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이번 연말을 마지막으로 세상이 죽어버릴 줄 알았는데 우습게도 새로운 해가 찾아왔다. 명훤은 짙은 피로감에 메마른 눈가를 쓸었다.
주언이 사라진 지 이제 거의 넉 달이 지나고 있었다. 매일이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견뎌내는 것이 되었다. 살아 있되, 살아 있다고 보기 힘든 상태로 매일 주언이 있을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살았다.
“명훤 씨. 바로 다음 일 해도 괜찮겠어? 무리하는 거 같은데. 급한 거 아니니까 다음으로 미뤄도 돼.”
“괜찮습니다.”
“내가 앞에 나서도 되고, 뒤에서 명훤 씨가 서포트 할래?”
“상관없어요.”
예전처럼 실수하는 일도 없었다. 명훤은 매일같이 자신을 쥐어짜 냈다. 전처럼 완벽한 일 처리로 다른 사람들은 명훤이 괜찮아졌다고 믿는 듯했지만 정반대였다.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썩었다.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금방 터질 것 같은 속내를 꾸역꾸역 삼켜내며 명훤은 견뎌냈다.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걸 막연한 감각으로 인지했음에도 방관했다. 편하게 죽는다면 그건 주언을 향한 기만이다.
부정했고, 분노했으며, 어디론가 사라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으나 이제는 결국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건조한 웃음이 집 안에 울렸다. 이제는 주언의 향기가 모두 사라졌다. 그저 공허한 공기만이 집 안을 부유했다.
그때부터였다. 잠조차 이루지 못하기 시작한 건. 아무리 독한 술을 마셔도, 수면제를 털어 넣어도 짙은 잠이 오지 않았다. 술병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밖에서의 모습은 점점 전보다 더 완벽해져 가는데 집 안은 점점 망가져 가고 있었다. 혼자 있어도 괜찮아졌다고 판단한 노훈은 명훤에게 길게 휴가를 내주었다.
억지로 지켜야 하는 일상이 없어서 생활이 완전히 붕괴됐다. 원망과 후회, 분노와 애정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엉겨 명훤의 내부를 휘저었다.
쨍그랑! 화가 참을 수 없이 나서 손에 힘을 너무 세게 줬는지, 손안에서 술병이 깨졌다. 주언이 보면 한심하다고 떠나갈 텐데. 이런 생각이 잠깐 들다가도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어.
손에 유리가 박혔다. 명훤은 그런 자신의 손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술과 피가 한데 섞여 바닥에 떨어졌다.
“아.”
생각보다 깊게 베였는지 바닥에 혈흔이 낭자해졌다. 치료해야 된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으나 몸을 도저히 일으킬 수 없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 그냥 이 사소한 상처에 내일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죽기를 바랐다. 절망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입안에 머금고 있어야 했다.
“주언아.”
주언을 찾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런데 너 말고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데 이제 들어줄 네가 없어서. 혼자서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너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내가 너를 찾을 때 너는 못 오는 거였지만, 네가 날 찾았을 때는 내가 가지 않은 거였다.
“너도 이렇게 아팠어?”
이렇게 숨도 못 쉴 만큼 비참했어? 병원에서 네가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에게 말하지 않기로 정했을 때 너는 어떤 마음이었어?
이제는 물어볼 수 없어, 짐작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짐작마저 너무 고통스러워서 심장이 옥죄었다.
명훤이 건조하게 웃었다.
“또 왔네.”
너무 간절히 바란 탓에 주언이 환영처럼 나타났다. 어떤 때는 전처럼 다정히 바라보다가도, 또 다른 때는 명훤을 원망하듯 쳐다보았다.
“아무 말이라도 해줘.”
잠깐 얕게 잠들었다가도 마치 발작하듯 눈을 뜨기 일쑤였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눈을 뜨면 손을 더듬거리며 옆자리를 더듬었다.
“미안해. 주언아. 어떻게 하면 네가 용서해줄까.”
아주 혹시, 너무도 다정한 네가 나를 가엾게 여겨 혹시라도 돌아왔을까 봐. 환영이 아니라 너일까 봐.
주언이라면 동정이라도 좋았는데.
정신이 서서히 붕괴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완전한 붕괴 끝에 보이는 것은 낙원일까, 지옥일까.
네가 있다면 어떤 곳이라도 낙원일 텐데.
**
Rrrrr.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잠깐 잠이 들었었던 모양이었다.
“으으.”
암막 커튼을 쳐서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서 명훤은 눈을 떴다. 전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여보세요.”
-명훤 씨. 휴가 모레까지인 거 아는데, 혹시 내일 출근할 수 있어? 급한 일이 생겨서….
미안함이 듬뿍 담긴 노훈의 목소리에 명훤이 이마를 짚으며 일어났다. 몸 위를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내려가자 빈틈없는 근육이 잡힌 가슴팍이 드러났다. 어젯밤에 또 다쳤는지 가슴팍 위에 붉은 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예.”
