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20화 (20/112)

#20

주언에게 명훤이 없는 미래는 없었으니까. 자연스럽게 10년 후에도 명훤의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명훤이 주언의 목과 어깨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앗.’

그리고 곧 느껴지는 감각에 주언이 미약한 신음을 내뱉었다. 명훤의 시선이 짙어졌다. 주언이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며 명훤의 어깨에 팔을 둘렀을 때였다.

달칵.

‘너네 뭐 하냐.’

룸메이트인 윤재가 때마침 들어와 보이는 장면에 걸음을 멈췄다.

‘그런 거 아니야.’

주언이 재빨리 명훤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그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단단히 묶어 두었던 타월이 어느덧 느슨해져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윤재에게 못 보일 꼴 보일 뻔했다.

‘그럼 너네 뭐 하고 있었는데.’

‘…진로 얘기?’

‘너 어디 갈지 정해졌어?’

주언이 명훤을 흘끗 보았고, 명훤은 얘기해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렇게 우리의 진로가 정해졌다. 그때 피하지 말고 더 깊게 얘기해볼 걸 그랬다. 우리가 다른 나라로 떠났으면, 우리가 각인했으면, 네가 나를 위해 공격 1팀에 데리고 가겠다고 한 걸 거절했으면…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있었을까.

**

명훤은 그대로 짐을 챙겨서 나갔다. 오늘이 주말이라 다행이었다. 몇 시간 동안 넋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저녁이었으니까.

무엇부터 해야 할까.

명훤을 찾아 나설 수도, 그렇다고 앉아서 마냥 명훤만 기다릴 수도 없었다. 주언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정하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전화 신호음이 울리길 몇 번, 곧 피곤에 찌든 윤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재야. 혹시 네 집에 물건 좀 맡겨도 될까?”

-상관없는데. 무슨 물건?

“물건 하나가 아니라. 내 짐인데… 부피가 제법 돼.”

-얼마 정도 되는데?

“내 짐 전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곧 전화 너머로 윤재가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명훤이한테 말하고 싶어 하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수상하게 행동하면….

윤재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겠다. 말은 못한다고 했으니 간접적으로 명훤에게 신호를 보내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주언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간략하게 핵심만 말했다.

“헤어졌어.”

-뭐?

“정확히는 차인 거지만….”

아직도 우리가 헤어졌다는 사실이 못내 어색했다. 헤어졌다는 말이 모래처럼 버석거리며 입 안에 굴러다녔다.

-우주언. 너 지금 어디야. 괜찮아?

“차라리 잘됐지. 난 떠나는 주제에 헤어지자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

웃으며 별일 아닌 것처럼 얘기하고 싶었지만 차마 웃음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나 지금 갈까?

“아냐. 짐 정리해야 돼. 나 생각보다 괜찮아.”

주언은 서둘러 짐을 다 싸면 부르겠다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사실 괜찮지 않았다. 그와 헤어지던 그 순간부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명훤이 헤어지자고 한 그 순간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반복됐다.

우리는 아닐 거라고, 다른 연인들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게 우습게 으레 다른 연인들처럼 뻔한 이별을 했다.

그리고 임상 시험 디데이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

주언은 새삼 집 안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제시간 안에 다 정리하지 못할 것 같아서, 반납했던 휴가를 다시 쓸 수밖에 없었다.

짐을 나르느라 땀이 줄줄 흘렀다. 주언은 허리에 손을 얹고 아직 정리하지 않은 거실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내 물건이 이렇게 많았지.”

처음 이 집에 들어올 때는 몸만 달랑 들어왔는데, 언제 이렇게 늘었는지 모르겠다.

“애매한 물건은 그냥 다 놔두고 가야겠다.”

같이 샀던 물건들이 대부분이라 누구의 것인지 단정 지을 수 없는 물건은 다 놔둔 터라 짐을 많이 덜 수 있었다. 명훤은 짐을 정리하는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 휴가를 다 쓰고, 월차까지 쓴 후에야 주언은 직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직장에서 명훤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명훤은 이레귤러 게이트 때문에 바빴고, 주언은 내내 사무실에서 1팀의 일을 마무리하기 바빴으니까.

직장 내에서 명훤과 주언이 교제 중인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었으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둘만 있는 걸 최대한 자제했기에 두 사람 사이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없어 보였다. 주언도, 명훤도 굳이 말하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라 굳이 말하지 않는 이상 한참 동안은 두 사람이 이별한 걸 모르겠지.

헤어진 걸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주언이 사라지기 직전까지는 헤어졌다는 말을 남의 입으로 듣고 싶지 않아 다행이었다.

“주언 씨, 조심히 가요.”

“윤진 씨. 이레귤러 게이트 때문에 고생이 많아요.”

“어쩔 수 없지 뭐.”

“지금 가요?”

“내일부터는 나랑 팀장님만, 일단 가요. 1팀 계속 비워둘 수는 없으니까.”

