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32화 (32/112)

#32

“아직 수치가 완전히 안정권에 들어간 건 아니니까 조심 좀 해야 할 것 같아.”

“응.”

“그래도 나아지고 있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응.”

“기억이 돌아온 건 없고?”

“…응. 없어.”

모두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굳게 믿었다.

‘주원 씨는 참 운이 좋아.’

알바를 할 때마다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냐는 주변의 말을 많이 들어왔다. 주언도 인정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닌 기억조차도 없는 사람이 홀로서기까지가 얼마나 어려운지 연구소에 빠져나온 후 1년 동안 뼈저리게 경험했다.

설상가상으로 원래 이름은 우주언이지만, 사망 신고 이후 새로운 신원으로 살아가야 했다. 서른이 넘어서 이력 하나 없는 사람이 된 주언에게 윤재가 없었으면 사는 게 더 힘들었을 거라는 건 명백했다. 고마웠고, 그런 윤재에게 남들과 다른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맞은편 자리에 앉아?”

“그냥…?”

탁탁. 윤재가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주언은 머뭇거렸다. 윤재가 좋았다. 항상 감사하고 있었다.

눈을 뜰 때마다 기억을 잃었다. 처음에는 무서워했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기억을 잃는 걸 두려워하는 사실조차 잊었다고 했다.

‘주언아. 내가 누군지 기억해?’

‘…누구세요?’

‘주언아.’

‘어… 저 아세요?’

‘당연히 알지.’

윤재는 그럴 때마다 곁에서 주언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곳이 어디고, 주언이 어떤 상태이며, 임상 시험의 진행이 어디까지 됐는지까지. 잊을 때마다 윤재는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주언이 쭈뼛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경기도 외곽으로 내려와 생활은 안정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때때로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옆에 앉아.”

“그래도 검진 시간인데….”

“우리 둘밖에 없잖아.”

털썩. 주언이 윤재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주언은 물끄러미 윤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속눈썹이 워낙 긴 탓에 눈을 깜박일 때마다 이마를 덮는 얇은 모발이 움직였다. 그 아래로 날렵한 코와 살짝 위로 올라간 눈매 탓에 날카로워 보이는 분위기를 풍겼다. 연구소에서 오래 있었지만 꾸준히 운동을 한 탓에 날렵한 몸이 그를 한층 더 예민하게 보이게끔 만들었다.

굴곡진 손가락이 주언의 뺨에 닿았다. 하지만 생긴 것과 다르게 윤재는 늘 주언에게 상냥했다.

“그리고 내 애인인데 내가 신경 써야지. 누가 신경 써.”

그러니까 이상한 건 자신인 게 분명하다. 인간적인 호감으로 치부하기엔 컸지만, 사랑이라고는 단정 지을 수 없는 감정이 무겁게 주언의 가슴을 짓눌렀다.

윤재의 말에 주언의 몸이 티 나게 흔들렸다. 윤재는 잠시 멈칫했으나 곧 손을 뻗어, 주언의 허리를 휘감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근래 들어 바빴다고 한 걸 증명하듯 살짝 거칠어진 피부 결이 한눈에 들어왔다.

움찔. 주언의 살결에 윤재가 완전히 닿기 전 주언이 몸을 뒤로 뺐다.

“윤재야.”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무엇이라도 말해야 된다는 부담감에 입술을 달싹였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고작 이름을 부르는 게 다였다.

복잡한 마음에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주먹 쥐었다.

“알아. 기억 못 하는 거.”

윤재가 이해한다는 듯 주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전의 우리는, 기억의 잃기 전의 나는 이런 스킨십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나.

“미안.”

“미안할 일은 아니잖아.”

“그래도….”

윤재는 기억을 잃었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했다. 친구부터 차근차근. 언제가 됐든 기다리겠다고 했다.

“내가 성급했어.”

윤재가 이마를 짚으며 사과했다. 사과할 사람은 네가 아닌데… 주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윤재가 재촉한 적은 없지만 이런 어색한 순간이 찾아들 때마다 주언은 조바심과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기억을 빨리 못 찾아서… 미안.”

기억을 잃어서 감정도 같이 잃어버린 걸까. 평생 기억을 찾지 못하면 윤재에 관한 감정도 이대로인 걸까. 그러면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분명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미안해하지 마. 기다리겠다고 한 건 나니까.”

“벌써 1년이나 지났으니까. 평생 기억이 안 돌아오면….”

“상관없어.”

“…….”

“언젠간 날 사랑하게 될 테니까.”

자신감에 찬 윤재의 목소리에 주언의 시선이 흔들렸다.

“미안.”

“또 사과하네. 나 이제 사과 그만 듣고 싶은데.”

“…응.”

“내가 결정한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응. 고마워.”

