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27화 (27/112)

#27

“거짓말.”

“…….”

선택한 건 자신이었다. 주언이 벅차 하는 걸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가이드가 풍화증에 걸릴 리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힘들어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냥 벅차하는 건 줄 알아서 가이딩 받는 횟수를 줄였다. 약을 먹고, 이지우의 가이딩을 받으면서.

힘들어 보여서 그런다고 말하면 주언이 자존심 상해할까 봐 말하지 않았다. 말했어야 됐는데. 힘들어하는 걸 눈치챘다고, 우리 사이니까 자존심 상해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 가이딩을 받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모든 건 너를 위해서였다고.

평생 하지도 않는 배려를 주언에게 해보겠다고 참았던 자신이 너무 병신 같았다. 그냥 말했다면 주언의 상태가 어떤지 알았을지도 몰랐다는 가정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혼자 고통스러워 할 줄도 모르고.

“그런데 왜 가이딩을 안 받아. 너 이러면….”

명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짐작했는지 이호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이호윤이 뒷말을 삼켰지만, 그 뒤에 따라올 말이 뭔지 알았다.

S급에게 약은 그저 기운을 진정시켜주는 것이 아닌 폭주를 조금 늦춰주는 정도의 효과밖에 내지 못했다. 폭주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폭주를 일으킨 당사자가 휘말려 목숨을 잃는다. 스스로의 능력에 먹혀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면서.

하지만 뭐 어떤가. 죽어도 상관없었다. 고통스러워도 상관없었다.

“상관없어.”

“…뭐?”

“상관없다고.”

명훤이 벽에 등을 기댔다. 오히려 고통받고 싶었다. 주언이 아팠던 만큼. 명훤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향한 분노가 제어되지 않았다.

정말 풍화증이었다면.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한 번 풍화증이라는 소리를 들은 이후 주언이 사라지기 전의 행동들이 퍼즐을 끼워 맞추듯 이해가 갔다.

“나 너 절대 죽게 못 놔둬.”

이호윤은 최대한 명훤에게 가까이 섰다. 방사 가이딩은 기운이 빨리지만 이렇게 거부하는데 억지로 신체 접촉을 해 가이딩을 해봤자 흡수율이 떨어질 게 뻔했다.

이호윤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가이딩은 그 누구보다도 효율이 좋았으나 여명훤에게는 가이딩의 효율이 급격히 떨어졌다.

자신의 가이딩 실력이 우주언에게 절대 뒤처지지 않는데, 여명훤에게는 우주언의 가이딩이 더 효과 있다는 건 문제가 이호윤이 아닌 여명훤에게 있다는 뜻이었다. 여명훤은 본능적으로 우주언이 아닌 다른 사람의 가이딩을 거부하고 있었다.

‘눈치챈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지만.’

자존심 상해서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그 틀을 깨려면 다른 사람의 가이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해주는 것뿐이다.

“야. 여명훤. 네가 네 어머니 말고 우주언을 선택했던 걸 우주언은 몰라주겠지만….”

이호윤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명훤이 그 사실을 깨닫게 하려면 우주언의 죽음을 확실히 인정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죽음을 인지하는 순간 여명훤의 드높던 벽은 무너져내릴 것이고, 그때가 이호윤이 들어갈 적기였다. 하지만 명훤은 이호윤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눈 깜박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자 명훤이 순식간에 이호윤의 앞에 서 있었다.

“네가.”

명훤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던, 피가 줄줄 흐르는 팔이 순식간에 이호윤의 목을 붙잡았다.

“…갑자기 무슨… 컥!”

갑자기 숨통이 막힌 이호윤이 버둥거렸다. 몸이 들려 있는지 발을 버둥거려도 바닥에 닿지 않고 허공에서 덜렁일 뿐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명훤의 시선에 이호윤은 죽음을 감지했다.

죽음. 두 글자가 강렬하게 와닿자 이호윤의 사지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목이 조여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나, 이호윤은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네 아버지가 그 정도 수도 못 읽을 거라고… 커억…! 생각했어?”

명훤은 여씨 집안과 인연을 끊었다. 집안과 인연을 끊는다고 한들 이 나라에 있는 이상, 집안의 시선이 계속 닿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회유하기 위해 어머니를 이용할 거라는 사실도. 어중간하게 어머니를 붙잡고 있으면 여씨 집안과의 인연이 계속 이어져 있다는 착각을 받을 수도 있었기에 명훤은 선택해야 했다.

‘두 손에 원하는 걸 다 쥔 채로 날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 주변 건들지 마.’

‘협박은 말이야.’

비열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연했다.

‘상대에게 통하는 패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야.’

분했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어머니가 내쳐진 건 자신을 굴복시키고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휘말리는 순간 부친은 영원히 명훤을 손아귀에 넣고 제 뜻대로 휘두를 것이다. 어렸던 여명훤은 고로 선택해야 했다. 한 명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여명훤을 인간답게 만드는 모두를 잃는 것 또한 부친이 바라는 것일 테니까.

