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여전히 명훤은 다른 사람과 궤를 달리하는 부분은 있었지만, 주언은 그런 명훤을 사랑해주었다. 명훤의 인생에 있어 경이로운 기적이었다. 이제 겨우 행복을 찾은 거라고 생각했다. 잠깐 맛본 온전한 행복은 명훤을 고양시켰다.
‘역시 내 아들이야.’
‘…….’
‘인위적으로 AA급 에스퍼를 판정받은 애새끼한테 여씨 성을 주는 게 아니었는데.’
‘…여한올은 어디에 있습니까.’
‘쓸모없는 걸 뭐하러 들고 있니. 시간이 아깝지.’
‘…….’
‘돌아와라.’
‘…싫습니다.’
‘뭐?’
그만큼 S급 에스퍼로 각성했을 때의 절망감은 다른 때보다 아득했다. 겨우 봤던 빛을 포기하고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케이지 안이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린 여명훤은 주언의 곁에 남았다.
불행하게 여지웅의 시선을 잡아끈 명훤의 능력은, 다행스럽게도 여지웅이 명훤을 쉽게 건들 수 없는 무기이기도 했다.
주언이 바라지 않아서 다른 나라로 귀화할 수도, 지방에 갈 수도 없어 기관에 가게 되었다. 10년 동안 묶여 있고, 각인을 할 수 없는 조건에 여지웅의 의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였다.
아주 잠깐 예전 생각을 했을 뿐인데 역겨운 음식을 씹은 것처럼 불쾌해졌다. 명훤은 미간을 찌푸렸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중요한 건 여지웅이 우주언을 어떻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어디에 있어.”
“우주언이라면…!”
“여지웅. 어디에 있냐고.”
이호윤이 알 리가 없었다. 여지웅이 정보를 흘렸을 리 없으니까.
“그건….”
여기까지는 호윤이 상정한 범위 내였다. 새파란 안광에 등골이 서늘해졌으나 호윤은 굴하지 않고 말했다.
“그걸 내가 왜 알려줘야 하는데.”
이호윤은 저도 모르게 대답하려다가 멈칫했다. 이호윤은 여지웅의 말을 믿었다. 여명훤은 자신을 죽일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이호윤의 말에 명훤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런 우스운 장난 칠 때는 아닐 텐데.”
“혼자 이상한 생각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호윤의 말이 멈췄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한 악력이 목을 옥좼다. 그러곤 이호윤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는 듯 속삭였다.
“여지웅의 사람이라면 내가 못 죽일 줄 알았어?”
이제껏 이호윤은 살려둔 건, 아슬아슬한 평화나마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죽인다고 한들 여지웅은 다른 사람을 보내올 게 분명했으니까.
여명훤의 자비 없는 시선에 진심을 읽은 이호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명훤이 가야 할 곳은 한군데밖에 없었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궁전과도 같은 집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두 발로 다시 안으로 들어갈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었는데. 분노가 형상화되어 손안에 휘몰아쳤다.
쾅!
명훤이 손을 휘젓자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하.”
부술 생각으로 능력을 썼는데 보안 장치가 걸려 있는지 미세한 균열밖에 가지 않았다.
쾅. 쾅. 쾅. 쾅.
명훤은 개의치 않고 능력을 휘둘렀다. 명훤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견고한 벽에 서서히 금이 갔다.
쿠웅. 건물의 입구가 무너져 내리자 안에 있던 사용인이 질색하며 입구까지 다가왔다.
“도련님?”
오래 일한 사용인이 명훤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일어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 버벅거리는 사용인을 뒤로하고 명훤은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비켜.”
“이렇게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다음 말이 나가는 일은 없을 거야.”
명훤의 말에 사용인들이 주춤했다. 명훤이 자연스럽게 그 사이를 지나쳐 갔다. 어디로 갈지는 뻔했다. 여지웅은 자신이 오는 걸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집은 여전히 역겨우리만큼 거대했고, 먼지 한 톨 없었으며, 그 사이에는 여지웅이 기다렸다는 듯 실내 온실에 앉아 있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그중 이 집에 가장 오래 있던 사용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다급한 목소리로 명훤을 막으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쨍그랑! 힘을 너무 세게 주어 온실 문을 잡은 것만으로도 문이 박살 났다.
“되었네.”
여지웅은 놀란 기색이 조금도 없는 얼굴로 사용인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손을 휘저었다. 사용인이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랜만에 인사하는구나.”
“우리가 인사할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가족 사이에 인사를 안 하면 어떤 사이에 인사를 하겠니.”
고상한 언어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우아한 거죽을 뒤집어쓴 괴물.
사사로운 대화를 섞을 가치도 없었다.
“우주언 어디에 있습니까.”
오랜만에 보는 여지웅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했지만, 노쇠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깊은 연륜이 더해져 중후함이 느껴지게 했다.
“으음?”
“저에게 바라는 게 있으면….”
힘을 너무 세게 준 탓에 손이 희게 질렸다.
“네가 그동안 내 말을 참 듣진 않긴 했지.”
“고작 그런 이유로…!”
