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짐작 가는 부분 없어요. 그리고 그 말이 정말 신빙성 있는 말이라면 저한테 말고 경찰에 가서 신고를 하시고요.”
“에이. 주언 씨한테 신뢰를 주려고 저도 고급 비밀 정보 푼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저한테 날 세우지 마시고….”
“몇 번을 말해도 제 대답은 같을 겁니다. 짐작 가는 부분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들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AGT에게 직접 묻지 않는 이상. 주언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도 기자는 동요하지 않고 주언을 졸졸 뒤쫓았다.
“잠시만요.”
기자는 주언의 인터뷰를 따 내기 위해서라면 몇 날 며칠 주언을 따라다닐 수 있었다.
“누구시죠.”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끼어들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가라앉은 목소리도, 뒷모습도 익숙했다.
“명훤아.”
주언의 말에 기자가 화들짝 놀랐다.
“…여명훤 씨?”
기자도 명훤이 중간에 나타날 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티를 여실히 드러냈다. S급 에스퍼. 일반인이 평생 가도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유명 인사. 기자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늘한 시선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럼 주언 씨. 마음 바뀌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끈질기게 따라붙던 기자는 여명훤의 존재에 더 달라붙으면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빠르게 물러섰다.
허무하리만큼 빠른 태세 전환에 얼빠져 있는데, 명훤은 이대로 할 일은 끝났다는 듯 다른 말 없이 주언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주언이 명훤의 뒤를 따라 걸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나 혼자였어도 알아서 해결했을 거야.”
“그래.”
“대화 어디서부터 들었어?”
“못 들었어.”
무슨 대화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막아섰어. 내가 곤란한 표정이 멀리서도 보였어? 여전히 나한테 그 정도로 관심이 있어? 우리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닌데.
수많은 말이 주언의 입을 간지럽혔지만 결국 내뱉은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은 알았다. 먼저 헤어지자고 했지만 우리 사이의 과거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도와줘도 이상하지 않은 정도의 일이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이제는 불편했다.
띠띠띠띠.
띠리릭.
명훤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 앞에 섰다. 주언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명훤의 등을 봤다. 집에 들어가는 명훤의 뒷모습을 기억하고 싶었다.
“아!”
다행히 다른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누르지 않아 금방 다시 엘리베이터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다행히 현관문이 닫히기 직전이었다. 주언은 거의 닫힌 현관문을 달려가 겨우 연 후에 집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하지만 신발장을 벗어나기 전 미동 없이 굳은 명훤의 등에 코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왜 안 들어가?”
“집이….”
텅 빈 집의 모습에 명훤이 드물게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짐은 다 비웠어.”
“왜?”
“왜냐니… 내가 이제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입 안을 너무 세게 씹었는지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헤어지지 말자고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붙잡고 싶은 것보다 구질구질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게 더 컸다.
이 집은 명훤의 것이었다. 주언의 월급으로는 살 수 없는 터무니없이 비싼 곳이었다. 이사 갈 집은 굳이 구하지 않아도 되니 이 걱정은 덜었다.
“네가 여기서 살아.”
“내 집 아니잖아.”
“…당장 갈 곳 없잖아.”
“그러는 너는?”
“…….”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서로에게 가족은 서로뿐이었다. 결국 허무하게 남이 되었지만, 본가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이 아파트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집을 구할 때도, 집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없으면서 부동산을 전전하며 조건을 재고 또 재서 들어온 곳이었다.
몇 년 새에 더 좋은 집에 갈 여건이 충분히 됐지만, 우리가 골랐던 이 집에 정이 들어 정착하게 된 우리의 집.
“어디에 가려고 했는데.”
“친구 집.”
주언의 대답에 명훤이 비릿하게 웃었다.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명훤은 단박에 친구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명훤은 주언의 인간관계를 거의 꿰뚫고 있었다.
“짐 다시 풀어.”
“…….”
명훤이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나갈 테니까.”
“너는 어디에 가 있을 건데?”
“호텔. 어차피 모레부터 한동안 집에 못 들어오기도 하고.”
“나 짐 벌써 옮겼어.”
“우주언!”
명훤이 언성을 높였다. 명훤은 자신이 위협될까 봐 화를 냄과 동시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내가 어디에서 자는지까지 네 허락받을 필요 없잖아.”
이렇게 화를 낼 거면 헤어지자고 그러지 말지 그랬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진심을 묻었다.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진심을 괜히 내비쳐서 명훤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주언은 이미 짐을 윤재에게 맡기며 일찍 기관에 들어가겠다고 말해두었다. 이제 미룰 수 없었다.
“내가 했던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아니. 정확하게 이해했어. 우리 이제 애인 사이 아니라는 거.”
“…….”
“내 말 틀렸어?”
