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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26화 (26/112)

#26

하지만 그 사실은 절대 아는 척해선 안 됐다.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강윤재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

“안 그래도 이레귤러 게이트 때문에 바쁠 텐데 가 봐. 더 이상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한 번 윤재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자, 대화를 너무 서둘러 끝내려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흐릿했던 초점이 순식간에 예리하게 빛났다.

“잠깐만.”

탁.

명훤이 닫히려던 문을 억지로 붙잡았다. 틈을 벌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명훤이 인상을 굳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윤재도 명훤과 키가 엇비슷했지만 고도의 훈련을 받아 온몸이 근육에 둘러싸인 명훤과 덩치 차이가 확실하게 났다.

‘그러고 보니.’

주언은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분명 친구 집에 간다고 했었다.

“물어볼 게 있어.”

“뭐.”

“분명 네 집에 있을 거라고 했던 주언이가 왜.”

“…….”

“왜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당장 주언을 되찾아 와야 된다는 생각에 이상하다고 느꼈던 점이 이제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걸 왜 내가 말해줘야 해.”

“뭐?”

“주언이가 아프든 말든 넌 관심도 없었잖아.”

“그게 무슨 개소리야. 주언이 아파?”

“아프냐고? 그걸 이제 물어봐?”

윤재가 헛웃음을 터트리다가 일순간 정색하며 명훤을 노려봤다.

“주언이 아프냐고!”

명훤의 고함에 강윤재가 싸늘하게 웃었다.

“아프냐고? 그 말은 틀렸지. 아팠었지.”

“…그게 무슨 소리야.”

“네 가이딩을 할 때마다 주언이 아파했던 거. 너 정말 몰랐어?”

힘들어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호윤이 공격 1팀에 들어왔을 때, 당장 내치지도 못할 걸 알아서. 주언이가 덜 힘들길 바라서 가이딩하는 걸 이용해 먹으려고 곁에 뒀다.

“힘들어해서, 그래서….”

명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재가 얼굴을 구겼다. 주언이 이 무심한 남자를 어디까지 사랑했는지 곁에서 지켜봤다. 윤재는 그게 너무 싫었다. 왜 곁에 있는데도 못 알아봐.

“풍화증.”

“가이드가 풍화증에 어떻게 걸려.”

가끔 보는 사람보다 매일 보는 사람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게 더욱 힘들다. 명훤의 어이없다는 목소리에 윤재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세상에 없는 일이 어디에 있어.”

“거짓말 치지 마.”

“그렇게 한 번에 간 게 차라리 덜 고통스러웠을 거야.”

“강윤재.”

“네가 왜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지 말해달라며. 새끼야.”

윤재가 화를 참지 못하고 명훤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명훤은 윤재에게 순순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명훤은 그대로 윤재의 멱살을 잡아 벽에 내던졌다.

탕!

“쿨럭!”

등을 세게 부딪혀 기침을 토해내던 윤재가 곧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명훤을 노려보았다.

“거짓말하지 마.”

“그건 그냥 네 바람이겠지. 이제 와 죄책감이라도 느낄까 봐 부정하는 거야?”

“하. 아니야… 그럴 리 없어.”

“…….”

“거짓말이라고 해!”

명훤은 윤재가 주언을 입에 담을 때 보이는 그 표정이 싫었다. 윤재는 주언을 향한 감정을 여전히 눈치 못 챈 듯싶었지만 명훤은 저 눈빛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강윤재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여명훤. 너도 나 엿 같겠지만, 나도 너 엿 같아.”

“…우주언 어디에 있어.”

“없다고 했어.”

“…….”

“더 할 얘기 없지. 우리. 어차피 중간에 주언이가 있어서 허울뿐이지만 친구로 있었던 거니까.”

“주언이가 이제 없다는 듯이 얘기하지 마.”

명훤이 이를 갈며 말했다. 왜 모두가 주언이 죽었다고 말하는 걸까.

“죽음을 수용하는 데에는 다섯 가지 단계가 있대. 그 첫 번째가 너처럼 부정하는 거고. 너도 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부정하고 있는 거잖아.”

죽음이라는 단어에 명훤이 사나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닥쳐.”

누가 죽어.

명훤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주언이 없으면 세상이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갈 리 없는데. 세상이 아직도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가는데. 주언이 죽었다니. 게다가 죽기 전에는 풍화증에 걸려 있었다니.

명훤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며 윤재는 멱살이 잡혀 구겨진 옷을 탈탈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네 옆에 있으면 더 아픈데도, 네 곁에 있고 싶어 했어.”

“…….”

이호윤이 주언에게 비꼬던 순간이 생각났다. 주언은 그때 미안하다고 했다. 체력 관리를 못 한 게 아니라 아픈 거였다는데.