어중간하게 두 명 다 지킬 수 없었다. 어머니가 집을 나올 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나올 줄은 몰랐지만 명훤이 결국 선택한 건 주언이었다.

차라리 어머니는 철저히 외면해서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게끔 두고, 주언만 곁에 두고 지키기로 생각한 건 자신이었다.

“그 사람이 붙인 감시역이 너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네.”

“커억….”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일단 이거 놓고….”

“대답해.”

“놓으면…!”

“그 사람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관여한 건데.”

우주언이 자신 모르게 어머니와 연관이 되어 있었던 것도, 이호윤이 하필 이런 시기에 들어온 것도, 어머니가 죽은 것도.

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면? 이 모든 게 이토록 틀어진 건,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연달아 해서 일어난 게 아니라 타인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던 거라면.

“나를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는 건 아직도 포기 못 했나 봐.”

명훤이 이호윤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바닥에 엎어져 손바닥이 까졌으나 일단 숨을 쉬는 게 먼저였다. 죄였던 목이 갑자기 풀리자 기침이 쉴 새 없이 나왔다.

쿨럭. 쿨럭.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낸 이호윤은 명훤을 비웃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해? 결국, 네 선택으로 둘 중 한 명도 지키지 못했잖아.”

“차라리 잘됐어.”

“뭐…?”

이호윤은 나름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해도 가이딩은 필수였다. 우주언을 제외한 다른 가이드에게 받는 가이딩이 흡수율이 낮으면, 개중 자신이 가장 나았다. 그러니 여명훤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 죽일 수 없을 거라고 자만했다. 그 증거로 방금까지 목을 비틀 기세로 목을 잡았지만 결국에는 놔주지 않았는가. 멍이 든 듯 목이 아파왔지만 이호윤은 겁내지 않았다. 이 정도까지는 예상했다.

“그러면 나한테 소중한 걸 다 없애지 않는다는 뜻이잖아. 나를 이용하고 싶은 거라면 패를 하나쯤은 남겨뒀을 거잖아.”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패는 우주언뿐이다.

명훤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희미하게 열기가 서렸다.

“역시… 죽은 것도 내 앞에서 사라진 것도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주언은….”

명훤의 목소리에 이호윤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감지했다. 이호윤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주언 어디에 있어. 누가 데려간 거지.”

여명훤의 기이하게 뒤틀린 눈빛이 형형하게 빛을 발했다.

**

여지웅. 그가 누구인가.

에스퍼가 사기업 소속으로 있는 것이 허용된 대다수 국가와 반대로 국가 기관에만 에스퍼가 허용되는 법안을 통과시킨 여당 대표이자 특수 능력 기관의 중추.

에스퍼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수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여태껏 에스퍼의 능력을 국가의 승인 하에만 쓸 수 있게 함으로써 에스퍼 능력 관련 범죄율을 극단적으로 낮춰 일부에게는 격렬한 지지를 받는 인물.

차기 대통령으로까지 언급되며, 뒤에서는 무소불위 권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 사람.

여명훤의 아버지.

‘누리는 게 많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항상 모든 걸 가져왔던 여지웅이 명훤에게 세뇌하듯 하는 말이었다. 명훤은 강제로 누리게 된 것들을 지키기 위하여 가진 모든 걸 포기해야 했다.

인격.

취향.

의견.

사람.

그 어떤 것도 여명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포기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부모가 부모 같지 않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불행이었다. 누린 건 많지만 그 어떤 것도 명훤의 것은 아니었다. 모든 건 통제 아래 있었고, 조금의 실수가 생겼을 때 모든 원망만이 명훤의 것이었다.

집 지하에는 큰 짐승을 가두는 용도의 케이지가 있었고, 그곳은 여명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곳 중 한 곳이었다. 에스퍼로써 능력을 발현하지 못해서. 수준 맞지 않는 인간에게 대답을 해줬기 때문에. 전날 비가 내려 생긴 웅덩이를 밟아 바짓단에 흙탕물을 튀었다는 이유로.

인격이 배제된 삶을 강요받는 삶. 김은선은 여지웅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여명훤을 향한 학대를 기꺼이 무시했다. 학대는 사람을 무디게 만들었다. 학대를 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방관하는 사람도.

한올은 명훤이 한올을 싫어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반대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각성하지 못한 명훤은 쓸모없다고 판단되어 다소 관대한 처분으로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한올이 여씨 집안에 정식 입양이 결정되었다.

그렇게 명훤은 자유가 되었다. 평생 철장 속에서 길들여진 맹수가 갑작스럽게 철장 속을 탈출하면 적응하지 못하고 쇠퇴하기 마련이다. 명훤도 그랬다. 주언은 모를 것이다. 우주언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여명훤을 살아가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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