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19화 (19/112)

#19

“나도 할 얘기 있어.”

하지만 명훤은 기어코 주언을 멈춰 세웠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뭔데?”

주언은 아득한 기분을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명훤과 시선을 마주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명훤인데,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명훤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찰나의 침묵이 천 년처럼 느껴졌다.

“주언아.”

“…이 얘기 지금 꼭 해야 해? 나도 나중에 얘기할 테니까….”

“우리.”

“…….”

주언이 입을 달싹였다. 다른 말을 해야 하는데 입안이 바싹바싹 타 말을 할 수 없었다. 주언의 간절한 바람과 다르게 한 번 입을 연 명훤은 기어코 다음 말까지 내뱉었다.

“…공적인 관계로 남자.”

불안한 예감은 왜 항상 틀리지 않는 걸까.

“그게 무슨 소리야?”

명훤이 피곤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 와중에 우습게도, 피곤해서 미간을 찡그린 것과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는 명훤의 모습에 여전히 설렜다.

“다른 뜻 없어.”

주언은 이제 공격 1팀에서 빠졌다. 그런데 공적인 관계로 남으면. 우리 사이에 뭐가 남는 건데.

“헤어지자는 소리야?”

“…….”

주언이 경직된 얼굴로 물었으나 명훤은 대꾸하지 않았다.

“농담이 심하네.”

차라리 질 나쁜 농담이었으면 싶어 내뱉은 말이었다. 주언은 스스로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으나 그 웃음마저도 굳고 말았다.

아. 진심이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주언은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명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고 싶지 않았다.

“나 먼저 씻을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그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잡을 수가 없었다. 서로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건, 헤어지는 건 죽을 만큼 싫은데. 헤어지자는 너를 붙잡고 매달릴 수 없을 정도로 너를 사랑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명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곧 괜찮아질 테니까.”

무엇이 괜찮아지는 걸까.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다. 혹시라도 네가 없는 내가 괜찮아질 거라는 말이 나올까 봐. 그 말만큼은 듣고 싶지 않아서.

언제부터 너에게서 듣기 싫은 대답을 들을까 봐, 묻고 싶은 말들을 참게 된 걸까.

“그래.”

눈을 질끈 감았다. 뭐가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대체 어디서부터 발을 잘못 들였길래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걸까. 생각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모든 게 내 잘못 같았다.

시간을 거슬러 가, 아주 예전의 일까지 생각이 났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됐을까.

주언은 훈련관에서 수료를 앞두고 있던 때를 떠올렸다.

**

기관에 입사한 순간 곧장 현장에 나갈 수 있는 건 아니고, 최소 2년 동안 훈련을 받은 후에 특성에 맞는 팀에 배치됐다.

그건 S급도 예외 없었다. 주언과 명훤은 어느덧 훈련생 1년 9개월 차로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뭐래?’

명훤은 훈련소 간부의 부름을 받았다가 복귀했다. 주언은 명훤의 침대에서 명훤을 기다리다가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조건 제시받았어. 아직 수락한 건 아니고.’

‘왜? 뭐라고 그랬는데?’

기본급 100억에 던전에 나갈 때마다 추가 인센티브, 던전 안에서 나온 물건의 지분율 30%를 제안받았다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액수에 주언은 발을 동동 굴렀으나 명훤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였다.

‘왜 바로 수락 안 했어?’

‘조건이 붙어서.’

정부에서는 기관 소속 에스퍼에게만 능력 사용을 허락하고 있지만, 예외는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첫 번째로, 전국적으로 관리하기가 어렵기에 하청 업체의 이름을 쓴 길드들의 존재. 기관의 제재가 싫지만 에스퍼의 능력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주로 빠지는 길이었다.

두 번째로는 A급 이상부터는 타국에서 귀화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밀려 들어온다. 실제로 아직 한국 기관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국 출신의 S급 에스퍼가 미국이나 중국으로 귀화한 일이 적지 않았다. 대부분 후자를 선택하는 이유는 금전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사기업이 허락되는 타국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었다.

세 번째로는 범법자가 되는 것.

기관은 등급이 높은 에스퍼가 자신들과 척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 관리를 한다. S급 에스퍼인 명훤은 당연하게도 특별 관리 대상에 올랐다.

기관에서 먼저 제의하는 건, 다른 곳에서 먼저 제의 오는 걸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 한 번 소속을 정하면 바뀌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기관 측은 기관 소속으로 수도권에 10년 동안 거주하는 걸 조건으로 내밀었다.

‘별로 상관없는 조건 아니야?’

‘글쎄.’

‘하여튼 대단하다.’

‘뭐가.’

‘난 아직 아무런 제안도 안 왔는데.’

주언의 시무룩한 태도에 명훤이 주언을 번쩍 안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보통은 수료 후에 협상하니까.’

‘다른 고민도 있지?’

‘…어.’

‘뭔데?’

