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23화 (23/112)

#23

하지만 자욱했던 먼지가 가시고 시야가 확보되지 주언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벌어졌지만 AGT의 리더는 멀쩡히 서 있었다. 분명 적대관계일 텐데 AGT의 리더는 호의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 한 명이 더 늘어서 숨어 있던 거야?”

“꺼져.”

“형 속상하게 왜 그래.”

“누가 형이야.”

그리고 두 사람은 마치 서로를 아는 것 같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주언이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육안으로 보니 목소리를 들었던 것보다 충격이 컸다.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 푸른 파도 같은 푸른색 눈동자. 잘생겼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얼굴과 다르게 키가 매우 커서 연약해 보이진 않았다.

AGT의 리더도 많이 다쳤는지 옷 곳곳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내 동생이 너니까, 내가 네 형이지. 어릴 때는 형 말 잘 들었잖아.”

그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하며 이마를 쓸었다.

“개소리하지 마.”

형? 명훤은 형제가 없다고 들었는데. 주언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읽은 AGT의 리더 여한올은 사람의 기분을 파악하는 게 빨랐다. 실험을 통해 인위적으로 등급을 S급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판단으로 여씨 집안에 입양되었으나, S급이 되지 못해 집안의 골칫거리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사람들의 냉기 섞인 눈빛을 눈치껏 견디며 살아온 탓에 그는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차이였으나, 한올은 명훤이 계속 새로운 등장인물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감지해냈다.

‘우주언이었나.’

명훤이 오랫동안 사귀었던 사람. 그러고 보니 명훤의 주변 인물에 대해 알아보면서 저런 비슷한 얼굴을 봤던 걸 떠올려 냈다.

주언은 한올의 존재에 의문을 품으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럴 때 폭탄 하나를 떨어트려 주면 동요는 큰 파문을 일으키겠지.

“김은선 죽였다고 나한테 화내는 거 아니지?”

명훤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는 한올은 두 사람을 간단하게 흔드는 패를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한올은 신나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명훤이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듯한 부분을 폭로했다.

김은선. 항상 이름이 아닌 호칭으로 불러서 주언은 반 박자 뒤늦게 그 이름이 누구를 뜻하는지 알아차렸다.

“저게 무슨 소리야…?”

한올의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주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명훤의 곤란한 얼굴까지 확인한 한올이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음 지었다.

“지금 내가 맞게 이해한 거 맞아?”

“…….”

명훤은 싸늘한 시선으로 여한올을 바라보았다. 명훤은 입매를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한테 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서…!”

던전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생긴 원한이라고 하기엔 너무 지독하고 집요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주언이 아는 한 명훤이 AGT와 직접적으로 마주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하하.”

“…….”

주언의 악에 받친 말에 한올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아주 웃긴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주언의 시선이 여한올에게 닿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원한이라니. 너무하네. 내가 명훤이를 얼마나 아꼈는데. 가끔 피해 주기까지 했잖아.”

공격 1팀은 놀라울 정도로 AGT 팀과 마주치는 일이 타 팀에 비해 적었다. 운이 좋아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명훤을 위해 일부러 피해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대체 왜 아주머니는….”

“명훤이는 좋아하지만 그 여자는 죽어도 뭐라고 할 처지는 못 되니까.”

“무슨….”

주언의 표정을 본 여한올이 드디어 표정을 굳혔다.

“아직 아무 설명도 안 했어?”

“내가 나중에 설명할게.”

“넌 항상 중요한 걸 말 안 하더라.”

여한올이 그 부분은 정말 싫다며 혀를 찼다.

“대장! 스카우트한다고 호언장담했으면서! 약 올리면 어떡해요.”

뒤에서 오들오들 떨며 숨죽이고 있었던 정찰원 중 한 명이 한올에게 소리 질렀다. 한올이 그제야 아차,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하도 연락을 안 받아서 이렇게 해서라도 널 부른 내 정성 좀 생각해줘라.”

또라이 새끼.

주언은 여한올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지금 상황 때문에 부상당한 사람들을 봤다. 명훤을 위해 했다고 하면 모든 책임 또한 명훤에게로 돌려지는 게 아닌가.

주언이 사나운 목소리로 여한올에게 쏘아붙였다.

“명훤이 탓으로 돌리지 마.”

기자가 했던 말은 반쯤 틀렸고, 반쯤 맞았다. 원한은 맞았지만 그 원한은 명훤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AGT가 원한을 가지고 명훤을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AGT는 명훤을 영입하려고 하고 있었다.

“아아.”

여한올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자신에게 앙칼지게 대드는 주언을 바라봤다.

“명훤이 탓이 아니지.”

“…….”

“네 탓이지.”

“여한올!”

여명훤이 언성을 높였다.