-그래? 다행이다. 그나저나 오늘 명훤 씨….
“이만 끊겠습니다.”
서서히 정신이 깨어나자 명훤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음식 냄새가 났다.
어쩌면 이 또한 정신 착란이 일으킨 환상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명훤은 거스를 수 없는 중력처럼 천천히 침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향긋한 냄새가 났다. 감각이 둔해져 있다고 생각한 게 무색하게 맡아지는 선명한 냄새에 명훤이 집 안을 훑으며, 곧장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우주언?”
누가 들어온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보인 건 잘 차려진 한 상이었다.
갓 했다는 걸 증명하듯 김이 피어오르는 미역국을 바라보았다. 명훤이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흐르는 시간을 느끼는 감각이 지나서 오늘이 며칠인지 핸드폰을 확인한 후에야 알아차렸다.
주언은 요리를 썩 잘하진 못했다. 그래서 뭐를 해도 기본 이상은 하는 명훤이 주로 도맡아 했다. 그렇다고 해도 사 먹는 일이 더 많았지만, 일단은 그랬다.
하지만 주언이 꼭 챙겨주는 날들이 있었다.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날이니까 챙겨줘야지.’
생일.
그러고 보니 벌써 1월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월 24일. 스스로도 잊고 있었던 날이었다. 주언을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적 없던 날.
“…네가 나를 어떻게 버리겠어.”
죽었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순식간에 혈색을 되찾았다.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주 혹시 몰라 손을 뻗어 밥그릇을 만져보았다. 손안에 온기가 느껴졌다. 환상이 아니었다. 진짜였다.
“주언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어도 집 안에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술에 절어 있느라고 들어왔던 주언을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만약 나갔다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터였다. 명훤은 그대로 현관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벌컥. 문을 열자 눈이 대차게 내리고 있었다. 바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설에도 명훤은 그대로 달려 나갔다.
“주언아!”
명훤이 비명이라도 지르듯 주언의 이름을 외쳤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휘이이잉-
눈보라가 피부를 차게 식혔다. 그럼에도 명훤은 쉽게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주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참을 눈밭에서 자취를 남기지 않은 주언을 찾아 헤맸다.
“내가 미안해.”
명훤은 허공에 대고 연거푸 사과했다. 아직도 화가 나서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걸까. 주변 사람들이 극심한 추위에 구겨진 셔츠 하나만 입고 돌아다니는 명훤을 흘끗거렸다.
손발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헤맨 후에야 명훤은 주언이 집에 돌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 추위에 경직됐던 근육이 느껴졌다. 명훤은 개의치 않고 집 안을 뒤졌다. 다용도실부터 시작해서 테라스까지. 하지만 그 어디에도 주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밥은 환상이 아니라는 듯, 차게 식은 채로 여전히 식탁 위에 있었다.
그제야 식탁 위에 있는, 주언이 놔뒀던 그 자리에 그대로 둔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서윤진이 주원에게 송별회 선물이라고 주었던 곰 모양의 인형이다.
‘물건 보존 기능이 있는 아이템이야. 비밀번호 걸 수도 있고. 예약도 설정할 수 있어.’
윤진이 주언에게 했던 설명이 떠올랐다.
“아.”
명훤이 작게 숨을 토해냈다.
주언은 되돌아온 게 아니었다. 그저 마지막 선물을 남기고 갔을 뿐. 명훤이 의자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윤진이 줬던 주언의 선물은 그대로 명훤을 위해 쓰였다. 주언이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잠깐 엿본 희망은,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는 꼴밖에 되지 않아 명훤을 더욱더 깊은 나락으로 빠트렸다.
그러다 문득 식탁 끄트머리에 작은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남색 벨벳의 작은 박스. 명훤은 천천히 손을 뻗어 박스를 들어 올렸다. 그 밑에는 작은 쪽지가 깔려 있었다.
달칵.
명훤은 쪽지를 확인하기 전, 박스부터 먼저 열었다. 그 안에는 반지가 있었다. 예상치 못한 물건에 명훤이 쪽지를 확인했다. 익숙하고 정갈한 필체는 자신의 소식이 아닌 반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가 직접 반지 끼워줘야 돼.
명훤은 반지에 무엇이 있나 천천히 살폈다. 심플한 반지였다.
택배나, 그냥 놔둬도 됐을 반지를 주언은 구태여 아이템 안에 넣어 두었다. 아주 짧은 문장이지만 이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소화시키기 위해 명훤은 수십 번, 수백 번 쪽지를 읽었다.
어쩌면 아주 단순한 걸지 몰랐다. 병에 걸려 아팠다고 했다. 스스로의 몸 상태를 가장 잘 알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쪽지에 직접 끼워줘야 한다며 자신의 반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