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여지웅의 시선을 피해 주언을 빼낸 것도 완전히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다. 여지웅이 여명훤에게 살아 있다고 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숨겼다. 주언이 인질로 쓰이는 것도, 명훤이 주언이 살아 있는 걸 아는 것도 탐탁지 않았으니까.
“…아니. 일단 들고 있을게. 혹시 기억날지도 모르잖아.”
주언이 어색하게 웃으며 목도리를 힘껏 쥐었다. 손안에 부드러운 감촉이 애달프게 느껴졌다. 기억을 잃고 있어도 여전히 여명훤의 자리는 너무도 컸다. 기억의 공백에 주언은 공허해 보였으나 강윤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그 욕망을 드러낼 때는 아니었다. 아직도 기억은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니까. 섣불리 나섰다간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윤재는 자신의 시선에 담긴 노골적인 감정을 꾹꾹 억눌렀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
여명훤의 자리는 더더욱 지워질 것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연구에 더 몰두해야 할 때다.
“억지로 기억해내려고 하면 더 안 좋을 수도 있어.”
윤재가 주언의 어깨를 잡았다. 평소라면 주언은 자연스럽게 윤재의 팔을 떼어낼 것이다. 주언은 윤재가 모를 거라고 여긴 듯했지만 윤재는 알았다. 주언이 타인과 신체 접촉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도 잊어서는 안 될 걸 자꾸 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신은 주언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이래선 안 된다는 죄책감과 주언이 그어놓은 선 안에 들어갔다는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윤재의 기분을 어지럽혔다.
“정말 잊어서는 안 될 기억이라면 다시 생각나지 않을까?”
하지만 결국 이기는 건, 주언이 그어놓은 선을 넘는다는 쾌감이었다. 온순히 제 손바닥 아래 감기는 주언의 어깨의 감촉에 손끝이 떨렸다.
누군가가 비겁하다고 욕해도 상관없었다. 비겁해도 주언의 곁에 자신이 파고들 수만 있다면.
처음으로 갖고 싶었으나, 처음으로 유일하게 가질 수 없었던 우주언. 어떻게 해서도, 찰나라도 좋았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주언이 자신의 사람이길 바랐다. 한 번 마음속에 옮겨붙은 감정은 진압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번져나갔다.
**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무정한 시간은 아무리 흘러도 주언의 짙은 자국을 옅어지게 만들지는 못했다.
명훤은 건전지가 닳아 멈춘 시계처럼 집에 들어와 죽은 듯이 밤을 견뎌냈다. 밤은 깊고 길었다. 무저갱에 빠져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도 모른 채 쉴 새 없이 걷는 것 같았다.
네가 없는 하루는 너무 벅차서, 하루에도 몇 번씩 목숨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었다.
“하….”
맹인은 이제는 없는 주언의 자취를 더듬으며 내 눈이 먼 탓이오, 하며 현실을 부정했다. 보이지 않으니 분명 있는데 찾지 못하는 것이라고 자위했다.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주언의 흔적이 사라진다는 걸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건조한 울음은 처절했다. 주언이 없어도 봄은 찾아왔고, 여름이 지났으며, 가을이 찾아왔다. 그리고 또다시 주언을 잃은 계절이 도래했다. 흑백인 세상은 너무도 평화로워 보여서 파괴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도 있었다.
네 목숨은 너무도 덧없는데, 내 목숨은 왜 이토록 질긴지.
지이이잉-
내일 급하게 일정이 잡혔다는 문자를 보고 눈을 감았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를 벗어던지고, 주언의 기억이 쇠퇴하지 않도록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알았다. 주저앉는 순간 더 깊이 빠져 헤어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우주언.”
어쩌면 내가 모든 걸 놓을 걸 넌 알았던 걸까. 그래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설치해 뒀을 확률이 더 높았다.
내가 살게끔. 네가 없는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해서든 살라고. 그래서 나에게 돌아오겠다는 거짓말을 한 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를 죽게 하는 것도 너지만, 나를 살게 하는 것도 너였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줘서 여명훤은 살기로 했다. 숨 쉬는 게 고통인 삶을 영위하며, 네가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볼 생각이었다.
매일 매일 이 개 같은 삶을 견뎌낼게. 그러니까 네가 돌아오면.
“그때는….”
그때는 너만을 위해서 살게. …그러니까 제발 돌아와줘. 이 아득한 시간 속에 나 혼자 두지 말아줘.
“주언아.”
**
“여명훤….”
주언이 작게 명훤의 이름을 읊조렸다. 이제는 습관 같은 거였다. 지하에 있는 사람들만 출입할 수 있는 10평 남짓한 루프탑은 주언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였다.
“정말 안 들어가요?”
“네.”
다른 사람들은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며 코를 훌쩍였다. 주언은 목도리로 목을 둘둘 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먼저 들어가 보겠다는 사람들이 사라지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잊으면 안 되는데….”
