝게 빛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몇 초 후 강한 바람이 일대를 덮쳤다. 카메라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보통 명훤은 능력을 총에 응집시켜, 공격 범위를 줄이는 대신 파괴력을 높이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적이 많은 지금은 그 방식을 쓰지 않고 능력을 날것 그대로 몬스터에게 던져넣어 주변을 순식간에 괴멸시켰다. 능력을 광범위하게 써도 파괴력이 약한 건 아니었다.

순식간에 몬스터들이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균열에서 쩌저적,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균열 사이로 아까보다 더 강해 보이는 개체들이 이를 드러내며 나오고 있었다. 덩치가 족히 평균 성인 남성의 세 배는 돼 보였다.

쾅, 콰쾅!

명훤은 균열에서 몬스터가 채 다 나오기도 전 공격을 또다시 퍼부었다. 주변에 사람이 못 오게 통제하고, 던전 안이 아니라 그런지 명훤은 평소보다 능력의 세기를 조절하지 않고 마구 퍼부었다. 강한 빛에 사방이 밝게 물들 때마다 바닥에 탄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왜 저렇게 급하게 행동하는 거야….”

평소보다 행동이 급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평소보다 페이스가 빨랐다. 저러면 안 되는데. 저런 식으로 행동하면 평소보다 빨리 지치게 될 게 분명했다.

‘금방 올게.’

순간 화장실에서 명훤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너무 멀리까지 간 생각이다. 주언이 고개를 저으며 TV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 명훤이 보이지 않아도, 명훤의 능력의 여파가 주변을 물들이는 모습이 보여 명훤이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손에 땀이 짙게 배어 나왔다. 국내에서 한 손가락 안에 드는 S급 에스퍼인 명훤을 걱정한다는 소리를 하면 사람들이 비웃겠지만 주언은 명훤을 항상 걱정했다.

사람은 다친다. 아주 찰나의 방심 때문에 목숨이 얼마나 쉽게, 허무하게 사라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지도.

주언의 가족이 그랬고, 명훤의 모친이 그러했다. 모두 주언의 앞에서 손쓸 새도 없이 사라졌다. 그 무력감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주언은 명훤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균열이 닫히고 있다고 합니다! 남은 몬스터는 현재 9마리로 추정됩니다.

흥분한 기자의 목소리에 주언이 저도 모르게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퍼뜩 들었다. 주언의 걱정과는 다르게 균열은 빠르게 정리되는 듯했다.

2팀에서도 멤버가 차출됐는지. 바리케이드가 처져 있는 곳으로 빠져나가려던 몬스터를 잡으려고 고전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무릎에 턱을 괴고 쉬지 않고 중계와 전문가의 소견이 번갈아가며 나오는 화면을 응시했다. 이게 현재 우리의 거리 같았다. 같은 공간에조차 없는 것 같은 기분.

-균열에서 나온 몬스터들이 모두 처치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던전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당장 진입은 어렵다는 기관의 입장이 발표되었습니다.

기관의 정보 보안을 위해 세세하게 상황 중계는 하지 않았지만, 1팀은 철수했을 것이다. 이레귤러이니만큼 공격 1팀을 주축으로 던전에 가게 될 테니까.

아마 자신은 회의도, 던전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후우….”

이대로 생각에 또 빠지면 밑도 끝도 없을 거 같아 기지개를 켜며 생각을 전환하기 위해 애썼다. 시간을 보니 이미 3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아니라는 걸 알지만 혹시 하는 마음을 완전히 접을 수도 없었다.

“조금만 기다릴까.”

주언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에 불을 켰다. 그러다 소파에 대충 놓았던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곰 인형 모양의 아이템.

‘물건 보존 기능이 있는 아이템이야. 비밀번호 걸 수도 있고. 예약도 설정할 수 있어.’

윤진이 거듭 비싼 게 아니라고 말했으나, 주언은 큰 기능은 없어도 여러 기능이 중첩되어 있는 아이템의 시세를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쓰지.”

주언이 인형의 팔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짙은 눈썹이나, 곰 인형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이 명훤과 조금 닮은 것도 같아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울적한 기분에 무릎을 껴안았다.

뜨거운 사랑이 지났다. 항상 뜨거우면 결국 타버리기 마련이니까, 주언은 그 안정감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훤에게는 볼품없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된 걸까.

아니라고, 착각이라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애써도 명훤은 이호윤과 자신이 선택지에 있을 때 늘 이호윤을 선택했다.

싸워서 화해도, 더 나아갈 수도 없는 정체된 관계. 명훤은 이 관계를 회복시킬 생각 없어 보였고 곧 사라질 자신이 지금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노력할 수도 없다.

술기운 탓인지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그래도 헤어지기 싫어….”

여전히 명훤의 연인인 채로 임상 시험에 들어가야, 다시 돌아가겠다는 의지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 맞다.”

타투를 하고 한동안 술 마시지 말라고 했었는데. 허벅지 안쪽이 화끈거렸다.

“약… 발라야 되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을 감는 순간, 속절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어느덧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무릎을 껴안은 채로 잠들었는지 어깨가 뻣뻣했다. 부은 듯한 눈가를 매만진 후, 손가락 끝도 차갑다는 걸 인지했다.

새벽 6시가 훌쩍 넘은 후에야 현관문 소리가 들렸다.

띡띡띡띡.

띠리리.

탁.

“늦게 왔네?”

“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

“…기다리다가 조금 잤어.”

“그냥 편하게 자지.”

“우리 얘기하기로 했잖아.”

뉴스를 봐서 알았다. 균열에서 나온 몬스터들은 몇 시간 전에 진압했다는 사실을. 몬스터를 처리하고 집에 오기까지 명훤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아무리 전력에서 제외됐어도, 같은 팀에서 지냈다. 균열 처리 직후 회의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 해.”

명훤이 윗옷 단추를 빠르게 풀어 내리며 말했다.

옷을 갈아입는 도중, 네가 다시 나가기 전까지.

“쫓기듯이 얘기하라고?”

은선의 죽음은 몇 마디 급하게 말할 문제가 아니었다. 명훤도 눈치껏 알고 있을 텐데.

언성이 높아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오랜만의 이레귤러 게이트다. 게다가 밤을 새웠으니 예민할 만했다. 섭섭한 마음에 늦게 눈치챘으나 명훤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잠깐, 너. 가이딩 제대로 받았어?”

“…어.”

“그런데 눈이 왜 그래.”

“피곤해서.”

주언이 다가서자 명훤이 노골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명백하게 자신을 밀어내는 제스처였다.

“명훤아. 우리 여행갈까.”

“…….”

“그냥 계속 방해받는 게 싫어서. 우리 여행 안 간 지도 오래됐고.”

분위기가 이상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언아.”

명훤이 마른세수를 하며 주언을 불렀다.

“그래. 네 말대로 나중에 얘기하자.”

가시지 않는 불안감에 주언은 가방을 챙겼다. 명훤과 같이 쓰는 침실이 아닌 손님방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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