“네가 헤어지자고 하기 전까지.”

그때 자신은 무슨 말을 했더라.

표정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

느리게 멸망하는 세상은 너무 지루했다.

주언이 없어도 매일 하루는 굴러갔다. 명훤도 매일 평소처럼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면 인기척 없는, 불 꺼진 집에 돌아왔다. 창문을 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매일같이 주언의 향기가 사라지는 게 애가 달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주언이 쓰던 물건과 같은 걸 새로 샀다. 주언의 외출복, 잠옷, 향수, 샴푸, 그가 입었던 속옷까지 똑같이 사서 빈자리를 채워 넣었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명훤아.’

너무 간절한 탓인지 때때로 주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돌렸고, 그때마다 절망하며 허공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감각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으니까.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움직이라는 대로 움직였다. 모든 감정이 풍화되어 기계처럼 움직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콰, 콰, 콰아앙!

명훤은 기계적으로 자신에게 몰려오는 몬스터를 향해 능력을 휘둘렀다. 초록색의 피부를 가지고, 어린아이 정도의 키를 가진 몬스터는 고블린이었다. 보통 몬스터와 다르게 전략과 무기를 이용하여 싸워서 성가신 존재였다.

예전과 다르게 거칠고 불안정한 명훤의 능력이 스파크를 튀며 목표한 지점을 살짝 비껴갔다.

키에에엑!

그대로 죽지 못한 고블린이 비명을 지르며 괴성을 질러댔다. 고함이 던전을 가득 울리고, 곧 사방에서 몬스터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강노훈이 명훤에게 소리를 질렀다.

키엑!

돌 틈 사이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던 몬스터가 예리한 칼날로 명훤의 팔을 노렸다. 칼이 팔에 파고들었다.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살을 가르고 근육까지 가르려던 순간이었다.

“명훤 씨!”

쿠쿠쿵.

서윤진이 능력을 써서 명훤의 팔에 공격을 퍼부었다. 몬스터가 검게 그을려 바닥에 떨어졌다. 급하게 공격하느라 명훤의 살갗 위도 그을렸다. 피가 뚝뚝 흐르고, 피부에서는 탄내가 났음에도 명훤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강노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칫하면 동료를 잃을 뻔했다. 더 화나는 건 명훤의 능력이 부족해서, 혹은 방심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자칫했으면 명훤 씨 팔 날아갔어.”

강노훈의 기함에도 명훤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서, 스스로의 목숨조차 방관했기 때문에 죽을 뻔한 것이다. 강노훈이 얼굴을 사정없이 구겼다.

“뒤에 서 있어.”

하라는 대로 잘 따라서 괜찮아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여명훤은 완전히 고장 났다.

강노훈은 명훤에게 휴가를 내주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것보다 억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강노훈은 제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실수했어.’

하지만 어쩌면 명훤에게는 주언의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이런 말을 하면 미안하겠지만 노훈은 주언이 명훤을 생각하는 크기보다, 명훤이 주언을 생각하는 크기가 훨씬 적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을 지도.’

주언의 사랑은 정직했다. 보이는 그대로의 크기로 주언은 성실하게 명훤을 사랑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도 주언이 명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여명훤의 감정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명훤, 그 스스로조차도.

원래 방어를 위주로 뒤에서 서포트 하던 노훈이 공격 최전방에 섰다.

“윤진 씨!”

“네. 옆에서 서포트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윤진이 노훈을 보조했다.

휘익. 바람이 몬스터의 몸을 가를 때마다 몬스터의 몸이 깔끔하게 분리됐다.

강노훈이 빠르게 다가오는 몬스터를 처리했다면, 윤진은 장거리 공격이 가능해 지원 사격을 맡았다.

탁! 뒤에 잠깐 서 있던 명훤이 붙잡혔다. 이호윤이었다.

“가이딩 안 할 거예요?”

“방사 가이딩 해.”

명훤의 담담한 말에 이호윤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속도 안 나요.”

“약 먹고 있어.”

“내가 있는데 왜 약을 먹는 건데요.”

“닿기 싫으니까.”

타인의 온기가 소름 끼쳤다. 하지만 그걸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이호윤이 자존심 상했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원망하는 거야?”

“안 해.”

허례허식은 집어치우겠다는 듯 존댓말을 때려치운 이호윤이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제멋대로 반말을 해도 명훤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 사실이 이호윤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주제에, 자신이 없어도 아무런 상관 없다는 듯한 무감한 얼굴을 보며 아랫입술을 씹었다.

주언이 아무리 A급이라도 해도 S급을 가이딩 하는 건 벅찬 일이었고, 나날이 벅차 하는 주언이 느껴졌기에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감시역으로 들어온 것이니 이용할 만큼은 이용해야지 수지에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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