“힘내세요.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조심히 가요.”

그럼 오늘은 명훤이 갔다는 소리겠구나. 자연스럽게 명훤부터 연관 지어 생각하다가 주언은 고개를 털어냈다.

사이가 소원해졌던 것과 아예 남이 되는 건 하늘과 땅 차이로 달랐다. 예전에는 가이딩 때문에 접촉할 때면 서운했던 적도 있다. 자신을 더 오롯이 봐주길 바랐어서.

그런데 지금은 가이딩을 해줘서라도 명훤에게 닿고 싶었다. 이조차 허락되지 않았지만.

**

자신이 2팀으로 차출된 후, 우리의 공적인 관계는 아주 가끔 공격 1팀과 2팀이 나가야 하는 대규모 던전이 생겼을 때나 회식을 할 때 만나는 게 다였다.

하루를 흘려보내는 게 아닌 견뎌내는 나날이었다. 죽는다는 선고를 받은 것처럼 때때로 견디기 힘들었다.

주언은 퇴근 후 완연한 겨울 밤길을 걸었다. 예전에 명훤이 자신에게 주었던 머플러를 턱 끝까지 올리고, 코트 주머니 안에 손을 넣고 걸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우주언 씨?”

아파트 앞에 다다랐을 때 누군가 넋 놓고 있던 주언을 붙잡아 세웠다.

“네?”

갑작스레 멈춰 세워져 얼떨결에 대답했지만 상대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혹시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세요?”

“…누구세요?”

상대는 주언을 아는 듯 굴어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제야 상대가 인사가 늦었다며 명함을 건넸다.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주안 일보의 곽성관 기자입니다.”

주언은 명함과 곽성관 기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저한테 무슨 볼일이시죠?”

“얼마 전 병원 폭발 사건으로 인터뷰 요청드리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서요. 가능하실까요?”

노훈이 찌라시 기사가 돈다고 언급했던 것 때문인가. 놀라움 대신 불쾌함이 컸다.

“조사를 피한 적도 없고, 알리바이도 다 말씀드려서 더 드릴 말씀이 없는데요.”

자신을 범인으로 모는 기사에 기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주언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기자는 포기할 생각 없는지 주언의 뒤를 뒤쫓았다.

“아. 그 찌라시 기사 때문에 그러는구나. 전 그런 머리에서만 나온 추측성 기사 쓰는 사람 아니에요.”

“…….”

“저는 주언 씨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

“그래서 제가 나름대로 조사를 했어요. 주언 씨 많이 억울하실 거 같아서. 그런데 그 병원에 계셨던 게 주언 씨 관계자가 아니라 S급 에스퍼 여명훤 씨 관계자더라고요?”

우뚝. 빠른 보폭으로 걷던 주언의 걸음이 일순간 뚝 끊겼다.

비밀 유지 조항을 지켜달라는 당부 하에 경찰 조사에서 자신이 병원에 갔던 이유를 말했다. 그런데 왜 그 이유를 이 기자가 알고 있는 걸까.

김은선은 호적상으로 명훤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정보가 새어 나올 구석은 그곳밖에 없었다. 경찰도 주언이 말하기 전까지 몰랐던 정보를 한낱 기자가 알아낼 수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뒷조사를 어떻게 하셨는지 무척 궁금하네요.”

주언의 싸늘한 응수에 기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성격이 유순할 거라는 짐작과 달리 말투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허락하지 않는 기사는 게재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그럼 인터뷰에 응할 필요가 없겠군요.”

기사 올리는 걸 허락할 생각 없으니까.

주언이 싸늘하게 일축하며 기자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기자도 순순히 주언을 보낼 생각 없다는 듯 주언의 뒤통수에 대고 말을 던졌다.

“요즘 AGT가 원한을 가지고 활동을 한다는 소식도 들려오던데 혹시 짐작 가는 거 있으신가요?”

던전에서 우연히 마주쳤으나 명훤의 공격에 격파당했던 AGT. 원래 시민을 죽이지 않는 AGT. 하지만 원한을 갖고 복수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AGT.

애꿎은 시민들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AGT에서 병원에 있는 환자 중 한 명이 명훤의 가족이라는 걸 알게 됐다면?

“출처도 모르는 정보를 쉽게 믿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

“짐작 가는 부분이 있긴 한 거군요.”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눈치 못 챌 미세한 차이였으나, 눈치가 빠른 거 하나로 여태껏 실적을 쌓아온 기자는 재빨리 그 순간을 포착해냈다.

“…….”

“저도 없는 말 지어낸 건 아니에요. 고급 정보 먼저 드릴게요. 신뢰의 증표로.”

“…….”

“특정할 수는 없지만 AGT가 복수를 하려고 곧 모 백화점을 점거한다는….”

원한을 가질 만한 일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했는지 기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집요한 시선에 대답한 걸 후회하며 시치미를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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