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33화 (33/112)

#33

“아무래도 기억이 감정에 큰 역할을 하지 않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기억은 없고, 감정만 남는 것도 이상한 거 같긴 해.”

“기억을 되찾으면 조금 나아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대답이 뭐 그래.”

“시간이 지났으니까 감정이 변했을 수도 있지. 항상 똑같을 수는 없잖아.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기분 다른 것처럼.”

“비유가 이상한데?”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할 때 알게 되어, 같이 알바까지 함께 하게 된 구영은 근래 들어 주언의 고민을 가장 많이 공유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공식적으로 주언은 우주원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대외적으로 주언은 큰 사고를 당해, 몇 년 동안 식물인간이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기억 상실은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되어 있어 주언이 몇 년간의 기억이 없는 게 자연스럽게 해명되었다.

“갑자기 불타오르는 사랑이 아니라서 형이 눈치 못 챘을 수도 있고. 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

구영이 자신의 한쪽 어깨를 주무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주언은 구영이 무던해서 좋았다. 무슨 고민을 말해도 그 고민이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무신경하지는 않아서, 그냥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고민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다 닦았다.”

“수고했어.”

“뭐 마실래, 형? 나 앉기 전에 말해.”

“난 아메리카노.”

강윤재는 기관 본부 연구실 소속 연구원으로 알려지지 않고, 1지구에 있다가 주언과 함께 2지구로 이직한 의사로 알려져 있었다. 누가 봐도 주언에게 지극정성이었다. 그런 윤재를 두고 생각으로나마 다른 사람을 생각했던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여기.”

“고마워.”

어느덧 음료를 가지고 온 구영이 옆자리에 앉았다. 구영이 턱을 괴며 음료를 쪽 들이켰다.

“한 번 서프라이즈로 찾아가 보는 건?”

“갑자기?”

갑작스러운 제안에 주언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고하고 가는 거면 서프라이즈가 아니라 약속이지.”

“그렇긴 한데….”

“가끔 보면 형은 무슨 빚진 사람처럼 절절매더라.”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능력도 좋아 보이던데 바람피우러 간 거 아니야?”

“에이….”

펄쩍 뛰며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긴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차라리 그러는 편이 속 편할 것 같았다.

“장난인데 내가 너무 심했나 보다.”

“그런 거 아니야.”

저열한 스스로의 생각에 주언이 빨대로 음료를 쭉 들이켰다.

윤재는 며칠 전에 주언에게 말했던 대로 출장을 떠났다. 대외적인 이유로는 학회 세미나라고 되어 있지만 주언은 윤재가 진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윤재는 주언의 곁에 항상 있었지만 1년에 두세 번은 꼭 1지구 쪽으로 올라갔다.

1지구에 있는 특수능력기관 본사. 윤재가 소속되어 있는 곳. 주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곳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본사 지하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일까. 윤재가 예전의 자신과는 연관 없는 곳이라고 단호하게 말했고, 주언이 그곳을 언급하는 걸 싫어했다.

‘너 그때 엄청 아파했으니까.’

임상 시험을 할 때 많이 아파했던 때가 떠오른다는 게 이유였다. 윤재의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때마다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생각만 해도 가슴에 무언가 얹힌 것 같아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읏.”

“괜찮아?”

자신이 변했어도, 기억을 잃었어도 한결같은 애인이 있다는 건 굉장한 축복이었다. 머리로는 수천 번 이해했다.

“…괜찮아. 그런데 갑자기 찾아가면 싫어할 거 같은데.”

“형도 기억이 없는 상태로 받기만 하니까 부담스러워 하잖아. 서로를 배려하기만 하면 뭐 해, 이렇게 불편해하는데.”

“…티 났어?”

주언이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빨리 기억을 되찾아서 이 죄책감을 덜고 싶었다. 마냥 받는 게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억도 없는데, 연인처럼 행동하긴 어려웠다.

기억만 되찾으면. 모든 게 괜찮아지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않나.

“조금.”

“…….”

솔직한 구영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이제 기억 찾고 싶어 하잖아. 형 남자친구는 괜찮다고 하지만.”

구영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사실 그 속에 걱정이 섞여 있는 걸 모를 수 없었다.

“그렇지.”

윤재는 자신이 걱정돼서 그런 거라고 했다. 자신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제한받는 삶은 결코 달가울 수 없었다.

“원래 전형적인 방법이 최고의 방법 아니야? 원래 살던 쪽에 가보면 생각나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

“가볼까.”

가만히 있어서는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다.

“지금?”

“응. 너만 괜찮다면.”