“너 지금 너무 흥분했다. 나중에 얘기하자. 일단 짐 들고 다시 와.”
명훤의 말대로 지금 흥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힌다고 자신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공적인 관계인데 이 집에서 너랑 같이 살면, 내가 빌붙어 사는 것밖에 안 되잖아.”
“내가 그렇게 생각 안 해.”
“내가!”
“…….”
“내가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싫어.”
어른스럽게 헤어져 주고 싶었다. 죽을 걸 알면서 이기적인 마음에,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뒤늦게나마 완전히 끊어내 주는 건 주언의 몫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주언은 잘 알았다. 명훤이 얼마나 정에 약한지. 오래 같이 지냈던 자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불편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우리가 헤어지면 함께한 세월이 기니까, 친구로라도 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주언.”
“그런데 미안한데 그건 안 될 거 같아.”
내가 있던 자리에 당연히 다른 사람이 있는 걸 태연히 볼 수 없어.
명훤은 그 뒤를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는지 벼락에 맞은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넌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있을 수 있다는 소리야?”
“나 마지막 짐만 챙겨서 나갈게.”
오늘은 원래 윤재에게 가는 날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같이 있으면 억누른 진심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주언이 가방을 챙겨 나올 때까지 명훤은 한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주언이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간 후에야 명훤이 목소리를 쥐어짜 내듯 말했다.
“우주언. 대답해.”
“…우리 이제 대답 안 해도 되는 사이야.”
“…….”
“먼저 갈게.”
이 정도면 명훤이 나중에 자신이 사라진 걸 알아도 죄책감이 덜할 것이다.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니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명훤은 뒤쫓아 오지 않았다.
그래. 이걸로 됐다.
**
주언은 윤재의 집에 며칠 신세를 지는 대신 조금 일찍 임상 시험하는 곳에 가 있기로 정했다.
기밀 보안 등급의 실험실이 본사 부근에 있다고는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임상 시험의 장소는 주언이 매일 출근하던 건물 지하에 있었다.
오래 있어서 기관 내의 구조를 대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하를 통째로 쓰는 연구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관에서 제일 공들이는 부서라는 게 허튼 말은 아니구나.”
“그렇지. 뭐.”
주언이 감탄하며 과장 조금 보태어 끝이 보이지 않는 입원 병동 복도를 보며 감탄했다.
“처음 알았어.”
“기밀이니까. 기관은 지하 3층까지만 표시되어 있으니까. 원래는 지하 5층까지 있잖아.”
“지하 2층을 통째로 다 쓴다는 소리네.”
“그렇지.”
주언은 흰 환자복을 입은 채로 배정된 병실 침대 위에 앉았다. 겁을 잔뜩 줘서 인체 실험이라도 당하는 줄 알았는데 병실만 보면 일반 병원과 비슷해 보였다.
“정말 조금 일찍 들어가도 되겠어?”
“응. 중간에 대답도 번복하고, 입원 날짜도 제멋대로 바꾸는 친구 때문에 얼굴이 반쪽이 됐네. 미안하다.”
“뭘 미안해해. 갑작스러운 일이니까 당연한 거지.”
윤재가 시계를 흘끗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폰은 저녁에 회수하러 올게. 아직 일이 남아 있어서.”
“고마워.”
윤재가 여러모로 편의를 봐줬다는 걸 알았다. 명훤과 헤어진 일을 물어보지 않는 것도 그랬다.
“감사 인사는 임상 시험 끝나고 받을게.”
시험을 성공시켜보겠다는 말보다 훨씬 더 믿음직스러운 말이었다. 윤재가 잠시 머뭇하다가 아주 찰나 주언의 머리 위로 제 손을 얹었다.
“나 머리 깨끗한데.”
“큼. 여튼 간다.”
윤재가 휘적휘적 팔을 휘저으며 빠르게 병실을 빠져나갔다.
병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창문이 없는 점 정도일까. 아직까지는 그 정도 차이밖에 모르겠다 싶었다. 주언은 그대로 자리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벌써 외로웠다. 혼자 견뎌낼 수 있을까.
Rrr.
정적 속에 빠져 깜박 잠이 들려고 했다. 창문이 없으니 어느 정도 잤는지 시간이 가늠 가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주언 씨? 다행이다 전화 받아서.
급박한 노훈의 목소리에 남아있던 졸음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팀장님? 무슨 일 있어요?”
-주언 씨. 혹시 지금 D 백화점 근처에 있어?
“…무슨 일 있나요?”
-D 백화점 AGT가 점거했어. 그런데 지금 공격 1팀이랑 2팀 주력 멤버는 거의 이레귤러 게이트에 가 있고….
명훤은 내일 이레귤러 게이트에 진입한다고 했다. 불길한 기운이 주언의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