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30화 (30/112)

#30

돈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남기는 반지치고 보석 하나 박히지 않은 반지는 어딘가 이상했다. 급했다고 하기엔 정성스레 차린 식사가 걸렸다. 게다가 그냥 반지가 아니라 생일 선물로 주는 반지였다.

경제 활동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서로가 서로에게 돈을 아낀 적 없었다.

둘이 나눠 끼는 반지. 생일 선물이지만 저렴한 축에 속하는 반지. 명훤은 주언의 생각을 읽으려 애썼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

생각을 하나둘씩 더해 도출된 결론에 명훤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신의 손가락에 맞는, 더 큰 쪽의 반지를 꺼내 들어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반지를 끼워달라는 뜻. 다시 돌아올 거라고, 그때까지 자신을 기다려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잃어버려도 신경 쓰지 않을 가치의 반지.

반지 안에는 문장이 작게 각인되어 있었다.

Remember 0515

멈춰 있던 심장이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돌아오면… 그때… 그때 다시 얘기해줘. 명훤아.’

마지막으로 봤을 때, 명훤이 정신을 잃기 전 주언이 분명히 말했다. 돌아올 거라고. 자신의 곁으로. 주언은 그때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반지를 내려다보는 명훤의 속눈썹이 짙게 그림자 졌다. 주언은 자신의 의지로 사라졌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직접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직접 들어야겠다.

“날 못 믿게 만든 건 나니까.”

입 안을 너무 세게 짓씹어 입안에서 비릿한 향이 맴돌았다.

자신을 믿지 못했는데도 주언은 돌아오겠다고 결심했다. 믿는 수밖에 없었다. 명훤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믿지 않으면 죽는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명훤은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언제 해뒀던 걸까. 우리가 어떤 상태였을 때, 너는 어떤 심정으로 만들었던 걸까. 선물을 받은 후와 주언이 사라지기 전의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그사이에 자신을 원망할 일밖에 없었을 것 같은데.

눈가가 뜨겁다가,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이 뜨거워지길 반복했다. 감정이 극과 극을 널뛰기를 반복했다. 몸에 열이 올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폭주의 전조 현상이었다.

명훤은 식탁 옆에 놓인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로 약을 짓이길 때마다 혀끝이 썼다. 명훤은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식사를 하는 게 고행처럼 느껴졌지만 명훤은 다시금 숟가락을 손에 쥐었다.

달그락. 조용히 식기와 숟가락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렸다.

차게 식은 밥이 입 안에서 꺼끌거렸다. 그럼에도 명훤은 멈추지 않고 숟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소화되지 못해 속에 그대로 얹히는 것 같았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게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증명해내는 수밖에 없겠지.”

명훤이 반지를 낀 손가락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때였다.

저벅. 뒤에서 느껴지는 낯선 인기척에 명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대가 반응하기도 전, 명훤의 손에는 총이 쥐어져 있었다.

휙.

“집에 있었네. 어어. 왜 총을 들고 있어?”

“여한올.”

명훤이 입술을 짓이기며 한올의 이름을 불렀다. 주언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생기긴 했지만, 한올이 쓸데없는 일을 벌여 주언이 백화점까지 무모하게 왔던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한올이 여유롭게 양손을 허공에 번쩍 올리며 툴툴거렸다.

“아까 부하가 셔츠만 입고 눈밭을 뛰어다니는 널 봤다고 해서 와 봤더니.”

“여한올.”

“결국 망가진 줄 알고 왔는데… 괜히 왔나.”

“…용건이 뭐야.”

미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해 보여 아쉽다며 혀를 내두르는 한올을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뭐 완전히 정상은 아닌 거 같지만.”

평소라면 한올이 집에 들어왔다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을 명훤이었다. 명훤이 얼굴을 구기며 총구를 한올의 이마에 정확히 조준했다.

“용건이 뭐냐고 했어.”

“우리가 용건이 있어서 보나. 형제라는 게 이유 없이 보기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명훤은 대화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한올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꺼져.”

“걱정해서 온 형한테 너무 냉담하네.”

“…….”

한올은 잠시 숨을 멈추고 말을 골랐다. 백화점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한올의 목적은 늘 하나였다.

명훤을 AGT로 데리고 오는 것.

적기를 매번 가늠하는 데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성공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예전보다 기능은 떨어진 것 같지만, 꼭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더라도 필요했다. 여지웅을 가장 심하게 엿 먹이려면 여명훤이 필요했다.

“너 계속 거기에 있을 거야?”

“…….”

거기가 어딘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어도 단박에 알아차렸다. 한올이 한 손을 뻗었다.