“내가 말해놓고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지.”

구영은 주언에게 가끔 실행력이 지나치게 좋다며 혀를 내둘렀다. 다행히 대타를 해준다는 말에 주언은 안심하고 집에 돌아갔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가방에 짐을 욱여넣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나온 주언은 힘찬 걸음걸이로 기차역으로 향했다.

속을 다 터놓고 얘기하면 괜찮을 것이다. 자신은 깨질 수 있는 유리 그릇이 아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부서질 수 있는 관계라면, 행동 하나로도 다시 찾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닐까.

지레 겁먹지 말자.

짝. 주언이 자신의 양 뺨을 세게 내리쳤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이쪽을 쳐다봤지만 주언은 개의치 않고 눈을 부릅떴다.

한번 마음먹은 걸 밀어붙이는 건 원래 성격인 걸까. 아니면 기억을 잃은 후로 형성된 성격인 걸까. 알 수 없지만 이제 상관없었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도, 지금의 자신도 모두 자신이니까.

주언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기차에 올랐다.

**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진 후였다. 기차를 타고 고작 한 시간 거리인데 이토록 다를 수 있나 싶었다.

기세 좋게 기차에 탔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니 혹시 괜한 행동이었나, 하는 옅은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기차는 주언의 속사정에 따라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주언은 결국 1지구에 도착했다.

윤재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불쾌한 느낌보다는 그리움에 더 가까웠다.

그 기시감은 특수능력기관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 내렸을 때 극심해졌다. 분명 임상 시험을 받았을 때는 내부에만 있었다. 기억을 잃지 않았던 다른 임상 시험 대상자에게 들었던 말을 확실히 기억했다.

툭.

“조심 좀 하세요.”

“죄송합니다.”

밤임에도 반짝이는 네온사인에 어둡지 않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걸음을 뚝 멈추느라 뒤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다.

“…여긴….”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추운 겨울이었다. 옷을 너무 얇게 입고 왔나 싶을 정도로 살갗이 에일 듯이 추운 밤이었다.

1지구에 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지하에 있을 때도 마취제와 수면제에 절여져 온전한 기억이 있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2지구로 옮길 때도 몸이 온전치 않은 상태라 어렴풋이 떠나던 기억만 날 뿐, 그날의 기억이 자세히 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주언은 2지구에 도착해서 생활이 안정되기 전을 떠올렸다. 사람도, 감정도, 상황도 모두 무서울 정도로 낯설었던 때처럼 1지구도 그럴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기차를 타고 역에 내렸을 때, 주언은 윤재가 왜 말렸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강한 향수를 느꼈다. 분명 모르는 곳인데, 낯설지 않았다.

“후우….”

숨을 쉴 때마다 뿌연 공기가 허공에 번졌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언은 손끝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억을 흘려보내는 데 익숙해졌다. 잡히지 않는 기억을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무수한 날들이 있었으니까.

주언은 빠르게 상념을 털어내며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시켰다.

윤재는 밤새워 일하고 이른 아침에 돌아올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윤재가 어디에 있을지는 뻔했다.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고, 다른 길로 새지 않고 본사로 가면 윤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동등해지는 것부터 시작한다. 빚진 기분이 들어서도 안 되고, 윤재가 자신을 보호해야 할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 것부터.

많은 것들이 변하겠지.

“…마음의 준비는 하고 가야겠다.”

주언은 곧장 본사로 향하는 대신 길을 틀어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맨정신에 가기는 힘들 것 같아서 술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었다. 주변에 즐비한 술집을 살피며 들어갈지 말지 고민했지만, 결국 방향을 틀었다. 술집에 들어가면 다시 일어날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카드 앞에 꽂아 주세요.”

결국 주언이 선택한 건 편의점이었다. 소주 한 병을 사서 편의점 앞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반쯤 취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가서 잘 풀리면, 자신이 찾아가는 건 처음이니까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주언은 맨정신으로 그런 일을 할 자신이 없었다.

“너무 한 번에 많이 마셨나.”

자리에서 일어서자 술기운이 확 돌았다. 술이 혈관을 타고 돌아 몸이 조금 따뜻해졌다고 느꼈을 때 주언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심란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 넘기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금 빙 돌아갈 생각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세상이 일렁였다.

느릿하게 걷다가 주언이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춰 섰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향기가 났다. 처음 맡아보는 냄새에 숨을 잠시 멈췄다. 이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와서.

“…어?”

특수능력기관 근처의 번화가는 낮처럼 밝았으나 빛이 모든 곳에 닿는 건 아니었다. 그 바로 옆 작은 골목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남자는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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