윤재가 주언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이 정도의 거리감도 낯설었다. 하지만 차마 밀어낼 수 없어 주언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윤재의 적당한 무게감을 견뎌냈다.

“참. 나 당분간 못 보는 거 알지?”

“어, 응.”

주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소에서 나와 제2 지구에 온 이후로 한 번도 윤재와 오래 떨어져 본 적 없었다. 어쩌면 이번이 마음을 다잡을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아직 주변 상황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많이 벅차하니까 조심해.”

미디어 매체를 접하면 기억을 찾는데 안 좋을 수 있다며 제한당했다.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연인이었던 윤재조차 낯선 상황에서 자신에게 안 좋을 영향을 줄지 몰라 결국 받아들였다.

“응.”

연인이기 이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해가 될 말을 할 리 없다고, 주언은 굳게 믿었다. 주언은 그런 윤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얼른 다시 예전처럼 윤재를 사랑하고 싶었다.

주언이 일정한 간격으로 뛰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

채도 낮은 새벽 특유의 느낌에 어슴푸레 눈을 떴을 때, 눈물은 이미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물에 흠뻑 젖어 무거워진 속눈썹이 느껴졌다.

“또 이러네.”

주언이 몸을 반쯤 일으키자 눈물이 그새 다시 맺혔는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눈물이 옷 위에 짙은 자국을 냈다. 때때로 그럴 때가 있다. 분명 꿈을 꿨는데 내용은 희미하고, 감정만이 잔재처럼 남아 마음속이 수런거릴 때.

주언은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눈을 뜬 후에도 한참이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해일처럼 덮쳐오는 감정을 소화시키기 위해 벽에 등을 기댄 채 묵묵히 밀려오는 감정을 삼켜냈다.

겨우 떠오른 건, 누군가 제 어깨를 감쌌다는 것 정도였다.

‘특별한 행동도 아닌데….’

어깨를 껴안던 감촉이 허상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공허함이 주언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과거의 파편일까. 어쩌면 중요한 장면일지도 몰랐다. 주언이 이마를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깊게 생각해봐도 한 번 가라앉은 생각은 도통 떠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어나야지.”

커튼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올 때가 돼서야 주언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언이 한숨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켠 후, 욕실로 향했다.

쏴아아. 뜨거운 물이 피부 위에 쏟아져 내릴 때마다 주언의 정신이 완전히 깨어났다. 거품 칠을 하며 주언은 샤워를 하며 허벅지 안쪽에 있는 문자를 쓸었다.

Remember OSIS.

필기체로 적혀 있어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어떤 이유로, 왜 이런 문자를 남이 보기 힘든 곳에 새겼을까. 중간에 a만 붙으면 오아시스라는 쓸데없는 추리까지 했지만, 결국에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윤재한테 물어볼까.”

어째서인지 여태껏 묻지 못했다. 민망한 부위에 있어서 혹시라도 보여달라고 할까 싶은 이유도 있었다.

연인에게 이런 곳을 보여주는 게 이토록 불편한 일이라니.

“후우….”

보여주지 않고 물어봐도 되겠지만, 혹시라도 생길 서로의 내밀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럴듯한 분위기’의 가능성을 아예 말살시키고 싶었다.

주언이 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계산을 저도 모르게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할 때마다 기분이 축 처졌다.

윤재가 좋았다. 하지만 그건 같이 알바하는 동료도 마찬가지였고, 식사를 준비해주던 영양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보다 더 특별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같은 감정의 연장선일 뿐 완전히 별개로 특별하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내가 이상한 거겠지….”

주언이 중얼거리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를 성적으로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몹시 어색하게 느껴졌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를 타인이 기억하고 있다는 게 이토록 껄끄러운 일이었나.

“어렵다….”

과거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기억 못 하는 자신이 마치 죄인처럼 느껴졌다.

**

재활을 끝마치고 주언이 알바를 하게 된 곳은 병원 부근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점심시간이 끝난 후, 손님이 한꺼번에 빠져나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카페 내부가 한적해졌다.

조금 있던 설거지를 끝낸 주언이 빈자리에 앉아 턱을 괴며 한숨을 돌렸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보다 버벅거리는 일이 많이 줄었지만 긴장을 한 채로 주문을 받느라 금세 피로해졌다.

아침부터 시작된 주언의 고민은 구영에게까지 닿았다. 혼자 끙끙 앓던 속내를 비치자 숨통이 트였다. 주언의 고민을 듣던 구영이 옆 테이블을 닦으며 물었다.

“형, 원래 남자 안 좋아한다고 했었나?”

“아마… 그랬던 거 같아.”

기억이 온전치 않아 주언이 모호하게 답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주언 나름대로 자신의 과거를 더듬어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윤재마저 이토록 어색한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아주 나쁜 생각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라도 떨리는 감각을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이 고장 나지 않은 걸 증명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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