“너 때문에 우리 명훤이가 그 개 같은 곳에 있는 거 아니야.”

그와 동시에 총이 발포되었다. 총알이 향하는 방향에, 유리창이 겹겹이 생겼다. 총알은 유리창을 손쉽게 뚫었으나 유리창이 벌어 준 찰나에 여한올이 자세를 틀어 총알을 피했다.

“헉… 헉.”

정찰원의 능력인 듯 뒤에서 헉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명훤아 기관에서 안정적인 삶을 산다고? 무슨 따뜻한 프라푸치노 같은 소리를 몇 년 동안 하니.”

여한올이 하는 대화를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모든 상식선이 붕괴되고 있었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왜 나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어.”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라는 걸 알아서 책망하는 말을 나중으로 미루려 했으나, 저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왔다. 명훤을 이해하려고 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은 각자 다르니까.

“네가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진창은 내가 구르면 되니까.”

주언도 가끔 말하지 않아도 알아줬으면 하길 바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주언은 명훤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이해하려고 애썼다.

오랜 시간 함께했으니까, 그만큼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만해서. 어차피 계속 같이 있을 테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언젠간 들으면 되니까. 그런 순간들이 쌓여 오해가 되고, 틈이 되어 사이를 벌려 놓는 줄도 모르고. 숨기는 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뭐. 대화는 여기까지 할까.”

손님이 더 온 것 같으니까.

여한올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명훤이 손안에 쥐고 싸고돌았던 주언을 더 흔들어놓을 좋은 기회였는데.

명훤도 예리한 기감력으로 여러 명의 인원이 이쪽으로 향하는 걸 감지하곤 뒤로 조금 물러섰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한올을 경계했다.

우우우웅!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공간이 일순간 뒤틀리더니 곧 건물에 거대한 원형 모양의 구멍이 생겼다. 먼저 도착한 건 AGT 팀원이었다. 세 명의 인원이 그 구멍 사이로 들어왔다.

“결국에는 저 새끼 혼자 똥 싼 거 치워야 되잖아.”

피부색이 짙은 남자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한올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곧 한올과 뒤에 있던 정찰원들이 허공에 두둥실 떴다.

“다른 애들은?”

“네가 여기 있는 사이에 초원이가 모아뒀다.”

“다행이네.”

남자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한올에게 물었다.

“성공했냐?”

“그런 것처럼 보여?”

“아니. 팀은 무슨. 너 죽일 것처럼 보는데.”

“헤헤.”

“미친 새끼. 그래서 이다음은?”

욕은 하고 있지만 한올에게 왜 실패했느냐는 책망은 하지 않았다. 도리어 다른 지시를 물어보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왕 온 거 화려하게 날뛰어 줘야지. 기관은 수도 한복판에서 날뛰는 테러리스트 하나 못 잡고 세금 처받냐고 욕먹게.”

휘이잉. 콰쾅!

곧이어 반대쪽 백화점 벽이 찢어발겨졌다. 그 사이로 강노훈을 필두로 1팀 사람들과 2팀 사람들이 백화점 안으로 진입했다.

“체포한다!”

한올이 장난스럽게 눈매를 휘며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선량한 미소라고 착각할 정도로 맑은 웃음이었다.

“말 안 듣는 동생도 좀 패줘야지.”

“…여한올.”

“아버지한테 전해. 백화점에 있던 사람들 제법 사는 사람들 같던데. 몸값 제대로 받아낼 테니까 돈 준비해두라고.”

강노훈에게까지 들리진 않지만 주언과 명훤이 있는 쪽에는 한올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한올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리모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우리는 가자.”

한올이 여유롭게 웃으며 손을 휘적이며 작별 인사를 고했다. 폭발에 대비한 아이템을 가지고 온 AGT는 유유자적하게 백화점 건물을 빠져나갔다.

“젠장. 피해!”

리모컨의 정체를 알아챈 강노훈이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엎드렸다. 명훤이 주언의 허리를 낚아채 품에 안았다.

콰, 콰, 콰, 콰, 쾅!

여기저기에 설치해 놓은 폭탄이 하나둘씩 터지기 시작했다. 폭발이 끝나고 난 뒤, 건물은 거의 넝마나 다름없이 변해 있었고 AGT는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후드득. 건물 잔재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명훤 씨. 사람들은?”

“옥상이랑 지하에 나눠서 있었어요. 아마 한 쪽은 위장된 AGT일 겁니다.”

명훤의 외침에 강노훈이 빠르게 팀을 셋으로 나눴다. 혹시 있을 생존자를 위해 한 팀은 지하로 가고, 다른 한 팀은 옥상에 갔으며 남은 팀은 도망치고 있는 AGT를 뒤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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