주언이 자연스럽게 명훤의 가슴팍에 기댄 후, 고개를 살짝 들어 명훤을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 사실 미국에서 귀화 제의도 받았어.’

‘뭐? 처음 듣는 소리인데?’

‘제의받은 지 얼마 안 됐어.’

‘그렇구나.’

‘파트너가 있다면 데리고 가도 된대.’

‘파트너?’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명훤이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우리 각인하고 귀화할까.’

하지만 귀화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 몰랐다. 명훤이 주언의 허리를 껴안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각인?’

‘왜 놀라.’

가이드는 여러 에스퍼와 각인할 수 있지만, 에스퍼는 단 한 명의 가이드에게만 각인할 수 있다. 신중한 성격의 명훤이 이런 얘기를 먼저 입에 담는다면 먼 훗날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당황했다.

‘그냥 갑작스럽잖아. 쉽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쉽게 말하는 건 아닌데.’

‘우리 나이도 어리고.’

‘그럼 어릴 때 즐기는 건 나랑 즐기고 나중에는 다른 새끼 만나려고 그랬어?’

명훤이 눈을 살벌하게 뜨며 주언을 안은 팔에 힘을 더 세게 주었다.

‘내가 나쁜 놈이라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도 각인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쉽게 말해.’

주언의 농담에도 명훤은 웃지 않았다. 그저 주언의 어깨에 제 얼굴을 파묻었을 뿐.

‘그래도 괜찮아.’

‘괜찮다고?’

‘너니까 괜찮아. 너한테라면 상처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주언은 그런 명훤이 사랑스러워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마치 짐승을 길들인 것 같은 기분에 배시시 웃었다. 이 말을 내뱉는 명훤의 속마음이 어떤지 짐작조차 못 하고.

우리는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 명훤만 믿고 모든 걸 포기하기엔 주언은 너무 불안정했다. 자리 잡은 것 하나 없이 명훤을 쫓는 건 너무 두려웠다.

‘그래도 한국에 있는 게 나은 것 같아.’

가족의 납골당이 여기에 있었다. 챙겨줄 사람도 자신뿐이었다. 명훤의 제안에 가지 못할 이유만 생각이 났다.

‘그래?’

명훤은 주언에게 두 번 다시 미국으로 가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주언을 더 옭아맸을 뿐.

곧 훈련도 끝을 보이고 있고 나름대로 많이 바빴다. 아직 주언은 훈련 후 어느 팀에 배정될지 모르는 상태였고, 조금이라도 명훤과 차이 나지 않는 곳에 가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언은 초조함에 몸이 달아 있었다. 명훤에게 기대기 싫었다. 나름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었다. 명훤에게 빌붙어 사는 것 말고, 같이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격차는 쉽게 메울 수 없는 것이라 자괴감에 빠졌을 때 명훤은 어디로 갈지 마음을 굳혔다.

주언이 룸메이트가 없는 사이에 씻고 나왔을 때, 명훤이 주언의 침대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주언의 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목으로 흐르는 것을 보며 명훤은 당황했다.

‘언제 들어왔어?’

‘방금.’

‘내가 네 방에 가면 되는데.’

주언이 서둘러 장롱 쪽으로 다가갔다.

‘너 평소에도 샤워 후에 이렇게 나와?’

‘아니… 오늘만 빨리 씻고 나오느라 그런 거야.’

‘그냥 내 룸메이트로 있으라니까.’

명훤이 혀를 차며 하는 말에 주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러면 훈련에 집중 못 할 만큼 네 생각만 나서, 그만큼 너를 좋아해서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명훤이 주언의 손목을 붙잡고 자신의 무릎 위에 주언을 앉혔다.

‘같이 입사하게 해달라는 조건도 붙여서 기관에 가기로 했어.’

‘뭐?’

아직 속옷도 입지 않은 게 신경 쓰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주언이 멈칫했다.

‘공격 1팀. 네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데….’

‘다른 A급 가이드도 있잖아. 명훤아. 나 능력 없는데 괜히 가는 건….’

‘아니 내가 네 가이딩 없으면 안 돼.’

주언은 그 말을 듣고 기뻤다. 자신감이 없을 때 자신의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은 너무도 달콤했다. 그래서 거절할 수 없었다. 공격 1팀은 훈련생 대부분이 가고 싶어 하는 소수 정예 팀이 아닌가.

‘…명훤아.’

‘그리고 너와 나한테도 조건이 따로 붙었어.’

명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리고 조건이 늘었는데. 10년 동안 각인은….’

주언은 기관에서 무얼 요구했는지 곧장 알아차렸다.

‘최대 전력 중 한 명이니까 어쩔 수 없지.’

기관 내에서 각인은 그렇게 반기는 요소가 아니었다. 에스퍼가 한 명의 가이드에게만 가이딩 받을 수 있다는 건 능률이 떨어지는 일이었으니까.

주언도 딱히 명훤이 했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겠지 싶었다. 10년 후쯤이면 자리를 잡았을 테고 그때쯤이면 각인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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