명훤이 비릿하게 웃었다. 분노를 참으려고 애썼으나 턱이 도드라진 명훤의 얼굴에 서려진 분노는 쉬이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네 것이면 네가 간수를 잘했어야지.”
“제가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명훤의 몸 주변이 타오르듯 일렁였다.
“저런. 하지만 잘못 짚었다. 너도 들었을 텐데.”
여지웅은 기분이 좋았다. 다시 여명훤의 고삐를 쥘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위험한 능력을 가지게 되어 다시 목줄을 채우기가 어려워졌던 짐승이 되돌아왔다.
“이미 풍화증에 걸려 인질의 가치가 없는데 내가 굳이 왜 노력을 해야 하지?”
여명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자신을 이용하려면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지 않나.
“거짓말.”
“지금 거짓말을 했다가 나중에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되면 괜히 손해 보는 건 나인데. 내가 왜 거짓말을 하지?”
여지웅이 여상한 어조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오해받는 건 질색이라며 샐쭉 웃었다.
“…….”
“네가 누군가의 곁에 있으니 그 사람이 망가진 것 아니냐.”
“…….”
“내 통제 아래 있었으면 그랬을 리도 없었을 텐데.”
아쉽다는 투로 혀를 찼지만,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여지웅이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
“앞으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다시 집으로 돌아와.”
연약해진 내면을 철저히 파괴하고, 잔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부순다. 풍화증 치료가 진전이 되어 우주언을 치료해준다는 명목이 생겼으면 더욱 다루기 쉬웠을 텐데. 여지웅이 낮게 혀를 찼다. 타이밍이 안 맞았다. 그러니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하며 여명훤을 다시 수중에 넣어야 한다. 여명훤의 자아가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 터였다.
여지웅에게 필요한 건 자식이 아니라 효과적인 장기말이었으니까.
여지웅은 절망으로 얼룩져가는 여명훤의 얼굴을 무감각하게 쳐다보았다.
유일했던 가족, 자신을 살아가게 만든 동기, 지금의 여명훤을 인간답게 구성하던 모든 것. 모든 것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차라리 인질로 잡혀 있길 바랐던 알량한 마음이 무겁게 명훤의 폐를 짓눌렀다.
“진짜 죽었다고?”
눈앞에 남은 마지막 의혹까지 말소되자 남은 건 명훤의 죽음이었다.
**
Rrrr.
강윤재는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받지 말까. 잠깐 고민했으나 그 순간은 짧았다.
“예. 여 의원님.”
짜증 섞였던 얼굴과 다르게 목소리는 깍듯했다.
-정말 죽은 게 맞는 거겠지.
여지웅이 드물게 캐묻듯이 윤재를 추궁했다.
“명훤이가 왔다 갔나요?”
-좋은 패로 쓸 수 있었는데 아쉽군.
“임상 시험이 조금만 앞당겨졌으면 의원님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었을 텐데요.”
강윤재는 여지웅의 사람이었다. 여지웅은 강윤재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윤재는 그런 지웅의 투자에 보답하듯 성과를 내었다.
-자네 같은 인재가 어디에 있다고.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말하는 윤재의 목소리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삐삐삐삐. 뒤에서 규칙적으로 기계음이 울렸다.
-연구실인가?
그 소리가 전화 너머로도 들렸는지 여지웅이 물었다.
“네. 당분간 임상 시험 때문에 계속 밑에 있으려고요.”
-그러고 보니 자네 친구이기도 했었지.
“그렇죠.”
위로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건조한 목소리였다.
-아쉽게 됐어. 아꼈다면 그렇게 쉽게 보낼 수 없었을 것 같네만.
여지웅은 마지막까지 강윤재를 떠보는 것이다. 뱀 같은 새끼. 강윤재는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하지만 여지웅의 의심은 틀린 게 아니었다.
“임상 시험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곤 다시 한번 확신에 찬 어조로 여지웅에게 보고했다.
“말씀드린 대로 우주언은 임상 시험 도중에 사망했습니다.”
윤재가 눈을 감고 있는 주언의 뺨을 쓰다듬었다. 차게 식은 뺨이 손안에 감겨왔다. 하지만 얕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주언의 가슴이 주언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
뭐가 문제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서밖에 찾을 수 없었다.
주언의 곁에 있으면 단단했던 심장의 표피가 말랑말랑해졌다. 그게 참을 수 없이 좋다가도, 죽을 것처럼 싫었다. 태어날 때부터 약한 건 죄라고 교육받았다.
‘왜 말 안 했어?’
‘말할 필요 없는 일이잖아.’
‘나는 뭐든 알고 싶어.’
‘…….’
그래서 주언이 말하지 않은 걸 추궁할 때도,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주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주언을 볼 때마다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네 앞에서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이면 네가 떠날 거라는 악몽에 시달렸다. 절대 놓고 싶지 않은 만큼, 너를 사랑하면 사랑하게 될수록 괴리감이 짙어졌다.
“흐… 미안해.”
명훤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끓는 듯한 소리를 냈다.
몰랐다. 나약한 모습을 내보이는 것이 제일 큰 용기를 내는 거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