“이제 네가 기관에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

명훤이 한올의 내밀어진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우리한테 와.”

한올이 자신감 가득 찬 목소리로 명훤에게 제안했다.

**

임상 시험의 부작용은 초반부터 조금씩 드러나는 경우가 있고, 마지막에 급격히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우주언의 경우는 전자였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부터 시작됐다. 칫솔에 치약을 짜놓고 까먹는다든가, 잠깐 옆으로 빼놓은 디저트를 잊고 간다든가 하는.

“너 이거 잊었다.”

윤재가 먼저 밥을 먹고 일어난 주언에게 자신의 앞에 놓인 주언의 디저트를 건넸다.

“이게 뭐야?”

“네 디저트.”

주언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서렸다.

이런 사소한 거 하나에 기분이 처질 순 없었다. 주언이 억지로 턱을 당겨 웃었다.

“아. 깜박했나 보다.”

“…….”

윤재의 침묵에 주언이 어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왜 이렇게 깜박하는 게 많지?”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윤재에게 말해야 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이유를 모르는 게 기억이 소실된 탓인지, 아니면 원래 모르는 내용이었는지 확실히 파악해두어야 했다.

“부작용이니까.”

“이것도 네가 전에 설명했었어?”

“그래.”

“잊고 있는 게 점점 많아지고 있나?”

“…어.”

주언은 무엇을 잊고 있다는 감각조차 잊어가고 있었다.

“…미안.”

벌써 몇 번이나 이런 대화를 나눴던 걸까. 알 수 없었다. 풀죽은 주언이 나지막이 사과를 입에 담았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해 줄 수 있으니까.”

윤재의 말에 주언이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다른 안 좋은 부작용에 비해서 훨씬 나아.”

부작용이 초반에 나타났을 때의 장점은 실험을 즉각 중단하거나 투여량을 조절해 부작용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겠지?”

다른 부작용이었다면 목숨이 연관되어 즉각 멈췄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하지만 주언은 부작용 때문에 시험을 중단할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나서 강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언은 죽음보다도 기억을 잃는 걸 가장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그 사실조차 잊었다. 속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인공 장기를 달아야 했지만, 기억을 잃는 것 외에는 큰 부작용 없이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서 강윤재는 임상 시험을 멈추지 않았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기억의 부재가 많아진 주언은 일기를 쓰기로 했다. 신분을 증명하는 걸 들고 오면 안 된다고 했지만, 실험실 내부에서 일기를 쓰는 건 금지되지 않았으니까.

“우주언….”

내 이름.

“여명훤…?”

분명 기억해야 돼서 적어 놨었는데.

주언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시큰거렸다. 가라앉으려고 했던 이름은 다행히도 금방 떠올랐다. 주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그래. 내가 너를 어떻게 잊겠어. 내 일상. 내 반쪽. 내 전부.

모든 삶의 순간들이 너로 점철되어 있는데. 너를 잊었다가 떠올릴 때면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마치 나의 정체성인 것 같아서, 그게 또 마냥 좋아서 배시시 웃었다.

주언은 몇 번이고 명훤의 이름을 되뇌었다. 요즘 들어 매일 아침 하는 일이었다. 강윤재가 그런 주언의 모습을 CCTV 너머로 지켜보았다.

그다음 날, 일기가 사라졌다. 주언은 일기장을 잃어버린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무언가 잊고 있다는 자각은 있지만, 무엇을 잊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주언은 침대맡에 묶여 있는 목도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목도리를 침대 옆에 묶어 놨지?”

주언이 목도리를 풀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절이 무의미한 지하 연구실에 왜 목도리가 있는 걸까. 겨울도 지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왜 자신은 이 목도리를 꽉 묶어 놨을까.

드르륵.

문이 열리고 윤재가 들어왔다. 윤재는 주언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하루에 몇 번이고 주언의 병실을 찾았다.

“주언아.”

“…윤재야.”

주언이 맑게 웃으며 윤재를 반겼다. 실험실에 들어온 이후 주언은 윤재를 가장 의지하게 되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밖에 나갈 일도, 겨울도 아닌데 왜 목도리를 들고 있어?”

“그러게? 너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치워야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 내가 대신 버려줄까?”

윤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절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그래서 욕심조차 내지 않았다. 하지만 서서히 지워져 가는 그 자리에 자신이 차지하고 싶다는 욕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명훤이 나를 싫어했군.’

짐승에 가까운 여명훤의 감에 혀를 내둘렀다. 스스로조차 속일 정도로 억눌렀던 감정을 여명훤은 꿰뚫어봤었던 모양이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