눈을 끔벅이며 주언이 계속 명훤의 이름을 읊조렸다. 왜 잊으면 안 됐는지도 기억이 흐릿했지만, 주언은 끈질기게 이름을 반복해 불렀다.
많은 것들이 주언의 속에서 스러지고, 잊혀 갔다. 주언은 때때로 자신의 이름도 잊었다. 어쩔 때는 밥을 먹는 시간도 잊었다. 많은 것들이 잊혀 새로운 삶을 배워나갔다.
“명훤이….”
이 이름을 왜 이렇게 끈질기게 기억해내려고 했을까.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이 사람은 자신에게 행복한 기억만 줬을 것이다.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혀끝이 얼얼할 정도로 달았다.
툭.
“눈?”
손등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놀란 주언이 하늘 위를 쳐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느덧 구름이 하늘 전체를 덮고 있었다. 손등을 멍하니 쳐다보자 곧 눈송이가 손등의 열기에 녹아내렸다.
“여….”
뭐였더라. 분명 잊으면 안 되는 걸 잊었던 것 같은데. 손등에 떨어진 눈을 의식하는 사이 주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스러졌다.
**
4년 후.
-우리나라의 기관 소속 강윤재 연구원이 노렐 화학상 후보에 올랐다는 지난주 소식이 연신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작년 말에 풍화증 치료 방법을 발표해 노렐상 수상이 아주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고 합니다. 기관 측 입장에 따르면 풍화증 치료제의 상용화는….-
띡.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금세 화면이 전환되고 다른 화면이 떴다.
-S급 에스퍼인 여명훤 씨는 기관의 제한된 정보 노출에 관하여 언급해주신 적이 있는데요….-
발그레한 얼굴로 여명훤의 인터뷰를 하는 리포터와 그 옆에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하고 있는 여명훤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까지고 시민들에게 정보를 제한할 수 없다고 판단한 기관 측은 여명훤을 미디어 매체에 내세워 전과 다른 방침으로 에스퍼를 다뤘다.
“저 새끼는 왜 갑자기 저렇게 TV에 많이 나오지.”
강윤재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들기며 못마땅한 얼굴로 화면 속 여명훤을 바라보았다. 여지웅은 목적을 잃은 여명훤이 순순히 말을 듣는 것에 만족스러워했지만, 강윤재는 어딘가 께름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똑똑.
“선생님. 우주원 씨 도착하셨는데 안으로 들여보낼까요?”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의 말에 윤재가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띡. 윤재는 TV 화면을 껐다. 굳이 보일 필요 없는 얼굴이다. 웬만하면 다시 보지 않고 싶었다. 윤재는 윤재만의 평화를 찾았으므로.
똑똑. 아까와 다르게 작고,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윤재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티 테이블 앞에 윤재가 앉음과 동시에,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사이로 주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나 조금 일찍 왔는데, 괜찮아?”
“그럴 줄 알고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윤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주언을 반겼다. 오늘은 주언의 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주언이 안에 들어와 익숙하게 윤재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 안 기다려도 되는데.”
주언이 뒷목을 쓸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기다리는 거.”
“매번 나만 너 기다리게 하는 거 같아서….”
“기다리는 게 대수인가.”
“그래도….”
“환자는 완전히 낫는 거나 걱정해.”
주언은 풍화증 치료 후 제2 지구, 경기도 외곽 쪽으로 거처를 옮겼다. 윤재도 함께 부근의 기관 부속 병원으로 옮겨 주언의 상태를 살폈다.
주언은 윤재에게 부채 의식이 있었다. 장래가 유망한 윤재가 기관 본사에서 제2 지구 외곽까지 굳이 옮긴 건 주언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벌써 1년째 이곳에 머무는 윤재에게 떠나도 된다고 했지만, 윤재는 주언이 완전히 완치할 때까지 곁에 남겠다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풍화증은 완치했지만 여러 가지 후유증과 아직까지 살펴봐야 하는 것들이 남아 있긴 했다.
“그래도….”
“치료제의 효과가 있어도 재발될 수 있으니까 지켜봐야 하는 거 알지?”
인공 장기에 의지해야 하는 주언에게 혹시라도 풍화증이 재발되면 몸이 견뎌내기 힘들지도 몰랐다. 그래서 주언은 가이드가 아닌 평범한 아르바이트생으로 살게 되었다. 재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아직 있기 때문이었고, 가이드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관에 입사 후 있던 관련된 기억이 가장 많이 소실됐다.
‘참 다행이게도.’
윤재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모든 상황이 윤재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주언이 다니는 아르바이트의 점장에게도 윤재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주언은 그 사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지만.
“응. 알아.”
주언이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재가 미리 준비해둔 이번 달 검사 수치표를 주언에게 보여주며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